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XX/택엔] 사랑에 대한 정의, 그 불분명함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c/c/4/cc4cb82d6dece054518d4ee51c5c06af.gif)
" ...내가 무슨 말 할지, 알지?"
학연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택운은 계속해서 커피잔만 들었다 놨다 할 뿐이었다. 따듯한 커피를 후후 불고, 잔을 입에 가까이 해 한 모금 마신 후 내려놓고, 다시 들고 커피를 마셨다가 또 내려놓는다. 응, 알지. 너무 잘 알아. 듣고싶지 않을 뿐.
학연은 택운의 예상대로-이미 택운이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택운에게 짧은 이별통보를 내뱉었다. 오랜 기간동안의 연애를 끝내기 딱 좋고, 가장 흔히 오가는 말.
" 이제 지친다. 헤어지자."
택운이 피식-하고 웃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려보였다. 지친다,라니. 어렸을 때 부터 함께 자라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며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린 택운과 학연 사이에 지친다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였다. 서로에게 익숙해졌으면 익숙해졌지, 지친다는 말은 그저 택운에게 헛웃음만 나오는 말일 뿐이였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평생지기라는 '친구'의 타이틀을 벗어나 '연인'이 되기까지의 험난했던 시간들. '친구'라는 이름 때문에 어느새 깊어진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도 혹시라도 둘의 사이에 금이 갈까, 스스로를 달래며 섣불리 진심을 보여주지 못하고 속으로 앓기만 했던 나날들. 그리고, 택운이 두 눈을 질끈 감고 용기있게 건넨 고백에 긴 고난 끝에 이루어진 진심어린 사랑. 연인이 되고 나서도 전과 큰 변화 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또 양보해왔다. 갓난아기 다루듯이, 아프지 않게, 상처가 남지 않게 서로의 마음을 살살 쓰다듬어주며. 그렇게 둘은 어떤 연인들보다 더 편안하고, 아름다운 연애를 이어갔다. 그런 우리 사이에, 지칠 이유가 있었었나. 다시 짧게 웃은 택운이 곰곰히 학연과의 기억들을 되새긴다.
" 뭐가."
" ...."
" 뭐가 그렇게 지치는데."
도대체 뭐가. 금세 굳어진 택운의 표정에 학연이 타는 목을 가라앉히려 애써 침을 삼켰다.
그러게, 택운아. 내가 무슨 이유로 이렇게 지칠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저 너의 '진심'이 고플 뿐.
" 넌..나한테 한번이라도 약해진 모습 보인 적 있어?"
" ....."
약해진 모습이라. 학연은 나이답지 않게 어린 면이 있어 조금이라도 힘든 일이 있으면 바로 택운에게 쪼르르 달려가 찡찡대거나 눈물을 쏟다가 택운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잠에 들곤 했다. 하지만 택운은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무언가가 자신의 속을 찢어 갈겨놓을듯한 고통을 느낄 때에도, 절대로 학연에게 힘든 티 하나 내지 않으려 애썼다. 3년 전, 축구를 하다가 발목에 심한 부상을 입어 택운이 그렇게 좋아하던 축구를 더이상 하긴 힘들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에도, 택운은 전혀 아쉬운 티 하나 내지 않고 연신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였다. 둘이 지금까지 함께 지내오면서 학연이 택운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괜찮아,와 걱정하지마,라는 말일 정도로. 학연은 자신에게 걱정을 끼치는게 싫어 아픈 고통과 상처를 제 혼자 꾹꾹 참아내는 택운이 항상 마음에 걸렸었다. 왜 넌 괜찮다는 말밖에 할 줄 몰라, 바보같이.
"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는게 그렇게 힘들었어? 내가 걱정할까봐?"
" ...."
" 나는 무슨 일 있으면 다 너한테 털어놨잖아.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 ...학연아."
" 우리 사이가 뭔데, 답답한게 있으면 서로한테 털어놓고, 위로해주고. 그게 우리 관계 아니였어? 난 나때문에 니가 이렇게 계속 속으로만 앓고있는거, 더이상은 못보겠어. 아니, 못 봐."
