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버섯 더 넣을까?”
“어어. 고기도 넣자.”
눈 앞에서 젓가락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육수에 온갖 야채와 고기가 들어갔다. 나는 정신이 거의 반쯤 나간 상태로 내 앞에 있는 만두 쪽으로 젓사락을 뻗었다. 사실 아까 사거리를 건널 때도 나 때문에 차 한 대가 크락션을 크게 울렸었다. 정재현과 같이 있었다면 잔소리가 쏟아졌을 거다. 야, 너 앞에 똑바로 안 보고 다녀? 하고. 안 봐도 비디오다. 만두가 작게 풍덩 소리를 내며 육수 안으로 떨어졌다. 그에 손을 멈칫 했다. 아, 정재현 생각 하지말자.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먹기를 시작한 동기가 맛있다며 내 접시에 고기를 건져준다.
“오.. 땡큐.”
“진짜 맛있다. 나 훠궈 처음 먹어봐.”
여자애들끼리 모여서 그런지 대화주제가 빠르게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개강 거지같다가 주제 였는데 지금은 이번에 나온 신상 화장품 얘기 중이다. 나는 그거 좋다고 하더라, 한 마디 한 후 먹는데에 집중했다. 야채 종류도 많았고 고기도 야들야들 해서 맛있었다. 나중에 정재현이랑..., 아나 또. 한순간 고기가 껌처럼 질겅 거렸다. 결국 다 씹지도 않은 고기를 꿀꺽 삼킨 후 젓가락을 내려놨다. 이러다 정말 얼마 먹지도 않은게 다 얹힐 것 같았다. 무겁게 숨을 내쉬며 냉수를 벌컥 들이켰다.
“아 맞다. 너네 그거 들었어?”
그때 맞은 편에 앉아있던 동기가 박수를 짝 치며 물었다. 나를 포함한 다른 동기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주목했다. 이렇게 또 주제가 바뀌는구만. 동기는 입 안에 있는 걸 삼키려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곧 입꼬리를 씩 올린다.
“소윤 선배랑 현수 선배랑 사귄대.”
한톤 높아진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그야말로 대박사건이었다. 다들 먹는 걸 멈추며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것이 한 학번 선배인 두 사람은 우리 과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베스트 프렌드 포에버 –☆ 였기 때문이다. 워낙에 서로를 동성친구 대하듯이 대해서 서로 좋아하냐고 의심하는 사람도 없었다. 정말 그 정도로 아무 낌새도 없었는데 갑자기 사귄다니.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게 다시 한 번 느껴져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 선배가 소윤 선배 좋아하고 있었대. 근데 진짜 티 하나도 안 났잖아, 그치?”
또 끄덕끄덕. 내심 부러운 마음이 물씬 들었다. 난 내 스스로가 마음대로 안돼서 진짜 죽겠는데.. 현수 선배 대단하다. 입을 쩝 다셨다. 마음이 어수선해 내려놓은 젓가락을 만지작 거렸다. 이거 봐. 생각하지 말자고 했는데 또 정재현 생각하고 있잖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근래 이렇게 푹 숨을 내쉬었던 이유가 모두 정재현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물컵을 들었다. 입맛도 다 떨어졌고,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에 자꾸 손이 냉수로 향했다. 그렇게 반쯤 남은 물을 한 모금 마셨을 때 옆에 앉아있던 동기가 역시~! 라고 말문을 열며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냐? 다 한쪽이 좋아하는데 아닌 척 하면서 친구 하는 거지.”
쿨럭. 귓구멍을 찌르는 말에 사레가 들렸다. 나는 연신 기침을 하며 가슴께를 주먹으로 두들겼다. 내 갑작스런 이상행동에 뜨겁게 불타던 대화가 중단됐다. 동기들이 급히 휴지를 내밀었고, 한 마디 콱 박은 옆자리 동기는 영문도 모른 채 내 등을 문질렀다. 여주야 괜찮아? 어? 묻는 말에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보였다. 목구멍이 따가워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지만 애써 미소 지었다.
“괜찮아, 괜찮아. 먹어 얘들아.”
훠궈를 손으로 가리키며 휴지로 입가를 닦았다. 내 말에 걱정하던 눈빛을 거두고 다시 손을 움직인다. 그 속에서 나는 조용히 큼, 하고 목을 풀었다. 혼자 찔려서 물을 잘못 삼켰다는 건 아무도 눈치 못 챈 것 같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에 묻어갔다. 영 끌리진 않았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다시 젓가락을 쥔 후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야채를 대충 집어 먹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냄비 안에 있었던 건지 국물 맛이 제대로 베어져있다. 그러던 중 잘 익은 고기를 건져내던 성경이가 나를 불렀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말에 눈을 크게 떠보였다.
“너 남자 소개 받을래?”
“엉?”
(oωo)..? 나는 우물우물 씹던 걸 꾹 삼키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상당히 갑작스러운 제안이였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닌 건지 다른 동기들도 갑자기 웬 소개냐며 한마디씩 던진다. 그에 성경이는 제 눈썹을 만지작 거렸다. 아..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모르겠네.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다시 나를 바라본다.
“아니 나랑 고등학교 같이 다녔던 남자앤데, 너 예쁘대.”
“오~ 김여주~”
“페북 프사를 봤다는데.. 내가 좋아요를 눌러서 그런 거겠지? 소개 시켜달라더라.”
“아..”
“받을래? 괜찮은 앤데.”
