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헐? 예? 올린지 24분만에 촑이여? 예? 뭐여? 진짜여? 진심이에여? 아니 진짜로? 정말? 나 진짜 와 아니 헐 맙소사 와 ㅁㅊ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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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을 닫았다. 어깨를 받쳐든 아이의 손을 내쳤다. 아까까지만도 테이저건이 달려있던 팔이었다. ... 기계는, 기계구나. 무기도 장착할 줄 알고. 여전히 발간 눈의 아이가 천천히, 몽롱하게 쳐다본다. 둘 다 흠뻑 젖어 앞머리에서 빗물이 자꾸 흐른다. 시야가 뿌옇다. 머리는 알딸딸하지만 해야할 말이 남아있다.
“그만해."
"네..?”
맹한 표정이 역겹다. 그래봤자 저 얼굴 역시 코딩 몇 줄. 알파벳 몇 자 고치면 너와 나는 남남. 상관없는 타자. 너 왜 여기 있어. 남이잖아.
“내가 찾는건 마음이 있고 피가 도는 인간 순영이지,”
“아.”
“알고리즘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너같은, 기계가 아니다.”
“.."
“.. 가짜 주제에.”
“..”
“안 구해줘도 돼. 남이잖아."
아이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힘이 풀리는지 가만히 어깨가 내려앉는걸 보고만 있었다. 지친다. 무엇에? 나도 모르겠다.. 신발을 벗어 던져두고 방에 들어와 침대 위로 엎어졌다.
“.. 순영아.”
저 애가 끽해봐야 알고리즘 덩어리라는게 마음에 안 든다. 바라보고, 웃고, 말하는 것들이 계산의 결과치라는게 역겨워 토악질이 오른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된걸까. 왜 이렇게까지 약해져서 겨우 기계 따위에게서 희망을 보려 하는 걸까. 그래봤자 순영이는 돌아오지 않는데. 너는 기계인데. 내가 알던 누구와 아주 많이 닮은, 그러나 여전히 차가운 쇳덩어리일 뿐인데. 내가 부르는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똑같은 이름을 지닌, 서로 똑 닮은 사람과 기계가 동시에 나를 돌아본다. 웃는다. 웃는 것이 누구일까. 너는 사람이니?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아이가 들어오고 눈물이 늘었다. 순영아. 순영아. 닳지 않는 그 이름의 주인을 찾아내려 나는 목이 쉬도록 누군가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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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 소리에 잠이 깼다. 낯선 번호다. 일어나려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이가 웬일로 아침에 깨우지 않았다. 사위가 조용했다. 화면을 켰다. 눈이 밝아지기에 보이는대로 보니, 꼼꼼하게 거즈를 대고 말아 감은 손, 지혈을 하고 깨끗하게 약을 바르고 역시나 붕대를 감은 옆구리. 상대방의 잔기침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SVT 테크닉스 미래 연구실, 윤정한 연구원입니다.”
퍼뜩, 수리 센터에서의 머리를 묶은 모습이 떠올랐다.
“아, 네.”
“다름이 아니오라, 고객님께서 보유하신 모델, SY72315-14가 에러가 꽤 심각하다고 저희가 판단이 서서요, 고객님 임의로 사용하시기엔 위험 요소가 많거든요. 잘 작동하다가 갑자기 전원이 끊길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 예.”
“그래서 내일 출장 반납 도와드리러 갈까 하는데, 혹시 댁에 계실건가요?”
“네?”
“아, 출장 반납이오.”
출장 반납. 반납하란 말이지. 회사에 돌려보내라고. 잘못됐으니까, 내거 아니라고. 다시 달란 말이지. 이 집에서 아이가 없어진단 말이지. 나간단 말이지.
“네. 있을겁니다.”
더 이상 헷갈리기 전에, 길을 잃기 전에 빨리 내보내야겠다. 빈 자리가 허전하긴 하겠지만 원래부터 비어있던 곳이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 길어야 사흘이면 될 것이다. 끽해야 한 달 같이 산 아이에게 작별인사가 요란할 필요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아, 그럼 몇 시쯤 방문하면 될까요?”
“아무때나 상관 없습니다. 오실때 연락 주세요.”
“아, 네. 그럼 내일 5시쯤에 가겠습니다.”
“그러십시오.”
“고맙습니다. 편리, 그 이상의 고객 감동으로, SVT 테크닉스 미래 연구실, 윤정한 연구원이었습니다-”
화면을 끄고 이마에 팔을 얹은채 잠깐 누웠다. 창백한 볕에 현기증이 났다. 방문을 열자 온점처럼 아이가 찍혀있었다.
