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E, 오직 당신만의.
W. JPD
16
"고딩, 근데 수능은 잘 봤어?"
"아, 내일 결과 나오네요."
"꽤 좋은 고등학교 다니던데."
"스토킹은 한 사람만 하던 게 아니었나 봐요."
"아, 나는 어쩔 수 없었지~"
"그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까요."
"어쨌든, 잘 봤어?"
"본래 제 실력보단 못 봤을걸요, 그날 울었으니까."
"찍은 게 맞을 수도 있지, 뭐 이런 희망을 가져보기는 했고?"
"글쎄요, 여태 찍어서 맞은 적은 없어서."
"그럼 어쨌든 지금 시간 많지?"
"... 또 무슨 말을 하려고요."
"알바해, 어차피 졸업 앞둔 고딩들 알바 많이 하잖아."
"졸업 앞둔 고딩들이 다 알바하는 건 아닌데요."
"아, 지금 그게 중요해?"
"... 아, 뭐요, 들어나 볼게요."
"내 일 좀 도와줘, 지금 내가 너 고용하는 거 맞아."
연락하는 것도 모자라서 붙어먹겠다는 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니, 애초에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이 여자의 말대로 나는 알바를 할 생각이었고, 이미 말아먹었다 생각한 수능은 딱히 결과를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대책이 완전히 서기 전까진 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 그것뿐이었다. 부모님한테 죄송한 마음도 컸고, 앞으로의 미래가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니까.
"근데 저 월급 주실 수 있을 만큼 돈 버세요?"
"나를 뭘로 보고... 내가 돈 좀 있지."
"... 아, 예. 그러면 돈은 얼마나 주실 생각이신지."
"학교 끝나는 대로 나랑 만나서 다섯 시간. 평일만, 주말 제외. 교통비는 내가 너 데리고 다닐 거니까 필요 없고, 한 달에 100으로 합의 보자."
"예? 아니, 일을 얼마나 시키길래 돈을 그렇게 많이 줘요? 한 시간에 만 원 꼴인데?"
"내가 이 일로만 돈 버는 게 아니라, 딱히 상관없어. 그리고 너 부려먹을 게 뭐 있다고 난리야."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하긴, 내가 아직 무슨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감사하고 말지. 근데 그러고 보니 나는 참 알바를 스케일 크게 하는구나, 그 남자도 그렇고 이 여자도 그렇고. 아무리 하려고 해도 이런 좋은 알바는 할 수도 없는데, 나는 두 번이나. 수능을 말아먹었다고 좌절하던 날, 이제 난 스스로 밥 빌어먹기는 글렀다며 주저앉았는데 꽤 배부르게 먹고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장되는 건 아무것도 없는 이 세상에서 차라리 이런 삶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여태 할 수도 없었던, 그런 것들을 지금 하고 있다. 역시 모든 건 한 발 물러나봐야 알았다.
어쩌면 실패는 또 다른 성공이라는 것도, 맞는 것 같았다.
-
"아니... 제 꿈이 작가도 아니고..."
"어허, 쓰라며 써. 이게 얼마나 중요한 과정인데."
"혹시 절 제자로 키우실 생각은 아니죠...?"
"너 같은 제자 정말 사양이야, 끔찍한 소리 말고."
"... 저도 언니 같은 스승 딱히... 아."
이 언니, 생각보다 손이 맵다. 저절로 입이 다물어지는 고통에 머리를 감싸곤 노려보면 뭘 노려보냐며 다시 주먹을 쥐어 보이는 모습에 놓고 있던 펜을 들곤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기자가 아닌 언니 같은 존재로 지낸 건 한 일주일 정도. 그사이 수능 성적은 나왔고, 예상했던 것보다 개판이진 않았다. 정말 찍은 게 맞은 것 같았다, 평소엔 찍으면 다 틀리더니 무슨 바람이 들어서 갑자기. 그래도 나쁜 건 아니니 감사했다. 서울권에 있는 대학은 갈 수 있을 법했지만 고민을 했던 건 사실이다. 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재수를 하느냐, 그냥 이 성적에 맞는 대학을 가느냐, 아예 다른 길을 찾느냐. 내가 결정한 건 마지막이었지만 사실 후회가 없는 건 아니었다. 19년이라는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예 다른 길, 그건 두렵기도 했고 기대되기도 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그건 여전히 찾고 있는 중이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부모님도 있었고, 새롭게 생긴 언니도 있었다.
"일기든 뭐든 글 쓰는 거 연습해."
"그니까, 제가 왜요...?"
"그냥, 재능 있어 보여."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아, 난 또 뭔 심각한 이유인 줄 알았잖아요."