눈을 데굴 굴렸다. 어어.. 말끝을 흐리며 주위를 둘러봤는데 모두가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딱히 받고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제로 만난 것도 아니고 프로필 사진을 보고 추파를 던졌다고 하니 더더욱 사절이었다. 여기저기서 받아보라는 말이 들렸지만 선뜻 알겠다는 답을 하지 못했다. 성경이 친구라고 하니 단칼에 거절하기도 뭐했기 때문이다. 내가 계속 망설이자 장내가 더욱 떠들썩해졌다. 동기 중 한 명의 잘생겼냐는 물음에 성경이가 완전, 이라며 엄지까지 추켜세운다.
“근데 나는 원래 그런 거 별로..”
잘생기고 아니고를 떠나서 나는 원래 소개에는 관심이 없어..(먼산) 눈치를 보며 거절을 하기 위해 조심히 말을 꺼내는데 문득 정재현이 떠올랐다.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다시 머리를 굴렸다. 어쩌면 이게 정재현에게 가진 감정을 접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개 받은 남자가 진짜 괜찮은 사람이면, 내가 정재현 말고 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는 거잖아.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후 손을 좌우로 힘차게 저었다. 방금 전 내가 섣부르게 중얼거린 건 싹 잊으라는 뜻이었다.
“아냐, 받을게!”
나 그 친구 소개 시켜줘..! 급하게 내뱉은 말에 성경이가 알겠다며 환하게 웃어보인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입술이 바싹 마르는 느낌에 혀로 살짝 입술을 축이기도 했다. 좋은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말 필사적으로, 친구로 남기 위해.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냐? 다 한쪽이 좋아하는데 아닌 척 하면서 친구 하는 거지.”
모든 수업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멍하니 그 말을 곱씹었다. 학교 다닐 때, 아니 그냥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런 말에 아주 자신있게 반박하곤 했었는데 오늘은 바보같이 사례나 들렸네. 설상가상 많이 먹지도 않은 점심이 정말 얹혀버려 컨디션이 바닥이었다. 무거운 속을 손으로 만지작 거리며 애써 달랬다.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죽을 맛이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보며 한숨을 푹 푹 내쉬는데 무릎에 올려둔 핸드폰이 별안간 진동했다. 누군가 확인하니 정재현이었다.
아. 작게 탄식했다. 진짜 나이스 타이밍이다 정재현. 나는 눈을 꾹 감으며 또 힘 없이 숨을 내뱉었다. 분명 내가 지금 버스 안인 걸 알고 전화했을 거다. 정재현은 목요일이면 이 시간에 강의가 끝나니까.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진동이 도무지 끊기지를 않았다. 결국 통화버튼으로 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버스 안이라 최대한 조용히 목소리를 내자 수화기 너머로 김여주, 하고 내 이름이 들려온다. 긴장이 됐다.
-집에 가고 있어?
“응. 너는?”
-나도 이제 끝나서 가려고. 점심은 잘 먹었냐?
“어 뭐.. 맛있더라.”
아까 내가 그렇게 등을 돌려서 많이 당황했을텐데 목소리나 말투가 평소랑 똑같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나보다. 나는 괜히 가방을 만지작 거리며 너는? 하고 물었다.
“아까 걔네랑 같이 먹었어?”
-아니. 나도 그냥 동기들이랑 먹었어.
무심하게 들려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안심 했다. 내심 진짜 밥을 사줬으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나 진짜 실없다. 애꿎은 가방만 퍽퍽 내리쳤다. 이런 내 상황을 모르는 정재현은 저녁은 뭐 먹을래? 라며 벌써부터 저녁 얘기를 꺼낸다. 그에 나는 손을 멈췄다. 부모님들끼리 여행을 가신 후 정재현과 밥, 특히 저녁을 먹는 건 거의 일상이었지만 오늘은 영 날이 아니었다. 체를 해도 아주 제대로 해서 집에 가자마자 자야 할 판이니 말이다.
“아, 나 체 해서 저녁 못 먹을 것 같아. 혼자 먹어.”
-체? 왜?
“몰라. 점심을 잘못 먹었나봐.”
놀란 듯 묻는 정재현에게 대충 대답을 해주는 사이 버스가 집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다. 다 왔으니 끊는다고 말을 한 후 전화를 끊었다. 속이 얹힐 걸 의식하자 윗배가 아픈 게 점점 심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조금밖에 안 먹었는데 얹히고 난리야. 이게 다 내가 정재현을 좋아해서지. 자업자득이다 그래. 입술을 꽉 깨물며 집을 향해 걸었다.
달칵 소리를 내며 현관문을 열었을 때, 우리 집 냄새가 이렇게 좋았나 싶었다. 나는 터덜터덜 안으로 발을 내딛으며 쇼파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가방은 진작에 벗어 던져둔 후였다. 아아 앓는 소리를 내며 배를 문지르다 속이 하도 답답해 주먹으로 작게 내리쳤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실까 싶었지만 일어나기 귀찮아 바로 생각을 접었다. 그냥 조금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나는 그런 마음으로 씻지도 않고 눈부터 감았다. 안 올 것 같은 잠은 생각과는 다르게 삽시간에 쏟아졌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이러고 있을 줄 알았다.”
문득 들리는 말소리에 느릿하게 눈을 떴다. 잠이 덜 깨 몽롱한 상태로 미간을 좁히자 흐릿하던 초점이 뚜렷해지며 정재현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정재현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정신없이 묻자, 내 말에 대답 대신 등을 돌린 녀석은 익숙하게 거실 구석에 있는 서랍장을 뒤지더니 곧 무언가를 들고 다시 내 쪽으로 걸어왔다.