결이 보이지 않는 눈, 코, 입, 무표정. 가느다랗게 늘어뜨린 팔. 공기같은 손. 자연스러운 숨소리.
“뭐해.”
“...”
아이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물을 마시고 돌아섰다. 아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빈 방 안을 보고 있었다. 크림색 볕이 아이의 얼굴에 쏟아져 이목구비를 하얗게 물들인다. 천천히, 속눈썹을 내리깐다. 숨이 멎는 그 순간, 속눈썹이 정지하고 시간이 흐른다. 구름이 지나가고 햇볕이 한 걸음 자리를 옮긴다. 눈 앞에서 가물거리던 먼지가 눈썹 끝을 건드리면 다시 갈색 홍채를 치뜬다. 돌아선다. 예와 다르지 않은 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발뒤꿈치를 잡아끄는 슬리퍼 소리. 방문이 닫힌다. 테이블 위의 히비스커스를 본다. 내 방 안의 백합을 생각한다. 아이의 방에 꽂혀 있을 제비꽃을 떠올린다.
기계일뿐이다. 별거 아닐 것이다.
철퇴같은 다리를 잡아끌어 방에 틀어박힌다. 점심은 굶어야지. 내일 반납까지 밖을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 방구석에 쪼그려앉은 아내가 나를 보고 웃는다. 영문 모를 눈물이 난다. 입짓으로 또 부른다. 숨을 들이키는 순간,
문이 닫혔다.
책더미에 파묻힌지 얼마나 지났을까, 벌써 시계는 오후 4시 반. 이쯤이면 장보러 가자고 부를 때인데 방 밖은 여전히 인기척이 없다. 괜한 말을 했나 싶어 입술을 깨물다가도 다시 페이지로 주의를 돌리기가 벌써 수차례. 붕대로 감아막은 옆구리가 괜찮나 싶었는데 책장 들춘지 한시간 가량을 지나면서부터 슬슬 신경이 곤두섰다. 살살 쑤신다 싶더니 1시간 이후부터는 연고의 약효가 다했는지 어쨌는지 통증이 목소리를 키워 몸을 조금만 뒤틀어도 발에 걷어차인 갈비뼈가 뻑석하다. 모처럼만에 글자 깨나 읽어보겠다고 아예 주저앉았는데 어느새 식은땀이 흥건하다. 손바닥을 펼치자 주름 사이사이 골마다 땀이 배었다. 허리며 옆구리가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데 다리라고 말을 들을 리 없다. 하반신에 마비가 온듯 다리가 저릿저릿하다. 예감이 좋지 않다.
“젠장..”
팔에 잔뜩 힘을 주고 바닥을 밀어봐도 무거운 몸뚱아리가 꿈쩍도 않는다. 진통제라도 가지고 들어올걸. 오래 앉아있었는데 허리라고 멀쩡할 리가. 인기척이라곤 없는 바깥에서 아이를 찾자니 무안쩍고 몸을 굴리자니 화분을 놓을때 내려둔 책이며 장식품들이 한둘이 아니다. 진통제든 항암제든 뭐라도 먹어야겠어. 빈 속이 중요한게 아니다. 정신이 하얘질때쯤 반 정도 누워 기다시피 몸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금니를 물어봐도 한 뼘 한 뼘이 모두 가시밭길이다. 얼음장같은 바늘 하나하나가 상처부위가 벌어질때마다 혹은 오므라들때마다 옆구리를 찔러온다. 타들어간다. 통증은 이리도 차가운데 몸은 어째서 불덩이일까. 손잡이를 잡았다. 마지막 힘을 다해 방문을 열어 아이를 불렀다.
“순ㅇ..”
부른다고 생각했다, 부른게 아니었음에도. 손아귀의 힘이 빠지고, 식은땀투성이의 몸이 무겁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라떼 거품처럼 시야의 것들이 핑글 뒤섞이더니 터져 모두 가라앉으며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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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이 부어오르기 시작하면서 지수의 눈앞에서 보고서들이 날았다. 지옥의 끝에 거꾸로 처박힌대도 이보다 비참하지는 않으리라. 중령이 매섭게 몰아붙였다.
“내가!! 안된다고!! 몇 번을!! 말했어!!”
