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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의 초여름
쏴아아-
차박 차박, 요란한 발걸음이 젖은 흙길을 스치고 지났다.
황급히 서고 안으로 뛰어들어간 작은 인영이 이내 빼꼼 창으로 고개를 디밀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슥 사라졌다.
잔뜩 젖은 옷자락을 죽 죽 짤자 볼품없이 구겨진 옷자락 아래로 물이 흥건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여기 있으면 아직 찾지는 못하겠지."
진득하게 붙어오는 머리칼을 떼어 내며 탁 탁 물기를 터는 손짓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여섯살에 화명루(花溟縷)의 아기기생으로 팔리듯 넘겨진 지 4년, 양장을 한 채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재중이는 묵묵히 고운 물빛 저고리를 내려다보았다.
"양장보단 예쁘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한번 입어보고는 싶은데
번쩍-
하고 하늘이 진동했다.
"으악-!!!"
"아악-!!!"
순간 서고 저 쪽 끝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에 덩달아 소리를 지르고는 뒤로 자빠졌다.
놀란 마음도 잠시, 저를 놀라게 만든 분이 더 컸던 재중이 앙칼지게 소리질렀다.
"뭐야, 깜짝 놀랐잖아 이자식아!"
-아차, 이런 말투는 행수어른이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미..미안..."
문득 들려오는 여린 일본어에 고개를 갸웃한다.
"누구야? 이 곳에 들어올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아버지를 따라 들어왔는데... 그냥..."
-얼씨구, 도망치셨구나.
번쩍-
"으아-...업...!!!"
"시끄러워!!!"
'여기서 들키면 꼼짝없이 끌려가야 한단말이야' 속으로 곱 씹으며 재중이는 날아들듯 작은 손으로 사내아이의 입을 콱 틀어막았다.
요란히 내리는 빗소리에 묻힌 듯 누군가가 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창 밖을 바라보던 재중이는 고개를 돌려 제 손아귀에 틀어잡힌 사내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번쩍-
두 눈을 꼭 감은 채 귀를 틀어막은 폼이 겁을 잔뜩 집어먹은 듯 싶다.
평소였다면 얼레리 꼴레리 잔뜩 놀려먹었을 텐데, 순간의 변심이었을까 재중이는 묵묵히 사내아이를 끌어안아주었다.
"쉬-... 괜찮아..."
하얀 반팔 셔츠, 짧은 정장바지에 나비넥타이, 멜빵을 맨 폼이 전형적인 도련님이다.
등에 맨 책가방 틈으로 비죽 비져나온 이름표를 손으로 슬쩍 빼낸 재중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윤...호(允號)
그 때
"재중이 네 이놈, 어딜 간게야!!!"
저를 찾는 목소리에 흠칫 놀란 재중이 순간 여전히 제 품에 안겨있던 윤호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샌가 저를 말간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윤호를 어둠 속에서 마주보며 품 안에서 조그만 옥패를 윤호의 손에 쥐어주었다.
"부적이야, 이게 있으면 더이상 저런 폭풍우 따위는 두렵지 않게 될꺼다. 나중에 네가 더이상 폭풍우가 두려워지지 않게 되면 이곳에 올려놔 줘."
-날 버린 어미가 유일하게 내게 남긴 유품이니까.
번쩍-
그 어느때보다 밝은 빛이 서고 안을 지르고 들어왔다.
그리고 급히 달려나가려던 재중의 팔을 윤호가 잡았다.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런 윤호를 뒤돌아본 재중이 피식 웃었다.
"다음 폭풍우 치는 밤에?"
"그래...폭풍우 치는 밤에."
이미 저 멀리 멀어지는 재중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호가 손 안에 쥐여진 옥패를 내려다 보았다.
"자이..쥬..(在中)"
요란스럽게 내리는 비가 더이상은 두렵지 않은듯 해, 천천히 서고 밖으로 걸어나왔다.
번쩍-
"으악-!!!!!"
손에 옥패를 꼭 쥔채 주저앉아버렸다. 바보같은 놈, 스스로 한심하지만 왜 마치 하늘이 자신을 꾸중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건지.
"미츠호(允號) 도련님!"
"유모!"
그렇게 유모의 품에 안긴 채 화명루 안쪽의 객실로 들어가며 윤호는 손 안의 육각 옥패를 다시 한번 만지작거렸다.
-미안 돌려주기까진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자이쥬.
그와중에 행수기생에게 종아리를 세대 얻어맞고 부루퉁 해 진채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재중이 왠지 모를 짜증에 이불을 푹 푹 걷어찼다는것은 화명루 안쪽에서 일어난 소소한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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