" 차학연,"
" 넌...아직도 날 평생지기 친구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 니가 정말로 날 사랑한다면, 넌 나에게 훨씬 더 네 감정에 대해서 솔직했어야 해. 이건,"
이건, 이건... 학연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감정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을 꾹 눌러담고선 나오기 싫다는 듯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뗐다.
" ....사랑이 아니야."
학연은 그대로 떨리는 손을 집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걸음을 뗐다. 택운은 팔꿈치를 테이블 끝에 걸치고, 두 손을 모아 두 팔 사이로 고개를 숙였다. 학연의 눈에서 뜨거운 액체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택운과의 기나긴 만남을 끝냈다는 후련함이 아닌, 마음 속 한 구석에 돌이 박혀있는 것 같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눈물이. 니가 정말로 날 사랑했을까. 끝없는 되뇌임과 함께 앞서나가던 발걸음이 택운의 말에 멈춰섰다.
" 그럼 뭔데."
" ....."
" 사랑하는게 아니면, 뭔데."
멈춰선 학연의 눈물이 멎었다. 곧 떨려오는 두 팔에 간신히 힘을 주곤 고개를 돌려 택운과 눈을 마주했다. 불안한 듯 떨려오는 눈동자와 숨통을 조이는 정적. 학연이 다시 고개를 돌리곤 나 갈게,라는 말을 남기고 카페를 벗어났다.
나가버린 학연과 그의 빈자리를 가만히 주시하던 택운이 다시 고개를 제 두팔에 묻어버린다. 그리고는 저에게만 들릴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멍청이.
학연은 급하게 카페를 빠져나와 무작정 걸었다. 카페 안에서 저를 조여오던 무거운 공기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겨울 바람이 옷 속의 살갗을 파고드는 느낌에 작게 떨었다. 다시 미친듯이 쏟아지는 눈물에 훌쩍거리며, 쿵쿵대는 심장소리에 맞추듯 빨라지는 발걸음으로. 학연은 아까 마저 대답하지 못한 택운의 질문에 대한 답을 되뇌이며 아랫입술을 곱씹었다. 택운아, 이건...
10년간의 우정일 뿐이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우정'.
*
택운에게 이별 통보를 하고 무작정 걸어 집으로 온 학연은 두터운 겉옷과 목도리를 던지듯이 바닥에 내려놓고는 곧바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렇게 온 얼굴을 뒤덮은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한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학연은 지잉-하고 두 번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 퉁퉁 불어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간신히 뗐다. 힘이 빠져 저려오는 두 팔을 간신히 뻗어 휴대폰을 잡아 홀드 버튼을 누른 학연의 눈이 커진다. 새벽 한시. 정신없이 잤구나, 오늘 잠은 다 잤네. 작게 한숨을 쉰 학연이 상단바를 내려보니 아까 진동이 울린대로 두 개의 문자가 와있었다. 발신자는,
정택운.
학연이 눈을 비비고는 화면을 다시 주시했다. '정택운'. 방금 자신이 본 세 글자가 잠결에 헛것이 보인 게 아니였음을 깨닫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내용을 확인했다. 짧은 문자를 천천히 읽던 학연이 뭔가를 확인하듯 문자를 몇번씩 다시 읽고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아까 집에 들어오자마자 내던진 겉옷을 대충 걸치고는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차가운 칼바람이 목도리도 하지 않아 훤히 드러난 학연의 뺨과 목덜미를 스친다. 아까 다 쏟아버려 더이상은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눈물이 다시 학연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택운아, 택운아... 오분정도 미친듯이 뛴 학연이 멈춰선 곳은, 어느 한 집의 대문 앞이였다. 학연은 문지르고 문질러도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고는 초인종을 누르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버튼에 닿을 듯 말듯 한 거리에서 부들부들 떨리던 손은 곧 학연의 고개가 숙여짐과 함께 힘없이 떨어졌다.