“일어나봐.”
이게 지금 무슨..?(황당) 방금 자다 깨 사고가 무뎌져 상황 파악이 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일어나라니 느릿느릿 일어나긴 했다. 나는 헝클어진 뒷머리를 긁적이며 정재현을 바라봤다. 녀석의 손에는 손가락을 딸 때 사용하는 사혈기가 들려있었다. ..저게 뭐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황급히 양 손을 등 뒤로 감추며 정재현을 쏘아봤다. 싫어. 나 그거 진짜 싫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재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내게 손을 뻗는다.
“체했다며.”
“아니 그래도 갑자기 와서..”
그 손은 그대로 다가와 내 귀에 닿았다. 귓볼을 아프지 않게 만지작 거리는 손길에 나는 말문이 막혀 침만 꿀꺽 삼켰다. 귀 엄청 차갑네. 심하게 체했나보다. 뭘 어떻게 먹은 거야 도대체.. 내 앞에 쭈그리듯 앉아서 조용히 중얼 거리는 소리가 신경을 더 자극시켰다. 온 몸이 찌릿했다. 차갑다는 귀에도 열이 바짝 오르는 느낌이었다. 정재현은 내가 그렇게 정신이 없을 동안 등 뒤로 숨긴 내 손을 슬쩍 가져왔다. 뒤늦게 알아차린 내가 손을 비틀어봤지만 소용 없었다.
“안 아프게 따줄게.”
“아 진짜.”
한 손으론 내 손을 잡고, 또 한 손으론 내 팔을 안마하듯 주물렀다. 손을 따기 전에 혈액순환을 시켜줘야 한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한 번씩 사혈기를 딸깍이며 바늘 촉을 확인하는데, 결국 고개를 돌려버렸다. 괜히 체 했다고 말해줬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속이 얹혀서 저녁을 못 먹는다는 말에 목적지를 바로 우리집으로 바꿨을 놈이다. 정재현이 어떤 애인지 뻔히 알면서 너무 생각 없이 내뱉었어 김여주. 울상을 지었다.
힘 빼. 손가락까지 꾹꾹 누르던 정재현이 말했다. 힘을 빼는 건 말처럼 쉬운게 아니였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눈을 질끔 감았다. 곧 딸깍, 소리와 함께 엄지 손가락이 따끔하게 아파왔다. 안 아프게 따준다면서(ノ0Д0)ノ 이를 바득 갈며 정재현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녀석은 히, 하고 웃으며 검지 손가락에 사혈기를 가져가댄다. 또 따끔. 따끔. 따끔, 따끔. 왼손 다섯 손가락 모두 넉다운이었다.
“와 야, 피 까만 거 봐.”
“아 아프다고!!”
“엄살은.”
거의 자다 일어나서 봉변 당한 수준인데 이거. 얼얼한 손 끝에 송골송골 맺히는 피를 멍하니 바라봤다. 정재현 말대로 피가 검붉었다. 으, 징그러. 정재현은 그런 내 머리를 약하게 튕기더니 휴지로 피를 닦아준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제 손으로 감싸쥐며 검은 피를 빼냈다. 그제서야 힘이 쭉 빠졌다. 긴장이 풀리자 정재현이 내 손을 잡고 꼼지락 거리는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시금 열이 올랐다. 코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멈추지 않는 피를 휴지로 닦아내느라 정신이 없는 정재현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생각해보면 너는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넘어지면 일으켜 준 후 무릎까지 털어줬고, 울면 안아줬고, 사소한 일이여도 제일 먼저 달려왔다. 나한테는 그런 너가 너무 당연해서 몰랐는데, 너를 좋아하고 보니 왜 이제야 너에게 감정을 가졌을까 의문까지 든다. 내리깐 눈도, 큰 손도, 작게 들리는 숨소리도 이렇게 설레는데.
“정재현.”
입술 끝을 맴돌던 이름을 조용히 내뱉었다. 그러자 한참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다. 시선이 맞물렸다. 왜? 녀석은 여전히 내 손을 쥔 채로 물었다. 나는 왠지 말문이 막혀 잠시간 그 눈만 바라보다 침을 꾹 삼켰다.
“..우리.”
“..”
“친구지..?”
시계의 초침 소리가 더 크게 집 안을 채웠다. 정재현이 살짝 벌리고 있던 입술 새를 닫는게 보였다. 계속 움직이던 손도 일순 멈춘 채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다. 당연한 걸 말한다고 핀잔을 줄 거라 생각했는데 한참 말이 없다. 괜히 이상한 말을 꺼낸 것 같다는 생각에 속이 바싹 타들어갔다. 정재현은 그런 내게서 제 손을 떼어냈다. 그러더니 이내 낮게 입을 열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봐?”
당혹감이 묻어있는 목소리에 나는 마음을 들킬새라 시선을 슬쩍 돌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아까 애들이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냐고 막 그래서.. 그냥.. 내 말에 정재현은 어이가 없는 건지 허, 하고 한 번 허무하게 웃더니 휴지 한 장을 새로 뽑아 내 손에 쥐어줬다. 아직도 안 멈춘 건지 하얀 휴지에 피가 작게 스며든다.
“서로 정말 마음이 없거나, 한 쪽이 평생 마음 숨기거나.”
“..”
“좋아하는 마음 들키는 순간 친구 못해.”
“..”
“그러니까 우리는.. 친구지.”
