-바나나우유의 비밀
그래, 난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게 틀림없어.
마리와 통화를 끝내고 우울함에 침대를 구르면서, 민윤기는 어차피 날 기억하지 못할 테니 그냥 같은 반이었던 여자애1 정도로만 남자고 결심한 후 조금 괜찮아진 기분으로 잠들었다가 아침 등굣길에 마리가 남긴
‘호연이 알고 중국어로 옮긴 거 맞데.’ ‘작년에 너 일본어 쌤한테 서쪽복도에서 걸려서 연구실 청소한 기억나?’ ‘그 날 너 쓰레기 버리러 갔을 때, 선택과목 물어봐서 일본어 한다고 했더니.’ ‘중국어 배우고 싶던 거 아니냐고 물어보셔서, 사정 설명했더니. 걔네 일본어 선택했다고 말씀하셨다는데?’
라는 톡을 보면서는 호연이한테 진작 사정을 설명할 걸 하는 생각 반, 그래도 어떻게 나한테 말을 안해줄 수 있어하는 생각 반. 그리고 내 모든 사정을 알면서도 나한테만 이야기하지 않은 일본어 쌤에 대한 배신감에 떠는 사이, 민윤기와 같은 반이 된 건 머릿속에서 저 멀리 날아갔고,
‘탄소야 안녕?’ ‘어?어. 안녕.’
덕분에 평소 인사도 안하던 애가 건네 인사에 순간적으로 대답하는 바람에 하루 종일 친하지 않은 반 여자애들과 누가 봐도 사대천왕을 보러 오는데 내 핑계를 대겠다는 말을 돌려하는 대화를 반복해야 했다.
‘탄소야! 너 혼자 일본어 반으로 갔다며? 아쉽다...’ ‘아, 어쩌다보니까.’ ‘내년에도 자주 보자!’ ‘아, 그래 뭐.’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김호연은 웃기 바빴다. 자기 일이 아니니까. 결국 가장 끈질기던 마지막 여자애가 떠나고 나서야, 난 책상에 엎어질 수 있었고, 호연이는 그제야 내 상태가 눈에 들어오는지 괜찮은지 물어왔다.
“놀랍게도, 전혀 괜찮지 않아.”
“뭐, 살다보면 걔네랑 같은 반도 되고 그러는 거지. 저기 너 부러워하는 애들 안보이냐.”
“그래, 그럼 넌 왜 중국어로 떠나갔니. 친구야.”
큼. 야, 난 원래 중국어 하고 싶었으니까. 그럼 나랑 마리한테는 왜 말 안했는데. 안 물어봤잖아. 뭐? 바나나우유 먹을래? 너 그거 좋아하잖아. 내가 사올게!
바나나우유를 사온다는 핑계로 자리를 뜨는 호연이를 따라가 뭐라 더 말할까 자기 잘못도 아닌데 우울해하는 나한테 바나나우유 사주겠다고 간 호연이를 괴롭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그만뒀다. 결코 바나나우유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다.
차라리
“호연이한테 있었던 일 다 얘기할 걸.”
그럼 남준쌤이 선택과목 예기했을 때, 말해줬을 텐데. 아니 근데 생각할수록 어이없네. 내가 왜 민윤기를 그렇게 필사적으로 피해 다니는지 알면서 왜 나한테는 말 안하고, 호연이한테만 얘기해준 건데?
선생님들이 하는 반배정 특성상 일본어로 가면 남준쌤 반으로 배정 받아서 1년 아니 3학년 때까지 부려질 걸 예감하면서도 걔 피하려고 일본어 고른 걸 뻔히 알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근데 진짜 설마 그날일 기억하고 있진 않겠지? 그러니까 그 날은 작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년 여름 장마가 오기 직전 유난히 무덥던 어느 날, 나를 포함한 네 사람(마리, 안나, 호연)은 점심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채 산책을 하고 있었다.
더운 여름날 무슨 산책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 네 사람은 호전고에 입학하기 전 학교를 탐험하러 왔다가 지금은 쓰이지 않는 구교사 건물이 있는 쪽을 둘러보다 나무가 무성하게 자란 산책하기 좋아 보이는 장소를 발견했고, 입학하면 매일매일 운동할 겸 걷기로 약속했었다.