' 차학연 나 아픈것같아'
' 열도 좀 나는게 감긴가봐 기침도 나구'
몇번이고 읽고 또 읽은 택운의 문자. 누가 보면 별 거 아닌 내용이라 여기겠지만, 학연은 그 짧은 문자 두 통에 담긴 깊은 의미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우린 아픈 일들은 다 마음속에 눌러담고 혼자 끙끙 앓아야 하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에게 제 상황과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며 아픈 일이 있으면 위로해주고, 기쁜 일이 있으면 마치 제 일인 마냥 함께 기뻐해주는, 그런 사이 아니냐고. 항상 자신이 위로해달라며 찡찡댈 땐 다 받아주면서 정작 몸이 아파도 내색조차 하지 않고 연신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는 택운의 모습이 싫다고. 헤어지자며 일방적으로 사랑의 감정만이 아닌 긴 세월으로 다져진 둘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택운이, 먼저 아프다는 연락을 한 것이다. 학연이 다시한번 초인종에 손끝을 갖다대었다. 빨간 버튼이 딸깍,하고 들어갔다. 띵동- 학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돌아갈까. 니가 문을 열기 전에, 빨리 도망가버릴까. 난 아직...자신이 없어. 너를 다시 볼 자신이. 오만가지 생각을 머리속에 눌러담는 사이, 현관문이 열렸다. 뒤이어 어김없이 찾아오는 정적.
둘은 몇 분동안 그저 서로의 눈을 깊게 바라보기만 했다. 둘의 뷸안한 눈빛속에 담긴 여러가지 의미를 이미 다 안다는 둣이.
학연은 제 머리속을 온통 헤집어놓는 자신의 바보같은 모습과 밀려오는 슬픔, 또 택운에 대한 미안함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미쳤지, 내가. 내가 다 끝내놓고 병신같이. 학연이 자리를 뜨려 뒤돌아 선 순간, 택운이 학연의 팔을 잡고 그를 돌려세웠다. 택운과 학연의 눈이 다시 마주치고, 금방이라도 넘쳐 흐를듯이 끓어오르는 감정이 결국은 터져버렸다.
흐엉, 흐어어엉...학연이 아이처럼 하얗게 터져버린 울음을 마구 쏟아냈다. 택운이 그런 학연을 강하면서도 아프지 않게, 제 품으로 당겨 꽉 끌어안아 토닥거려주었다. 미안, 미안해... 잔뜩 울상이 되어 저에게 미안하다고 매달려오는 학연이 귀여워 픽-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택운이 끌어안던 팔을 풀어 큰 손으로 눈물 범벅이 된 학연의 양 볼을 감싸듯이 어루만졌다. 엄지 손가락으로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며.
" 학연아, 차학연."
" 흑, 흐어, 흐어엉..."
간절하게 학연의 이름을 부르는 택운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를 대변하듯, 학연의 얼굴을 잡은 택운의 손도 부들부들 떨렸다. 학연아.
" ....사랑해."
높으면서도 무거운 미성이 따뜻하게 학연의 귓속을 파고든다. 다정한 음성에 눈물이 끝없이 쏟아져 퉁퉁 부은 학연의 눈꺼풀이 스르르 풀어진다. 나른한 듯 풀린 눈과 택운의 눈이 다시 마주치고, 무엇을 더 말할 새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택운은 학연의 양 볼을 손으로 감싸고, 학연은 그런 택운의 목에 팔을 두르면서. 혀가 얽히고 섥히는 격정적인 게 아닌, 진심과 미안함이 담긴 진한 키스. 붉게 달아오른 두 입술이 벌어졌다 다물어졌다, 맞물렸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두 사람은 다시 어긋난 줄 알았던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째깍째깍 소리 없이 흘러가는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모두 12시를 가리켰다. 마치 택운과 학연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듯, 험난했던 한 해가 가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나갈 2014년이 시작되는 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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