천천히, 시선을 다시 옮겼다. 정재현은 그렇게 말을 하며 슬핏 웃었다. 휴지를 더욱 꾹 쥐었다. 내가 고개를 주억 거릴 새도 없이 녀석은 내 머리를 짧게 헤집은 후 몸을 일으켰다. 간다. 한순간 등을 돌려 멀어지는 모습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방금 전까지 코앞에 있었는데 오늘따라 너가 멀다. 멀어서 불러도 안 멈출 것 같아. 나는 붕 떠있는 기분으로 입술을 꾹 깨물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그제서야 쇼파에 기대듯 누웠다.
그래, 우리 친구지. 내가 마음을 숨기고 있으니까 우리 아직 친구지. 더 커져서 터지기 전에 정리할 수 있을 거야. 나 성경이 친구라는 그 남자도 소개 받을 거고 엄마 아빠도 곧 오셔서 너랑 마주 앉아서 밥 먹는 일도 줄어들 거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오늘처럼 내가 아프면 너가 제일 먼저 달려와야 해.
아아, 토요일이 존―나게 밝았습니다 여러분. 타들어가는 내 속도 모르고 높게 뜬 해는 간만에 쨍쨍했다. 내가 속이 타는 이유는 세 가지. 첫째. 개강파티에 끌려가듯 참석하고, 거기다 하필이면 술고래들 틈에 끼어 잔이 마를 새가 없었던 어제의 내가 결국 취한 채 놀렸던 손가락. 정말 외가로 들어간 건지 과외 시간과 장소를 바꿔야할 것 같다고 메세지를 보낸 민형이에게 [ 알ㅇㅏㅅ어ㅎㅎ ㅐㄴ일ㅇ봐 ㅇ믾엳아/./11! ] 라고 답장했다. …. 그렇다. 둘째. 그렇게 답장해놓고 지각이다. 과외가 1시부턴데 지금 1시 5분이야. 민형이를 어떻게 봐야할지 막막하다. 셋째. 하이힐이고 뭐고 열심히 달리고 있는 중이라 공들여서 한 화장과 머리가 엉망이 되고 있다. 과외 후에 성경이 친구라는 그 남자 만나기로 했는데…(말잇못)
“아 죽겠네 진짜.”
조금만 더 가면 도착이였다. 민형이가 정한 새로운 과외 장소는 예전에 몇 번 가본적 있는 카페였다. 작고 조용했던 걸로 기억한다. 지하철 역에서 나온 후 계속 직진만 하다 처음 왼쪽으로 돌았다. 드디어 카페가 보였다. 감격스런 마음에 허허 소리를 내는데 문득 그 앞에 서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민형아..!”
입에 물고있는 흰 막대가 또 담배인가 싶어 급히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줄곧 앞만 보고있던 고개가 내쪽으로 휙 돌려진다. 나를 보자마자 검지와 중지를 무의식적으로 가져가던 녀석이 순간 흠칫하며 엄지와 검지로 손가락을 바꾸는게 보였다. 이눔 시끼.. 담배 줄이기로 약속했으면서..!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에 꽂으며 큰 보폭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민형이는 그런 내게 시선을 두며 물고있던 걸 빼냈다.
“왜이렇게 늦으셨어요?”
“..”
“무슨 일 있는 줄 알았네.”
동시에 나는 입을 쩝 다셔야만 했다. 담배가 아니라, 딸기맛으로 유추되는… 사탕이었다. 야무지게 동그란 거 달려있는 막대 사탕. 오히려 왜 늦었냐는 물음에 고개를 숙여야했다. 어제 전송한 메세지까지 떠올라 더더욱 푸욱. 두 손을 꼭 모으며 미안하다고 하자 잠시간 말 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됐어요, 한 마디 하고는 먼저 카페로 들어가버린다. 그에 절로 헉 소리가 나왔다. 그래그래 백 번 내가 잘못했지. 1분이 아까운 수험생 시간을 10분이나 잡아 먹은 내가 잘못했지(TДT) 나는 발을 동동 구르다 얼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구석 자리에 미리 자리를 잡아놓고 있었던 건지 익숙하게 자리에 앉은 민형이는 사탕은 문 채 문제집을 펼쳤다.
“진짜 미안해 민형아. 나 늦게 온 만큼 수업 더 하자.”
“당연히 그래야죠.”
“그래그래. 뭐 마실래? 사줄게.”
“됐어요. 선생님 음료까지 먼저 주문 했어요.”
라떼로 시켰는데. 괜찮아요? 급하게 가방을 뒤적거리던 내가 일순 행동을 멈췄다. 아니 음료는 왜 또 미리 주문해놨어…! 진짜 피를 말려서 죽일 작정인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얼마야? 돈 줄게! 하기도 뭐해 입술을 벙긋 거리다 겨우 그럼 케이크라도… 하고 말을 꺼내는데, 별안간 핸드폰이 울렸다. 성경이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민형아 잠시만.”
나는 한 손에 지갑을 든 채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며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하면서 조각 케이크를 주문할 생각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어 성경아, 왜?”
-여주야아… 진짜 지인짜 미안! 진짜 미안해!!
엥. 근데 얘가 방금 내가 읊었던 대사를 하는 거다. 나는 주문을 도와드리겠다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손가락으로 제일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를 가리켜보이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왜? 무슨 일인데? 받자마자 사과부터 받아버리니 물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말에 성경이는 계속 흐엉, 따위의 앓는 소리를 내더니 곧 비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 이따가 나 같이 못 갈 것 같아..
(о゚д゚о)..?