그 약속을 잊지 않은 우린 입학 이래 매일 산책을 나왔고, 자주자주 걷다보니 나무가 무성하던 곳을 길도 생겨서 오솔길 같이 변한데다, 나무가 무성해서 그늘도 진하게 져서, 아이스크림을 하나물고 걷다보면 평온해지는 장소라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그 날도 그런 날 중 하루였을 뿐이었다. 평소와 다른 거라고는 내가 평소 먹던 빠*코가 없어서 대신 막대아이스크림 하나였는데, 그게 바로 문제가 되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수다도 떨다보니 어느 순간 막대에서 녹은 아이스크림으로 내 손이 끈적거리기 시작했고, 난 손을 씻기 위해 전에 봐둔 구교사 뒤쪽에 남아있던 수돗가로 향했다.
여기서 수돗가에 가지 않았다면 평소처럼 점심먹고 아이스크림을 먹은 걸로 끝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날따라 깔끔을 떨었는지, 교실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에서 씻거나, 양치할 때 씻으면 되는 걸.
쨌든 찜찜함을 참지 못한 난, 수돗가로 향했고, 아무 생각 없이 수도꼭지를 돌렸다.
그 순간,
‘야!’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날 끌어안았고, 물이 쏟아져 내렸다. 거기서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은 갔을지도 모르는데, 낯선 남자애에게 끌어 안겨진 난, 물이 쏟아지는 것도 모르고 몸을 움직이면서 벗어나려고 하다 남자애가 날 더 감싸면서
‘가만히 좀 있어.’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난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고, 그제야 남자애는 손을 뒤로 뻗어 수도꼭지를 반대로 돌려서 물을 멈추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물이 완전히 멈추고 나서야 남자애는 날 놔줬고, 난 맑은 여름 하늘 아래, 홀로 비 맞은 생쥐마냥 쫄딱 젖은 남자애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에 내가 젖은 곳이라고는 남자애한테 벗어나려고 손을 휘두를 때 튄 걸로 보이는 팔이 전부였고, 갑자기 끌어안은 남자애를 의심하다 더 젖게 만든 것 같아..물론 의심할만한 상황이긴 했지만.
쨋든 미안함을 느낀 나는 엄마가 아침마다 챙겨주던 평상시에는 쓸데없다고 여기던 손수건으로 남자애 팔의 물기를 닦으면서 사과를 건넸다.
‘여기 수도꼭지 고장난거니까 다음부터는 열지 마. ‘헐. 몰랐어. 진짜 미안해.’ ‘됐어. 넌 젖은데 없어?’ ‘어? 응 덕분에. 진짜 고마..어?’
그렇게 남자애와 대화를 하면서 고개를 들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과 내가 굳이 닦아줄 필요가 없다는 걸 눈치 채고, 물러서려다 남자애의 발까지 밞고 넘어질 뻔 했고, 이번에도 남자애가 날 잡아줬다.
‘헉. 민윤기?’ ‘내 이름은 아네.’ ‘어?’ ‘난 아직 네 이름 모르는데.’ ‘아. 헐. 진짜 미안해. 여기 손수건. 나머지는 네가 닦는 게 좋겠다. 난 친구들이 기다려서. 진짜 미안해!’ ‘뭐? 야! 잠깐만.’
넘어지려던 날 붙잡아주던 순간, 남자애의 얼굴을 확인한 난, 날 구해준 애가 민윤기란 걸 알고. 놀라서 남자..아니 민윤기의 이름을 불렀고.
부르고 나서야 호연이랑 안나가 얘기하고는 하던 사대천왕의 싸움이나, 집안 얘기가 순차적으로 떠올라서 손수건을 민윤기의 손에 강제로 떠넘기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었다.
물론 이건 내 시점에서 지나치게 순화된 거고, 민윤기 입장에서는 훨씬 더 어이없다 못해 황당하겠지, 기껏 구해줬는데 자기 얼굴 확인하자마자 사색이 돼서 도망치는 여자애라니.
심지어 민윤기는 이 날 점심시간에 젖은 채로 교실에 나타나더니 누가 민윤기를 젖게 만들었나에 대한 의문만 남긴 채, 독감에 걸렸다는 소문과 함께 삼일이 넘게 결석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손을 씻으러가는 날 뒤늦게 따라왔다가 민윤기가 날 끌어안는 장면부터 내가 도망치는 것 까지 전부 목격한 마리와 나, 둘만의 비밀이 되었다. 내가 중앙계단에서 민윤기랑 마주칠 뻔 했다가 서쪽계단으로 도망치는 걸 남준쌤이 목격할 때까지만. 그 때 서쪽이 아니라 동쪽계단으로 도망쳤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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