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Va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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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0원입니다."
찬열은 패딩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었던 오천원 지폐를 꺼내어 알바생에게 건넸다. 그리고 생각했다. 눈 온 일요일 아침에 라면을 사러 바깥으로 나갔다 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찮은 일이라고. 다른 그 무엇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냥 집에서 뒹굴거리고 싶은데, 가위바위보에 지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나가야 할 때면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쳤다. 머리를 긁적인 찬열은 검은색 비닐봉지에 담긴 라면을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손으로 거스름돈을 받아 아무렇게나 패딩 주머니에 넣었다. 안녕히 가세요─ 하는 알바생의 형식적인 인사를 가볍게 무시하고 문을 열었는데, 얼굴로 곧장 치고 들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찬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오, 변백현 멍뭉이 새끼. 투덜거리며 길을 나선 찬열이 집을 향해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중간 빙판길이 만들어져 있어서 몇 번 넘어질 뻔 한 것 빼고는 나름대로 무사히 집 앞에 도착했다. 카드키를 현관문에 대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고, 엘리베이터를 타서 8층을 누른 찬열이 엘리베이터 벽면의 거울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짜식, 참 잘나게 생겼다."
거울을 보며 턱을 매만지던 찬열은 문이 열리자 느릿하게 걸어가 집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삑, 삑, 삑, 삑. 다섯 번의 단조로운 소리가 울려퍼지고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손잡이를 잡아 돌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간 찬열은 귀신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어떤 물체 ─ 사람인 것 같았다 ─ 를 보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라면, 사 왔어?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헐렁한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을 보고는 찬열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미친, 변백현, 존나 깜짝 놀랐잖아. 찬열의 타박에도 백현은 꿋꿋했다. 라면, 사 왔어? 끈질기게 묻는 백현에게 손에 들고 있는 검은색 봉지를 보여 준 찬열이 신발을 대충 벗어 신발장에 내팽개쳤다. 걸치고 있던 패딩을 벗어 식탁 의자에 벗어 놓고는 찬장에서 조금 큰 냄비를 꺼냈다. 반투명한 강화유리로 만들어져 있는 냄비였다.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에 올려 놓고 라면 봉지를 뜯었다.
"몇 개 끓일까."
"다 끓여."
"나 안 먹을 거야."
"다 끓여."
원래 나 혼자 먹으려고 했어, 다 끓여. 무미건조한 백현의 말에 찬열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백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뭘 꼬라봐, 라면이나 끓여. 하지만 백현은 담담했다. 마치 찬열이 자신의 가정부나 되는 듯 한 태도였다. 허, 하고 헛웃음을 지은 찬열이 낮게 욕을 읊조리며 라면 스프를 모조리 물 속으로 투척시켰다. 주황빛이 강하게 도는 분말이 물 속에서 어지러이 퍼져나갔다. 자고로 라면은 스프를 먼저 넣어야 국물이 잘 우러나오는 법이다. 스프를 넣은 물이 팔팔 끓기 시작하자 찬열이 면을 반으로 부순 후 차례로 냄비 속에 집어넣었다. 수저통에 있던 긴 나무 젓가락을 꺼내 면을 휘젓는 찬열에게 백현이 넌지시 말했다. 면을 들었다 놨다 해, 그래야 면발이 쫄깃하니까. 나지막한 백현의 말에 찬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네, 네, 마님, 말씀대로 합죠.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한 면들을 백현이 말한 대로 들었다 놓는 행동을 반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면이 다 익었고, 냄비 받침을 서랍에서 꺼내 식탁에 올려 놓고는 행주로 냄비의 손잡이 부분을 잡아 식탁으로 옮긴 찬열이 백현을 불렀다.
"변백현, 와서 먹어."
"물하고 그릇하고 젓가락하고 국자하고 숟가락하고 찬밥."
"바라는 것도 존나 많아요."