-동아리 갑자기 모이라고 연락 왔어. 상철 선배가 안 오면 죽는대… 진짜 미안하다 여주야.
롸..? 성경이가 말하는 ‘이따가’ 는 분명 몇 시간 후 소개받을 남자와 셋이 만나기로 했던 그때를 가리키는 걸 거다. 그 흔한 과팅 한 번 해본 적 없던 나라 같이 만나주겠다는 말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막판에 뒤집기 있어요?(눈물) 나는 앞에서 4천원이요, 하며 손을 내미는 알바생에게 밍기적 지폐를 건넨 후 울며 겨자먹기로 대답했다.
“아냐.. 상철 선배가 부르면.. 가야지...”
그 놈 지랄 맞은 건 나도 잘 아니까..(울컥) 성경이는 친구의 번호를 보낼테니 미리 연락을 해보라며 날 달랬다. 착하고 재밌는 친구라 금방 편해질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덧붙히더라. 남자의 이름은 남주혁. 초등학교 때 같은 이름을 가진 애가 있었어서 잘 기억하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훠궈 먹을 때 연락처 받고 짧은 메세지라도 주고받아볼걸. 이따가 얼마나 어색할지 감도 안 온다. 나는 영수증을 지갑에 넣으며 터덜터덜 민형이가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아 진짜 미안하다 여주야. 나 늦게라도 갈까?
“야, 괜찮아. 걱정하지 마. 잘 할게.”
-중간 중간 연락해.. 알았지? 괜찮으면 햄버거, 별로면 콜라. 오키?
“아 뭐야 이성경. 완전 올드하네~! 재밌고 착한데 잘생겼다며. 벌써 햄버거다 야.”
진짜 잘 되면 내가 맛있는 거 살게. 어. 어어, 끊어. 대략 3분 간의 통화를 끊고 자리에 앉았다. 그 짧은 시간에 받은 데미지 양이 커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와 동시에 언제 온 건지 단정하게 유니폼을 입고있는 알바생이 주문한 음료와 케이크를 들고와 테이블에 놓아줬다. 나는 고개를 한 번 꾸벅인 후 민형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민형이는 라떼로 보이는 음료를 내 앞에 놓아주고 노란색 음료를 제 쪽으로 가져갔다. 너껀 뭐야? 묻자, 레몬에이드란다. 사탕도 딸기맛 물고 있더니.. …귀여워(ˊᗜˋ*).
“민형아, 이거 케잌 먹어. 아 그리구 저번에 너가 물어봤던 문제..,”
“선생님.”
“어?”
“남자 소개 뭐 그런 거 받으세요?”
오늘은 정말 평소보다 더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당차게 문제집을 피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안 듣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다 들었나보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괜히 민망했다. 얼른 말을 돌려야겠다는 생각에 황급히 오늘 진도에 포함된 페이지를 찾는데, 민형이가 왜요? 라고 물어왔다. 미간 새를 슬쩍 좁히는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기에 눌려 고개를 숙이며 침을 꾹 삼켰다.
“어? 아니 그냥 뭐.. 주위에 남자가 없으니까.. 하하.”
마음 같아선 문제집에 머리를 쳐박고도 남았다. 민형이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세상에 정말.. 얼굴이 이렇게 화끈할 수가 없었다.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상대가 이민형이라 그런 것 같다. 그냥 그 남자가 나 마음에 든다고 해서~! 라고 할 걸 그랬나. 빨리 문제가 나와야 이 민망한 얘기를 끝내고 수업을 시작할텐데 손이 영 말을 안 듣는다. 아놔 214페이지 왜 이렇게 안 펴져...(ノ`Д´)ノ 녀석은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몬에이드를 한 모금 쭉 빨아마시더니 조용히 한 마디 중얼거렸다. 그런 거 안 해도 있을텐데. 굳이 대상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다. 아냐 민형아.. 너가 몰라서 그래. ..없어….(울컥) 있었다면 나도 오늘 화장을 하면서 곧 있을 만남에 아자아자 파이팅 따위를 외치지 않았겠지. 그래도 이과 길을 걸었다고, 주위에 남자는 나름 많았지만.. 그래도 없다. 정재현보다 좋은 남자가 없어.
“그 형은 알아요?”
“누구? ..정재현?”
“네.”
생각을 하면 안되는 걸까. 바로 입 밖으로 터져나온 이름에 나는 페이지를 넘기던 속도를 늦췄다. 한 장 더 넘기자 214페이지가 나왔다. 그러고보니 페이지 수 마저 정재현 생일이네. 문득 얼굴이 떠올라 테이블 밑으로 떨어뜨린 손을 꼼지락 거렸다. 민형이는 말 없이 그런 내게 시선을 뒀다. 나는 또 한 번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며 시선을 돌렸다.
“걔는 몰라. 내가 말을 안 해서.”
“..”
“민형아. 이 문제부터 풀어볼래? 저번에 너가 틀린 거랑 비슷한 문젠데.”
아무렇지 않은 척 수업을 진행했다. 민형이는 내 말에 제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더니 곧 네, 답 하며 샤프를 들었다. 막힘 없이 슥슥 문제를 풀어나가는 민형이를 눈에 담았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그 위에 정재현이 차오른다. 걔는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도 몰라.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정재현은 목요일. 그러니까 그렇게 친구라고 선을 그었던 그날 후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날 밤에 녀석에게서 자? 라고 메세지가 왔었는데, 내가 아니, 라고 보낸 답장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답 또한 없었다. 전화가 오지도 않았고, 학교에서도 보질 못했다. 어느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대로 지내는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탁. 민형이가 샤프를 내려놓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써 다 풀었는지 문제집을 내 쪽으로 내민다. 아, 진짜 수업해야지. 정신 차리자.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뜬 후 펜을 들어 민형이의 문제풀이를 확인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정답이었다.
