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량이 많습니다, 여유로운 시간대에 느긋하게 보시길 권장합니다.*
*어전회의를 하는 장면인지라 월은국의 지역명이 나올 수 있으나, 여기서 언급되는 지역명은
모두 허구임을 알립니다. 뭐 사실 월은국도 허구의 나라니까요. ^~^*
*여기서 언급되는 군(郡)은 지금의 경상도, 전라도와 같은 '도'의 개념으로 보시면 되고,
현(縣)은 고양시, 전주시와 같은 '시'의 개념으로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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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햇살과 함께 황궁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정국이 감은 눈을 뜬 채 일어나니, 화홍은 이미 침대 너머에서 궁녀들과 함께 몸단장에 여념이 없었다.
아직 묘(卯)시(오전 5~7시) 인데.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빈 채, 화홍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국은,
확실히 한 나라의 황제다보니 저렇게도 잠이 없는건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황제께서 일어나시는데 어찌 한낱 첩이 늘어지게 잠을 잘 수가 있으랴. 결국 정국도 힘겹게 일어나,
세숫간에서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겨우 세수를 할 뿐이건만, 자신의 시중을 들기 위해 내관들부터
궁녀들까지 곁을 지키고 서 있다니. 이런 상황은 여러 번 겪어도 익숙치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정국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공기 속에서 세숫간을 나와 다시 화홍의 처소로 들어온 정국의 앞에는 꽤나 먹음직스러운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과 같이 먹을 것이라 화홍이 신경을 쓴 듯한 모양이었다.
쌀밥에 고깃국만 먹어도 충분한 자신에게 무려 12첩 반상이라니, 이 무슨 뜬금없는 호사란 말인가.
'전정국, 이제부터 네가 진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을 살려나보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자신이 웃겨 잠시 미소를 짓다가, 어젯밤에 궁주인 석진이 알려준대로 화홍에게
익숙치 않은 높임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폐하, 기침(起枕) 하셨습니까?"
으,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어색해서 몸서리를 치는 정국이었다. 그리고 정국의 그런 모습이 왠지 귀여웠던
화홍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래, 기침하였다. 넌 어제 잠자리가 어땠느냐, 괜찮았느냐?"
"예, 그, 그렇습니다."
"우선, 아침을 먹고 이야기하자꾸나."
먼저 숟가락을 든 화홍은, 정국에게 어전회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 진(辰)시에 어전회의가 있다. 어전회의는 궁주에게도 들어서 알겠지만, 문하성에서 미리 상소를 심사해,
그 중 가장 주요한 상소들이 어전회의의 안건으로 정해진다."
"중서성은 안건을 바탕으로 한 나의 명령을 조서로 작성한다. 그리고 그것은 상서성에 전해져,
좀 더 잘 다듬어진 명령이 되어 백성들에게 공포되는거지. 이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있느냐?"
"아닙니다, 전날 궁주님께 들어 괜찮습니다."
화홍은 타국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이해력이 빠른 정국을 흐뭇하게 쳐다보다 이야기했다.
"오늘 어전회의에선 상소들과 별개로 네 말이 나올 가능성이 많다."
순간 정국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음... 그냥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 불안하게 만들 의도는 아니었건만.
화홍은 정국의 볼에 손을 가져가 조용히 쓰다듬으며 나지막히 이야기했다.
"걱정 말거라. 보나마나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널 음해할게 뻔한데, 그 정도를 막지 못할 정도였다면,
난 황제가 될 자격이 없었을 것이다. 이미 이 궁에서 축출되고도 남았겠지."
"그러니까 네가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듣던간에 넌 더 당당해져야 한다."
자신에게 떳떳하고 당당한 사람은, 어떠한 적이 와도 능히 상대할 수 있을테니. 식사가 끝나갈 때쯤 남겼던,
화홍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래 전정국, 무엇이 두려우랴. 월은국에선 어차피 나 혼자뿐인 몸.
이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데. 차차 적응하면 되겠지. 그러다보면 본국으로 돌아갈 기회도 생길 테고.
그렇게 화홍이 어전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회의에서 언급될 상소를 미리 읽어보는 동안, 화란관으로 돌아온
정국은 드디어 석진과 마주했다. 어제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눈 편도 아니었건만,
합방이라고 긴장을 하다가 석진과 마주하니, 오랜 친구와 조우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정국이, 합방은 잘 하였는가? 혹시, 폐하께서 자네의 방중술(房中術)에 실망하신 건 아니고?"
물론, 석진의 장난기가 다분한 말 탓에 적잖이 당황하긴 했지만.