초반엔 장르 구분 없이 온갖 글을 가져와 읽게 시켰다. 오타를 찾는 게 목적이라며 핑계를 댔지만 나는 알았다, 그 글들은 이미 오류 없는 검증된 글들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궁금하긴 했지만 고민하진 않았다. 언니도 다 생각이 있겠지, 싶었다. 귀찮기도 했고. 그런데 오늘, 뜬금없이 글을 쓰라니. 게다가 주제도 내 정서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봄, 이제 곧 올 계절이자 황사... 아니, 벚꽃이 피는. 보통 사람들은 봄이라고 하면 딱히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다. 근데 난 딱히 어떤 감정을 느끼지는 못하겠다, 그냥 지금 존나 춥다는 것 정도.
"한겨울에 무슨 봄이에요."
"오늘 다 못 써도 돼, 내일도 쓸 거거든."
"... 신나셨네요? 재밌으신가 봐요, 지금."
"어, 좋아. 네가 나중에 다 깨달았을 때 표정이 생각나서 귀여워."
"... 뭐가 그렇게 비밀이 많아요."
"원래 기자가 정보가 많아, 그게 다 비밀이 되는 거고."
"매일 다 터트리면서."
"그건 극히 일부지, 드러나지 않게 사고 팔리는 게 얼마나 많은데?"
역시 세상은 더럽구나, 돈이면 뭐든 다. 그러고 보니 나를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남자가 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겠지. 이 세상이 참 각박하게 돌아가긴 하는구나,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은 점점 더 초라해지고, 가진 게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화려해지고. 근데 난 그렇게라도 그 남자를 만난 것에 감사해, 물론 그 남자가 한 짓은 정말, 진짜로 잘못됐지만, 난 그냥 그 사람 자체가, 그냥 그 남자가, 그냥 좋았던 거니까. 후회는, 아마 없는 것 같다.
아직도 못 잊었네.
-
"너 노래 들어봤어?"
"무슨 노래요?"
"방탄소년단. 노래 나온 지 일주일 지났잖아, 몰랐어?"
"... 아, 그랬어요?"
사실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단지 노래를 듣지 않았을 뿐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격하게 반응하는데 몰랐다면 그건 거짓말이니까.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노래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냥, 들으면 무너질 것 같아서. 그래도 위로는 얻었다. 그 남자가 잘 지내고는 있는 것 같다는 느낌, 그냥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나도 내 할 일을, 내 길을 스스로 찾아갈 테니, 그래서 당신 앞에 당당히 다시 설 테니. 당신도 더 이상 흔들리지 말고 그 재능 잘 살려서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 있었는데.
다행이다.
"오늘은 이만 헤어지고 집에 가서 그 노래 들어, 꼭 들어."
"... 진짜 그냥 가요?"
"어. 노래 들으라고 보내주는 거야, 듣고 느낀 점 보내, A4 2장."
"... 그러면 그렇지."
"어? 뭐라고?"
"아니에요, 너무 감사해서요."
궁금하긴 했다, 어떤 곡일지, 어떤 가사일지, 이번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그 남자는 가사에 자신을 녹여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그 남자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도통 남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 겉으론 뭔가를 판단할 수가 없었는데 목소리엔 드러났다. 그래서 내가 그 목소리를 들으면 울 것 같았다.
"... 봄날...? 봄?"
아, 이 언니가 그때 말했던 게 이거였나. 다 알고 있었구나, 이런 노래가 나올 거라는 거, 그래서 나한테 그런 소재를 줬던 거고. 세상 참 비밀스럽게도 돌아간다, 나만 모르는 게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불만을 늘어놓으며 노래를 틀지도 못하고 망설였다, 그냥 노래 듣기가 무서워서 계속 쓸데없는 생각만 했다. 내가 이 노래를 듣고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나도 몰랐다.
"... 좋네."
가사가 슬펐다, 공감이 갔기 때문에 더 슬펐을지도 모른다. 가사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축 늘어지거나 힘이 빠지는 노래는 아니었다. 혼자 남았음에도, 외로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담담한 느낌이 있는 노래였다. 후렴이 나오고, 2절이 시작됐다. 나는 내가 우는지 몰랐는데, 울고 있었다.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여전히 너무나 잘 들리고 생생했다. 익숙한 가사였다, 분명 저번에 부탁했었던 가사였다. 내 착각이라고 해도 가사에는 그 남자의 감정이 너무 잘 드러나고 있어서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깨달았다,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을 가만히 듣다가, 나는 일어나서 겉옷을 챙겼다.
나 또한,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어요. 진심이야.
-
3년이 지났다, 나는 새로운 길을 이미 찾은 상태였고 꽤 성공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의 영향이 크기도 했다, 내가 인복이 넘치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밑에서 글을 쓰며 소설가나 될까 싶었는데 작사를 하게 됐다, 처음엔 언니가 연결해준 작곡가와 함께 작업을 했는데 그게 대박 나는 덕분에 잘 풀렸던 것 같다. 작사에 발을 들이기 시작하니 작곡에도 관심이 갔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은 작곡도 같이 하고 있다, 아직은 작사만큼 자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곧 좋은 음악을 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1년 전, 전용 작업실이 생겨서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해 자취를 시작했는데 위험하다며 더 넓은 집에서 같이 살자는 언니의 제안에, 거절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살 때보다는 불편해도 나쁘지 않았다, 세상을 혼자 헤쳐나가는 것 같아서 그런지 더 뿌듯하기도 했다.