장시간의 수업이 끝났다. 늦은 시간만큼 수업을 더 하는 바람에 소개팅 장소까지 또 뛰어야 할 판이었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우리 민형이가 훠얼씬 더 중요하니까٩(ˊᗜˋ*)و! 근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평소보다 계산 실수가 잦았다. 저도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수업 내내 예민한 얼굴을 해서 민형아 이것도 틀렸어.. 라고 말해주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첫 문제는 잘 풀어놓고 왜. 이제 수능이 정말 얼마 남지 않기도 했고 며칠 전 가출까지 했던 아이라 더 걱정이었다. 나는 힘내라는 의미로 민형이의 어깨를 두어번 두들겨준 후 가방을 챙기다 고개를 들었다.
“민형아. 나 오늘 괜찮아? 어때?”
눈을 크게 떠보였다. 나 오늘 남자 만난다고 속눈썹도 붙혔는데. 괜찮다고 말해주기만 해도 조금 더 편하게 약속 장소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들여서 꾸민 값은 해야지! 내가 왜 늦었는데…!(흠칫) 민형이는 제 가방을 챙겨 일어나더니 무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심 저 입에서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될 것 같아요? 같은 말이 나올까 조마조마 했다.
“..그냥 평소랑 똑같아요.”
“헐. 그럼 안되는데.”
하지만 민형이는 매우 미적지근한 답을 내놓았다. 아니 평소랑 똑같으면 내가 속눈썹을 붙힌 의미가 없잖아. 눈썹도 더 집중해서 그렸는데...T^T 나는 울상을 지으며 가방 지퍼를 잠갔다. 지하철 물품 보관함에 이 백팩을 넣어놓고 화장실에서 더 열심히 화장을 수정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약속 시간까지 40분 남았는데…. 내가 손목 시계를 확인하며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 민형이가 나를 보며 다시 입을 뗀다.
“선생님 평소에 예쁜데요.”
“..”
“오늘도 예뻐요.”
[성경아 나 지금 도착]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했다. 나는 성경이에게 짧은 문자를 남긴 후 아까 받아놨던 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카페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머리를 다듬으며 심호흡을 했다. 잘하자 김여주. 민형이도 예쁘다고 해줬잖아. 신호는 얼마 가지 않아 끊겼다. 곧 여보세요? 하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남..주혁씨 맞으세요?”
-아, 네 맞아요 여주씨. 도착하셨어요?
“네. 지금 카페 들어왔는데..”
아까와는 다르게 사람이 많은 카페 안으로 들어서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 저 멀리 내 쪽을 향해 손을 들어보이는 남자가 시야에 걸렸다. 저 지금 손들고 있어요. 보이세요? 뒤이어 들리는 말에 나는 그쪽으로 가겠다고 답한 후 전화를 끊고 빠른 걸음으로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긴장되는 마음에 또각 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제일 크게 귓가를 찔렀다.
“안녕하세요. 김여주라고 합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꾸벅 첫인사를 내뱉었다. 끌어올린 입꼬리는 분명 어색할 거다. 성경이의 말대로 가까이에서 마주한 남자, 그러니까 남주혁이라는 사람은 정말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와씨.. 햄버거 햄버거 햄버거. 키도 정말 커서 힐을 신었는데도 올려다봐야 했다.
“여주씨 반가워요. 남주혁이에요.”
씩 웃으며 내게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손을 한 번, 주혁씨의 얼굴을 한 번 본 후 얼른 손을 잡았다. 성경이한테 얘기 들었어요. 악수를 하며 그런 말을 하자, 반댓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더니 그.. 여주씨..! 라며 말 끝을 흐린다. 그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눈을 끔뻑였다. 뭔가 싶어 가만히 보고만 있는데, 잠시 제 턱을 만지작 거리던 상대가 더욱 환하게 웃어보인다.
“저 기억 안 나세요?”
예..? 이 구닥다리 작업 멘트는 뭔가 싶었다. 근데 이 사람이 나한테 이런 멘트를 날릴 이유는 없잖아. 나는 당황하며 눈을 굴렸다. 뭐지. 내가 이 사람을 기억 해야 돼? 내가 기억할만한 남주혁은 초등학교 때 얼짱 투표 1위했던 남주혁밖에 없….
“..”
“..히.”
나는 끝내 입을 떡 벌렸다. 그러고보니 그때 그 남주혁 얼굴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뭐야, 진짜 그 남주혁이라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어어.. 하고 말을 얼버무리자 히히 웃던 모습이 쐐기를 박아버린다. 오랜만이다 김여주. 나 전학 간 후로 처음 보는 건데, 잘 지냈어? 라고. 그에 결국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히익 소리를 냈다. 진짜 그 남주혁이잖아..! (;◔д◔)
“야.. 너 뭐야?”
“미안. 놀랐어?”
“아니.. 아니 너.. 와 야 너.. 잘 지냈..? 아니 그러니까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그럼 놀라지 너 같으면 안 놀라겠냐?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꾸역꾸역 넘기며 남주혁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이 햄버거 햄버거 햄버거가 내 초등학교 동창 남주혁이라 이거잖아. 근데 우리는 지금 소개팅을 하려고 만난 거잖아. …진짜 뭐야 이거(당황) 횡설수설하며 상황 파악을 시도하는 내 어깨를 남주혁이 잡았다. 일단 앉자. 앉아서 얘기하자. 그에 나는 홀린듯 자리에 앉아 뚫어지게 녀석을 바라봤다. 그때 걔가 이렇게 컸다니. 잘생긴 건 정말 여전했다.