그렇게 잡담을 하다, 어전회의 시간이 가까워오자 잡담을 멈춘 채, 자신이 예전에 쓰던 것과는 다른 칼을 차고,
예전에 입던 것과는 다른 옷을 입은 채 궁주님인 석진의 뒤를 따르는 정국이었다. 물론, 어전회의가 뭔지는 아나 싶은,
지민이란 꼬마아이도 함께였다. 지민은 들뜬 채 석진의 곁에 붙어 재잘대기 시작했다.
"우와, 어전회의라니. 기대됩니다. 전 어전회의를 참석해보는 게 처음입니다."
"그러하냐. 그 동안 어전회의를 가고 싶어서 얼마나 참았을꼬.
"아주 전 왕따인가봅니다. 두 분만 가셔서 제 몫을 하셔도 되겠네요."
"에이, 그래도 정국이 자네 없음 안 되지. 우리 화란관의 화(花) 담당이 아닌가."
"설마 궁주님께서 란(蘭) 담당이다. 이런 말씀을 하시려는건 아니죠?"
"어, 어떻게 알았나? 자네 혹시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겐가?"
"에휴, 촉새같은 난 때문에 화란관이 바람잘 날 없겠군요."
세 사람이 발걸음을 맞추어 도착한 어전회의장은 정국의 생각보다 더 위압감이 넘쳤다. 황제가 앉는다는 용상(龍床)은
그 위상이 상당해보였고, 석진의 안내를 따라 용상 오른쪽 아랫단에 지민과 함께 선 정국은
어전회의 시간에 맞추어 속속들이 도착하는 신하들을 보며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기 시작했다.
곧이어 화홍이 상궁들과 함께 등장해 용상에 앉았다. 화홍이 자리에 앉자, 화홍의 왼쪽 아랫단에 선 상선내관이
"어전회의를 시작하겠소이다." 라고 말하며 회의가 시작되었고, 곧이어 문하시중이 안건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안건은... 남부군(南府郡) 남현(南縣) 에서 작년에 가뭄이 들었는데, 구휼미가 모자라 구휼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안건이옵니다."
흐음, 잠시 고민을 하던 화홍이 문하시중에게 나지막히 물었다.
"남부군 태수와 남현 현령을 궁으로 부르라는 명은 어찌 되었는가?"
"황명인데 두 사람이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둘 다 이리로 불렀나이다."
곧이어 남부군 태수와 남현 현령이 머리를 조아리며 화홍 앞에 섰다. 화홍은 우선 남부군 태수에게 물었다.
"그래. 5만 석에 달하는 구휼미를 남현으로 보냈는데, 부족하시단 말씀입니까?"
"예, 폐하. 지금도 구휼미가 모자라 저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기근을 해결하는 데 힘이 드옵니다."
"그런데..."
"예, 말씀하십시오 폐하."
그 전보다 표정이 굳은 화홍이 남현 현령을 향해 물었다.
"남현 현령은 처음 들었다는 눈빛을 보였다. 현령, 어찌 된 일인지 소상히 말하라."
"저, 그게..."
쾅- 일순간 표정이 일그러진 화홍이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였다. 순간 장내가 얼어붙었다.
그러나 화홍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물었다.
"남현에 도착한 구휼미가 몇 석인지 바른대로 말하라 하였네!"
"그, 그것이... 도착한 구휼미는 1만 석이었습니다요..."
하- 바람빠진 화홍의 호흡이 장내를 감쌌다. 분명 태수가 조정의 세금으로 보낸 구휼미를,
필시 개인 재산으로 착복했던 것이리라. 잠시 이마를 짚던 화홍은 사관을 향해 외쳤다.
"사관은 받아적게."
"조정의 구휼미를 함부로 개인 재산으로 착복한 남부군 태수를 오늘부로 파직하라."
"폐하!"
"그리고, 남현에 구휼미가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조정에 재확인하는 등의
절차를 거치지 않아 백성을 기근에 빠트린 남현 현령은 3개월 간 근신토록 하라."
화홍의 명령에 곳곳에서 "지나치시다."는 탄식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화가 난 화홍이
장내에 있는 대신들을 향해 질책하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같은 벼슬아치라고 뻔뻔하게 저들을 편드는 경들 스스로가 우스운 줄 아셔야지요."
"빨리, 문하시중은 다음 안건을 발표하시오. 누가 보면 오늘 어전회의에서 처리할 안건이
남현 구휼미 안건뿐인줄 알겠소이다."
예. 짧게 대답한 문하시중이 다음 안건을 발표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하시중마저도 차마 안건을 말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무슨 안건이길래 제게 보고를 못하시는 겁니까."