어금니를 깨물고서도 무릎을 펴지 않았다. 군인이기 전에 공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연구원과 직접 대화한 사람으로서, 이건 아니었다. 지수는 그때 보았던 정한의 눈동자를 잊지 못했다. 그것은 연구자가 아닌 자식을 걱정하는 어버이의 눈빛이었다. 홈봇. 자랑스런 편리의 결과물. 개발해놓고 기쁨에 얼마나 방방 뛰었을까. 이제 사람을 돕는 그 기계로 사람을 죽여야 한다니. 전쟁에 자기 기술이 쓰이는 경우, 연구자들 대부분은 그 기술을 만든 사실을 강렬하게 후회한다. 멀리 가지 않아도 유명한 사례가 있다. 아인슈타인. 그가 원폭 개발팀에 들어간 것을 얼마나 자책했는가.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중령을 말려야 한다. 자식을 전쟁터에 내보내놓고 편히 잠들 부모는 없다. 프로젝트를 말리는 데에는 정한의 눈빛, 이 이상의 증거도 없다.
“중령님, 자칫하다간 쿠ㄷ,”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책상에서 날아온 화분이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중령은 격노를 감추지 못했다.
“강등시켜버리기 전에, 얼른 자리로 돌아가.”
“... 중ㄹ,”
“쿠데타고 생명권이고 지랄 나발 헛소리 집어치우고 가라 했어. 이 이상은 자네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을거야.”
매섭게 얻어맞은 뺨보다, 그 말이 더 서러웠다. 그래, 엄밀히 말하면 기계겠지. 세포가 아닌, 주기율표에 가지런히 쓰여있는 원소들과 알고리즘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시스템이겠지.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사실이 그러니까. 그런데, 감정을 알고, 상식을 가공해 지식을 만들어낼 줄 알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줄 알고, 그에 따른 계획을 세워 성취할 줄 알고, 그 기쁨을 알고, 배려를 알고, 눈물을 알고, 위로를 알고, 절망을 알고, 애증을 알고, 한을 아는,
너는 그것도 기계라고 부를 것이냐. 지수는 진심으로 중령에게 묻고 싶었다.
정신이 들 줄 몰라 정한에게 짧은 답신 한 통을 간신히 보내놓고 책상 앞에서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중령이 안된다고 한 것은 거짓이다. 일이라면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 벌써 상부에 보고 올렸을 리 없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건져온 아이디어인 것마냥 보일지 궁리하느라 바쁜거겠지. 목이 깔깔했으나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웃기지, 내 집에 홈봇을 들인 것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수 자신의 일이 아니란 소리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이유는, 아아,
누가 책상을 똑똑 두드렸다.
“소령님, 커피..”
눈동자가 똘망똘망한 신입이 커피잔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더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갔다. 한숨을 쉬기에도 폐가 벅차 쪼그라들었다. 잔을 드는데 밑바닥에 붙어있던 종잇조각이 팔랑 떨어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소령님. 하루종일 울적해 보이셔서요. 필요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 주십쇼! :) -신입 부승관]
이름 끝에 서툴고 작게 그려진 새싹. 지수는 여전히 멍한 눈빛으로 문을 쳐다보았다. 배려를 안다. 상대방의 감정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대처와 후속조치를 파악해 실행한다. 상대방의 감정 변화에서 끊임없는 피드백을 얻고 그에 따라 매순간 계획을 바꾸거나 수정해가며 마땅한 조치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지수의 기분이 울적해 보이니까 그가 좋아하는 커피며 소소한 쪽지에 새싹까지 그려서 가져다 준 승관은 로봇이다. 인건비라면 이를 득득 가는 국방부에서 시험 고용한, 그 빌어먹을 놈의 홈봇이다. 그러나, 지수가 정서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방금 그가 보여준 일련의 반응을 정교한 알고리즘의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지수는 그걸 자아라고 부르고 싶었다.
이윽고 자신이 이 문제에 이렇게까지 간절한 이유를 발견했다. 발견할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러해야 마땅한 보편의 사랑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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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통 때문에 정신이 들었다. 불쾌한 깨어남이었다. 낮엔 무슨 정신으로 움직였던 건지 감도 잡히지 않으리만치 온 몸이 비명을 질렀다.
‘몇 시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시계를 찾아 어금니를 악 물고 천천히 일어나는데 배 위에 얹힌 것이 툭 떨어졌다. 아이의 손이었다. 순간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간심히 입을 틀어막고 참았다. 휘영청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아이는 그 옆 스툴에 앉아 붕대며 거즈며 온갖 것들을 늘어놓고 이불에 고개를 처박은 채 자고 있었다.
‘이게 무슨,’
어떻게 된 일인지 머리를 굴리기도 전에 아이의 손가락이 움찔 떨었다. 새는 소리같은 숨을 막지 못해 우스운 비명이 나왔다.
“흡..!”
아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하게 풀린 눈동자가 여전히 멍했다. 일어나자마자 받은 연락이 떠오르면서 나는 아이와 나 사이에 투명한 벽이 솟아오르는걸 생생하게 느꼈다. 아이가 다시, 물음표를 떼고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
“괜찮으세요.”