“뭐 마실래?”
“어? 아냐. 내가 살게.”
“됐어~ 너한테 이런 식으로 연락한 것도 미안한데 커피는 당연히 내가 사야지.”
여기 녹차 프라푸치노 맛있는데, 그걸로 사올게. 남주혁은 그렇게 말을 하더니 바로 카운터로 걸어갔다. 보폭이 커서 금방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를 바득 갈았다. 야씨, 내가 이거 때문에 하이힐 신고 치마도 입고 머리도 말고 화장도 더 열심히 했는데(ノ`Д´)ノ!!! 그래, 커피 당연히 너가 사야겠다. 야심차게 만난 소개팅 상대가 초등학교 동창이라니. 잘하자 잘하자 아침부터 굳게 다짐했던 것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연애 물 건너갔네. 당장이라도 핸드폰을 꺼내 이성경에게 콜라 폭탄을 투척하고 싶었지만 [어때? 얘기 중이야?] 라고 문자를 보낸 성경이에게 나중에 말해주겠다 답장을 보낸 후 다시 남주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계산을 끝낸 건지 다시 이쪽으로 걸어온다.
“잘 지냈어?”
“어 나야 뭐.. 너는? 아니 근데, 성경이는 알고 있는 거야?”
“이성경은 몰라. 걔가 오늘 왔어야 했는데 갑자기 못 온다고 해서 얘기를 못했어.”
“아니 그럼 너 왜 나 소개.. 시켜 달라고 한 거야? 그때는 나인 거 몰랐어?”
남주혁이 자리에 앉자마자 궁금한 것들을 다다다 날렸다. 남주혁은 그런 나를 보며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머리를 긁적인다.
“사진 보자마자 내가 아는 김여주구나 했지. 그래서 이성경한테 연락처 좀 알려달라고 했더니 왜 궁금하냐고 물어보길래 홧김에.. 예뻐서 소개받고 싶다고 했어.”
“홧김에? 왜 홧김에?”
“그게 내가..”
“..”
“내가 이성경 좋아하거든.”
.. (о゚д゚о). 오늘 하루 남아나는 멘탈이 없는 것 같다. 이 폭탄 발언은 뭘까. 나는 마신 것도 없는데 쿨럭 거렸다. 남주혁은 민망한 건지 제 큰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으아.. 앓았다. 거의 10년 만에 만난 동창의 특급 비밀을 만난지 30분도 안되서 알아버리는 기분이란..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입술만 벙긋 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야. 일단 반가워 야 진짜.. 오랜만이다. 아니 근데 그렇다고 나를 소개 시켜 달라고 하면 어떡해! 좋아한다며!”
“그래서 오늘 셋이 만나면 짠 공개하려고 했는데 이성경이 안 왔잖아.. 하하.”
“어떡할거야 이제.”
“망했지 뭐. 나중에 말하면 이성경한테 등짝 엄청 맞을 거야.”
“..맞을만 하지.”
내가 성경이였어도.. 넌 죽빵이야..(먼산) 그래도 얘가 정재현이랑 같이 놀던 무리 안에서 그나마 제일 정상이었던 애였던 것 같은데 어떻게 저런 멍청한 짓을 할 수가 있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침에 늦잠을 잔 와중에도 열심히 꾸민 게 억울하긴 했지만 성경이에게 대신 잘 말 해줘야겠다 생각하며 남주혁을 바라봤다. 어찌됐든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 반가운 건 사실이었다. 주문했던 음료를 가져온 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10 중 9 가 성경이 얘기였다. 언제부터 좋아했냐, 어디가 그렇게 좋냐 물어보자 남주혁은 부끄러워 하면서 술술 말해줬다. 생각보다 더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야 알았댄다. 학생 때는 매일 붙어 다녀서 몰랐는데 다른 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 자꾸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제서야 자기가 성경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항상 밝은 모습이 너무 좋다고. 같이 있으면 계속 웃게 돼서 좋아하는 것 같아. 녀석은 그렇게 말 하며 푼수처럼 웃었다.
“고백은 할 거야?”
“해야지.”
“..”
“근데 아직 무서워. 걔랑 친구도 못하는 거.”
지금은 이렇게라도 옆에 있고 싶어. 남주혁에게서 내가 보였다. 그냥 계속 보고싶어서, 마음을 숨기기 급급한 거. 지금 내가 하는 짓이였다. 나는 고개를 떨구며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들키는 순간 친구는 못한다고 단호하게 선을 긋던 정재현이 떠올랐다. 얘랑은 커피가 아니라 소주를 마셔야 될 것 같은데. 2차로 포장마차 가야할 판인데 지금? 씁쓸했다. 우린 어쩌다 친구를 좋아하게 된 걸까. 그것도 제일 친한, 오랜 친구를.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음료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넌?”
“나? 뭐?”
“아직도 재현이랑 같이 다녀?”
입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칫 했다. 또. 생각하니까 또 튀어나오네. 아무것도 모르는 남주혁은 순진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있었다. 내가 여기서 나도 사실 정재현 좋아해, 라고 말 하면 남주혁이랑 얼싸안고 울어도 되는 건가. 그런 얼척 없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나는 프라푸치노를 마저 한 모금 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대학 다녀.”