"그것이... 중서성에서 폐하의 정식 혼인에 관한 안건을 올렸는지라..."
아주 산 넘어 산이구나, 그들의 구태의연한 정치 행태가 이제는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한 나라의 황제이기에 전보단 감정을 가라앉히며, 애써 담담하게 묻는 화홍이었다.
"그래, 짐의 정식 부군으로 경들은 누구를 추천하고 싶소이까?"
이 때다 싶어 이부상서가 간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중서령의 맏아들이 책임감이 강하고 박식하여 폐하의 부군으로 손색이 없을 것 같사옵니다."
어쩌면 저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이 예상을 벗어나질 않는지. 화홍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중서령께서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화홍의 질문의도를 깨달은 중서령은 묵묵부답이었다. 화홍은 어이없는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이보시오, 경들. 어전회의에서는 최소한 말이라도 맞추고 오는 성의를 보이셔야지요."
"그리고, 그리도 중서령의 맏아들을 추천하시는데, 그 맏아들은 이미 정인이 있다는 사실을 내 모를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차라리 경들이 그렇게 받들어 모시는 중서령을 제 부군으로 추천하시면, 경들의 노력이 가상해서
박수라도 보내고 싶습니다만, 이건 저를 놀리시는 것 밖에 더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예상대로 장내는 살얼음판이었다. 그 때, 병부상서가 아랑곳않고 입을 열었다.
"물론 그 점에 있어서는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저희들의 잘못이 큽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벌써
첩을 이백 명씩이나 두신 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광현국에서도 천인 출신이라 손가락질받는 첩을 들여왔다 하시던데,
어찌 저희가 폐하의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이야기구나. 예상했던 바였다. 그러나 예상했던 이야기가 병부의 최고 수장인 병부상서의 입에서 나오니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하며 애꿎은 칼자루만 꽉 쥔 정국이었다. 그 때, 석진이 그런 정국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주며 말없이 다독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말에 전혀 굴하지 않으며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던 화홍이 대답했다.
"선황께서도 제2황후와 귀비를 비롯하여 삼백 명의 첩을 두셨습니다. 설마 제가 여인이라고 안 된다 하진
않으시겠지요."
"그리고 제 첩이 광현국에서 왔든, 천인이든, 그것은 저의 사생활 문제입니다. 언제부터 병부의 수장께서,
저의 사생활을 간섭하실만큼 그리 한가하셨습니까? 병부가 시간이 그리 남아돈다면 제가 야근을 시켜드릴수도
있습니다만."
"오늘은 경들도 이만 돌아가보세요. 남은 안건은 다음 어전회의 시간에 이야기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 말에 대신들은 하나 둘 어전회의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휴우- 오늘도 어전회의가 길어졌군.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화홍은 용상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때, 조심스레 그 옆을 정국이
따라붙었다.
"저..."
"무슨 일이냐."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뭇대던 정국이 작게 이야기했다.
"지,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걸음을 우뚝 멈추어 섰다. 어찌 이런 아이가 다 있을까. 어젯 밤 합방 때는 자신과 맺었던 계약과 상관없이,
사과가 꽤나 빠르다. 라며 용기있게 할 말을 다 하다가도, 아침에 서툴게 아침안부를 물었던 모습이나,
자신을 지켜주었단 이유로 이렇게 직접 찾아와 고맙다 말하는 모습을 보니, 남동생마냥 귀여운 느낌이 들어
살풋 웃음이 지어졌다.
겉모습과 달리 삭막하기 그지없는 궁궐 안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구나.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화홍은 뒤돌아보며 정국에게 이야기했다.
"오늘 밤에 네게 시킬 일은 없을 것 같구나. 궁주가 할 일밖에 없으니."
"때마침 서역에서 새로운 차가 공물로 왔던데, 같이 차라도 한잔 하지 않겠느냐."
신지무의信之無疑- 순수하게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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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홍 너란 여자 차궐녀... 하지만 정국에겐 따뜻하겠지...
++) 네 주변인물소개가 아무래도 등장인물이 많다보니 정리하는 데 오래 걸릴 듯 합니다.
화홍의남자 G편 쯤에 한 번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 남준이 언제 등장하냐구요? 기다리세요... 쓰니 촉에 의하면 F~G편쯤에 본격 등장할듯
++++) 마지막으로 가슈윤민기님 윤기설탕님 땅위님 입틀막님 하설님 몬모니님 둘셋님
암호닉 감사합니다! 암호닉은 쓰니가 연재하는 가장 최근화에서 신청하시는 게 도움이 됩니다.
항상 감사히 받겠습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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