"작사가들이 받을 상은 다 쓸어오는구만."
"부러워요?"
"와, 이게 은혜를 모르네?"
"고맙다는 뜻이었어요, 하여간."
"어?! 너 뒤질래?"
연말, 시상식이 많이 있는 이 시기에, 나는 받을 만한 상들은 다 받았다. 일 년의 마지막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거라며 저를 내쫓는 언니 때문에 어제까지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오늘 다시 돌아왔다. 먼저 도착해있던 건지 책장에 늘어놓았던 상패들을 만지작거리며 말하는 언니에 장난을 치면 언니도 평소처럼 맞받아친다. 그렇게 웃고 떠들고 있으면, 초인종이 울린다. 이제 또 다른 시작, 올해도 잘 보내기를 바란다, 지금 함께하는 이 사람들과 말이다.
"누나는 좀 빠져요, 이건 형이 제일 잘한다니까."
"하, 이 새끼들 지금 나를 만만하게 보네?"
"언니, 제발... 요리는 석진이 오빠가 제일 잘한다니까..."
"너도 배신이냐?! 어?"
"... 아니..."
"애가 마르는 건 다 이유가 있다고, 요리를 얼마나 못하면..."
"너네 다 나가, 나가!"
방탄소년단, 이미 정상에 오른지 오래였다. 굳건히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대단했고 존경스러웠다. 어쩌다 보니 같은 길을 걷게 됐지만, 아직 작업을 같이 한 적은 없었다. 사실 평소에는 다정해도 작업 땐 예민해지는 사람이라는 걸 같이 지내며 깨달은 상태라 굳이 싸우고 싶지 않아서 피하는 거지만, 올해는 어떨지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 사이에 작업 한 번은 같이 해야 하지 않겠어.
"야, 근데 왜 나는 오빠라고 안 불러."
"옛날에 불렀었잖아요."
"언제 적 얘기를."
"언제 적 얘기하니까 생각난다, 3년 전에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아, 그 얘기 꺼내지 마요, 진짜."
"왜 왜, 내가 몰랐던 얘기가 있어?"
"누나, 진짜 들으면 평생 놀릴 수 있어요."
"뭔데 뭔데, 말해."
"3년 전에 갑자기 찾아와서는 울고불고 형을 찾으면서, 막."
"제가 언제 울고불고 그랬어요."
"그래, 그냥 울면서 이 형 보자마자 막 안는데."
"... 헐."
"너무 서럽게 울어서 난 뭔 일 있나 했지."
"찾아온 이유가 노래 듣고 슬퍼서라는 게 더 웃겼지."
"그니까."
"그래서 그날 감상문 안 보냈구만? 그거 다 내가 들으라고 해서 들은 거였어, 이것들아."
"그러고 보니 누나가 참 큰 역할들을 많이 하긴 했네요."
"그렇지."
"... 다들 닥치세요, 그냥."
"왜, 귀여운데."
"너도 닥치세요."
"... 뭐?"
"네? 닭을 치라고요."
"... 아."
"헐, 너 나랑 잘 맞겠다! 나도 개그 좀 하는데."
"형이 하는 건 하나도 안 웃겨요."
"... 아, 진짜 정신없어."
모이기만 하면 정상인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그저 착각이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3년 전, 나는 겉옷을 챙겨 무작정 지하철에 올라탔다. 그때까지도 삭제하지 못했던 번호로 전화를 걸면 익숙했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푹 숙이곤 어디냐고 물었다. 새로 생긴 연습실이라 못 찾아올 거라는 그의 말에도 찾아갈 수 있다며 우기곤 문자를 확인했다. 그 길로 대책 없이 찾아가 울면서 품에 안기곤, 그렇게 만남을 이어갔던 것 같다. 사귄다, 연애한다, 이런 개념은 아닌데 그런 비슷한. 몇년째 이러고 있는 우리 둘을 주변 사람들은 모두 답답하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우리는 이게 편했다. 나름, 매력 있는 관계였다.
민윤기라는 남자가 매력이 넘치는데, 뭐가 더 필요하겠어.
암호닉
땅위 / 윤기윤기 / 굥기 / 봄 / 굥기윤기 / 왼쪽 / 민슈가천재짱짱맨뿡뿡 / 슉아 / 쿠크바사삭 / 김까닥 / 레드 / 찡긋 / 호비호비뀨 / 윤맞봄 / 둘셋 / 1472 / 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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