“헐 대박. 너 완전 명문대잖아. 거길 같이 갔다고? 대단하다 진짜.”
“아이 무슨..”
그때 별안간 핸드폰이 울렸다. 성경인가 싶었는데, 화면에 뜬 건 민형이의 이름 석자였다. 나는 남주혁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응 민형아. 왜? 그렇게 첫마디를 하자 수화기 너머가 잠시 잠잠하더니 곧 민형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저 모르는 문제 있는데.
“아 그래? 그러면 카톡으로 보내줘. 내가 이따가 집 가서..”
-아뇨, 지금이요.
“..지금?”
-지금 알아야돼요.
(・_・)… 이건 또 뭐냐…. 곧은 음성에 이마를 짚었다. 비록 동창회로 바뀌었지만, 얘는 내가 지금 어딜 와있는지 뻔히 알면서..! 뜬금없는 고집에 난감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앞에 앉은 남주혁은 뭐냐는듯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나는 입술을 벙긋거리다 목을 쓸어내리며 조심히 말을 이었다. 조심히, 이어보았다.
“아 근데 민형아.. 너도 알다시피 내가 지금은 좀..”
-짜증나요.
“어?”
-이거 모르면 다른 거 못 풀 것 같아요. 신경 쓰여서.
저 수능 두 달도 안 남은 거 아시죠. 빨리요. 끊을게요.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전화는 눈 깜짝할 새에 끊겼고, 귓가엔 뚜 뚜 신호음만 맴돌았다. 헐. 나는 한 단어로 심정을 요약하며 까맣게 물든 핸드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거의 뭐랄까.. 너가 무슨 소개팅이냐, 얼른 집에 가서 과외비값이나 해라.. 수준이었다. 아니 그거 좀 별표 쳐놓고 다른 거 하고 있으면 되지 못할 건 또 뭐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불만을 내봤자 소용 없었다. 나는 을이기 때문에 지금 집으로 가야했다. 민형님이 원하신다는데, 예, 얼른 설명 해드려야지요.
“왜? 무슨 일 있어?”
“어.. 나 가봐야 될 것 같은데..”
“벌써?”
“내가 과외를 하는데 학생이 급하다고 해서.. 고삼이라 봐줘야 할 것 같아.”
이것만 다 마시고 갈게. 미안하다.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 내게 남주혁은 괜찮다며 손짓했다. 오히려 급한 일이면 어서 가보라며 나를 부추기기까지 했다. 아, 만난지 아직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아쉬운 마음에 프라푸치노를 마시는 속도를 늦췄다. 번호는 서로 알고있으니 됐고. 나중에 만나면 정말 소주 한 잔 해야지. 그땐 나도 다 털어놓아야겠다.
“너 지수 기억나?”
“지수? 어. 당연하지. 너 걔랑 연락 돼?”
“어. 나중에 애들 다 같이 만나자. 재현이도 불러. 걔 어떻게 컸는지 보고싶다.”
아냐. 그때가 되면 제발, 정재현에 대한 마음이 싹 사라져 있기를.
딸랑. 카페 문에 달린 종 소리가 경쾌하게 손님을 알렸지만 온갖 소음에 볼품없이 묻혔다. 문을 연 태일과 한솔마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근처에 있는 연습실에서 하루 종일 밴드 연습을 했던 두 사람이었다. 하필이면 음료 내기 가위바위보에 져서 귀찮은 걸음을 했더랬다.
“야, 뭐 마실래?”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시큰둥 묻는 한솔의 옆에서 태일은 아무거나, 를 시전했다. 그에 한솔은 질색하며 미간을 좁혔다. 맨날 아무거나래. 하지만 태일은 상관하지 않았다. 제 취향이라면 잘 알고있는 한솔이니 알아서 잘 주문할 거라 믿었으니까. 한솔과 마찬가지로 뒷주머니에서 대충 지갑을 꺼내던 태일의 시야에 문득 저 멀리 앉아있는 사람이 담겼다. 주문을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섰는데, 태일은 그 줄 끝에서 잠시간 그 대상을 바라봤다.
“..우리 다른 데 가자.”
“뭐야. 왜.”
“저기 여주 있어.”
이렇게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 태일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한솔의 고개가 빠르게 돌려졌다. 그리고 그 시선은 다시 태일에게로 머물다 곧 가자, 하는 말과 함께 먼저 등을 돌렸다. 태일은 혹시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애써 시선을 떨군 채 한솔을 따라 카페를 나갔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나름 괜찮게 지낸다고 생각 했었는데, 얼굴을 보니 그것도 아닌 듯 했다. 목울대가 시렸다. 여전히 예뻤다.
태일은 여주의 번호를 지웠지만 그 번호를 외워버려 소용히 없었다. 그래서 술을 마시기 전에는 아예 핸드폰을 꺼놨다. 여주가 자주 가던 음식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쪽으로는 잘 다니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하늘을 달리다는 더이상 듣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그 노래를 부를 때 제일 생각이 났기 때문에.
“여주네 아파트 운동기구, 진짜 좋은 거 알아?”
“..뭔 소리야 갑자기.”
“운동하러 매일 가고 싶었어.”
쓰게 웃었다.
암호닉은 다음주 토요일 오후 1시 27분까지 받겠습니다.
암호닉을 신청해주신 분들한테만 완결 후 메일링을 해드립니다.
신청은 ↓공지사항↓ 에서 해주세용. 감사합니다.
REMEMBER 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