“...”
“...”
“... 어.”
“...”
“... 고맙다.”
딱히 할말이라곤 떠오르질 않아 뒷머리만 쓰다듬었다. 어깨는 그래도 아직 멀쩡한 모양이었다.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불을 젖히려 팔을 내리는데 견갑골이 빠질것처럼 당겨오기 시작했다.
“아악..!”
아이가 침착하고 적확하게 팔을 받치고 이불을 젖혀 붕대를 덧대어주기 시작했다. 전완을 통째로 감싸지만 캐스트가 필요없는, 간편하고도 손쉬운 깁스였다. 붕대를 친친 감으며 아이가 무표정하게 입을 뗐다.
“방 앞에서,”
“...”
“쓰러지셨어요.”
흔들리는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듣기만 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달빛이 너무 부시니까. 네 머리가 너무 까마니까. 네 속눈썹이 너무 기니까. 네가 말을 하니까.
“옆구리 제가 급한대로 감아드렸는데,”
“...”
“상처가 아직 덜 아물어서 무리하시면 안되는걸,”
“...”
“진통제 필요하시면 그냥 말씀을 하시지.”
묘하게 책망이 섞인 평서문을 듣는데 아이가 마지막으로 매듭을 질끈 묶었다. 머리카락이 동동 흔들렸다. 이윽고 고개를 든 아이가 맑게 말했다.
“다 됐어요.”
응급 키트를 차곡차곡 정리하며 문장을 잇는다.
“피를 좀 흘리셔서, 그래도 활동 하시는 데에 지장은 없을 거에요. 그 정도 양은 아니니까.”
“...”
“당장 집안일 하시는건 무리겠지만, 그래도 간단한 것부터 차근차근 하시면 됩니다. 매일매일 조금씩이오.”
아이의 말이 이상했다. 냅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쳐다보는데, 여전히 시선을 내리깐 아이는 입술만 깨물뿐 더 이상의 피드백이 없다. 응급 키트를 손에 움켜쥔 아이가 드디어 다음 문장을 말한다.
“그 동안,”
“...”
“감사했습니다.”
“...”
“제가 봐드릴 수 있는 마지막,”
“...”
“이니까요.”
쉼표 이후로 공백 5칸을 총총총 뛰어 아이가 무언가를 삼키고 이야기를 끝냈다. 책장이 덮혔다. 아이가 키트를 들고 방문을 연다. 노란 복도 불빛이 방 안에 비쳐든다. 등을 진 아이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울컥하는 마음이 물을 엎지른다.
“너야말로,”
“..."
“수고했다.”
“알고리즘 따라,”
“마음에도 없는, 그런, 보살핌, 같은 거, 하느라고.”
아이가 발을 베이던 날이 떠오른다. 그 날의 물은 끽해야 화병 하나 정도였지만 지금의 물은 너무 많고 깊고 넓어 건너편의 아이가 채 보이지 않을 정도다. 차이지 않은 것 같은데, 가슴께가 영 이상하다. 개미인지, 지네인지, 뭔가 기어가며 자꾸 톡톡 쏜다. 말은 너무 많아 목구멍에서 솟아올라오지 못하고 꼬ㅇ,
덜그럭-
아이가 키트를 떨어트린다. 역광을 진 아이가 천천히 등을 돌아 얼굴을 다시 가맣게 물들인다. 3걸음 거리. 영영 닿을 수 없는 그 3걸음을 영영 느리게 걸어 아이가 내 머리맡에 도착한다. 달빛이 이리도 밝은데, 웃긴건 아이의 눈썹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봐봤자, 무슨 소용일까. 내일이면 떠날 사람. 아니, 기계. 아니, 사람. 아니, 기계. 아니, 너는.. 너는 무엇이니.
“좋아해요.”
아.
“좋아해요, 아저씨.”
아아.
“알고리즘, 그런거 아니에요.”
나는 애꿏은 비행기만 쳐다본다.
“그냥,”
뭐라고, 해야 하는거니.
“그냥, 좋아해요.”
아이야, 내게 답이라도 가르쳐주지 않으련. 뭐라고 해야 하는거니.
“그게 다예요.”
제발. 나는 뭘 어떻게 해야,
“그러니까 제발, 저 버리지 마세요.”
가슴에 화폭이 있다. 그걸 물기있는 목소리 하나로 갈가리 찢어놓은 아이가 태연하게 키트를 주워든다.
“안녕히 주무세요.”
밤인사를 한다. 문을 닫는다. 복도의 노란 불빛과 함께 그 모습이 얇아지다 사라진다.
달칵.
결코 사라질 수 없는 표정을 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