라면을 다섯 개나 끓였는데도 찬밥을 요구하는 백현의 행동에 찬열이 혀를 내둘렀다. 저 새끼는 어떻게 나보다 더 많이 먹는 거지? 그 많은 게 위장 속으로 들어가기는 하나? 아니, 애초에 뱀파이어라며. 뱀파이어는 피를 먹어야 정상 아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 백현이 요구한 것은 모두 갖다 준 찬열은 백현의 반대편에 앉아 백현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뭘 봐, 소화 안 되니까 퍼질러서 자고 있어. 무감정한 백현의 말에도 찬열은 꿈쩍하지 않았고, 할 수 없다는 듯 백현은 먹는 것에만 열중했다. 찬열을 아예 무시하기로 한 것 같았다. 라면이 서서히 백현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질리지도 않는지 백현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먹기만 했다. 그리고 면을 다 먹자, 국자로 국물을 떠서 찬밥을 말아 숟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이건 뭐 완전히 돼지네, 돼지. 라면 다섯 개에다가 찬밥 두 덩이. 웬만한 남자라도 먹기 힘든 양이었다. 자신보다 자그마한 몸인데 먹는 건 세 배 이상인 백현을 외계인 보듯 쳐다보던 찬열이 질문했다.
"너 몇 살이냐?"
"몰라."
"대충이라도 몰라?"
"칠백 살은 된 것 같은데. 몰라. 오백 살 넘어간 후부터는 안 셌어."
칠백 살? 미친. 그냥 정신병자 아닐까? 찬열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에, 꽤나 멀끔하게 생긴 게 길바닥에서 퍼질러 자고 있길래 앞뒤 생각 안 하고 집에 데려 왔는데, 일어나자마자 하는 말이 배고프다고 해서 라면을 끓여 주었다. 그 뒤로 라면에 맛이 들렸는지 매일 아침마다 라면을 ─ 그것도 세 개 씩이나 ─ 끓여달라고 하는 통에 찬열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방학이라 다행이지, 만약 학교에 다니는 중이었다면……. 상상이 안 갔다. 조그만 주제에 힘은 또 쓸데없이 세서 혼자 집에 놔두고 갔다가는 집 안 집기들을 모두 부숴 놓을 것이 뻔했다. 찬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골칫덩이를 어떻게 한담. 대충 이름은 알았지만 이름 가지고 요 조그만 녀석의 신상정보를 파악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한양에서 김 서방 찾는 것도 아니고. 찾을 수 있다고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 분명했다.
"너 진짜 뱀파이어 맞아?"
"뱀파이어라고 부르기도 하고, 흡혈귀라고도 하고, 드라큘라라고도 해."
마지막 밥풀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싹싹 긁어먹은 백현이 나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생각해 보면 백현이 찬열의 집에서 하는 짓은 먹고 자는 것밖에 없었다. 밤에는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라면을 배터지게 먹고, 또 잔다. 그리고 서너시 정도면 일어나서 또 먹고, 잔다. 그 후 아홉 시를 전후로 해서 일어나고, 또 먹고, 또 잔다. 먹고 자기만 한다. 화장실에 가지도 않는다. 입에서 들어간 것들이 어디로 나가는지 의문이었다. 움직이지도 않아서 칼로리가 소비될 일도 없는데 매일같이 무지막지하게 먹어대는 백현이 찬열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찬열의 빌어먹을 호기심이 발동했다. 만약 백현이 정말 뱀파이어가 맞다면, 피에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찬열은 생각한 것은 무조건 실행에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었다.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찬열이 화장실에서 일회용 면도기를 꺼내 왔다. 그리고 검지 손가락에 대고 슥 하고 그었다. 끔찍한 느낌 ─ 손을 베이는 것의 열 배 이상 되는 느낌 ─ 이었다.
"안 달려드네?"
"내가 무슨 스무 살 먹은 애송이인줄 알아?"
"먹고 싶지?"
백현이 대답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
──────
나머지는 다음주에.
다음에는 불마크 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