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백현은 결국 어제도 밤잠을 설치는 바람에 아침부터 눈꺼풀이 무겁고 몽롱한 상태였다.졸린 눈을 비비며 턱을 괴고 조용히 꿈속 일같았던 어제를 떠올린다.문득 살짝 얼굴을 찌푸린 딱딱한 표정으로 제게 묻던 그 음성에 궁금해졌다.찬열이는,그때 나한테 물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던걸까.조금 알 것도 같았지만 정확히 알고 싶었다.백현에게 또 떠오르는 것들은 뭐 그런 것들이었다.한참 향하던 찬열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다 멈췄을 때 그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라던가,제게 낮게 읊조리던 그 짧고도 달콤한 고백같은 것들.백현은 잠 못들던 어젯밤의 기분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심장이 두근거리고,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그대로 느끼는 그 기분.
"무슨 생각해?"
백현을 보던 종인이 짐짓 물었다.백현이 웃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그냥.백현의 시선은 곧 반 풍경으로 옮겨졌다.여전히 턱을 괴고,멍하게 그 모습들을,풍경들을 바라본다.물기가 덜 마른 물칠판과 텅 빈 교탁,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반 아이들의 모습이라던가,조용히 엎드려 자고 있는 모습,수학문제집을 풀고 있는 모습.그 모든 것들을 백현은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주시했다.그리고 일정하게 제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심장박동을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찬열,찬열아.그리고 그 심장박동에 의미를 부여할 이름을 자신만 들리도록 작게 불러보았다.
백현은 어젯 밤,술에 취한 찬열에게 들은 얼떨결의 고백만큼이나 얼떨결에 자신의 속내를 털어내버렸었다.백현은 그 전까지는 완전히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는 못했었다.고백을 듣고 도망나오듯 찬열의 집을 빠져나오면서 했던 수많은 생각들속에 있던 모든 것들은 사실 오직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백현은 그것의 명칭을 정확히 칭할만큼 경험이 풍부하지도 못했고,또 조금 미숙하기도 했기 때문이다.그래,그런가 보다 했던 백현이었다.침대에 누워 왼쪽가슴에 손을 얹고 어두운 천장을 보면서-그래,그래.그런가봐.나 사실 그랬구나.넘겼는데,찬열이 백현과 하교하며 너무나도 착 가라앉은 얼굴로 물은 것이다.왜,말 안했어?하고.백현은 그 말을 듣고 나서 알 수 없이 온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곧 정신이 빠질만큼 혼미해졌었다.
찬열의 그 애절한 목소리를 전화너머로 들으며 백현은 저도 모르게 생각을 멈췄던 자신의 마음을 이실직고했다.왜 그랬을까,백현은 생각에 없던 말을 저도 모르는 새 뱉었던 자신을 되돌아봤다.머릿속을 맴도는 건 찬열의 낮고 애타는 목소리뿐이었다.왜 그랬어.아무렇지도 않아서 그랬어?그의 목소리를 그렇게 듣고 있자니,백현은 더 이상 '그래,그런가봐'가 아니었다.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그렇다고 백현은 자신이 이렇게 여자아이처럼 굴 줄은 몰랐다.백현은 자꾸만 휴대폰을 확인하고,또 확인하다 지치면 찬열의 문자를 최근순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갔다.아니면 또 턱을 괴고 찬열이 제게 했던 말들을 떠올린다던가,수업도 듣지 않고 책에 찬열의 이름을 끄적인다던가.그런 것들.백현은 어느 순간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조금 당황스러웠다.뭐,그래도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백현은 찬열의 고백을 받고도 모른 척했던 근 이틀간을 떠올렸다.그래,'이 정도'는 아닌 줄 알았는데,은근히 모른 척하면서도 섭섭했던 감정과 기분 좋은 설렘이 가득했던 것을 돌아보니 '이 정도'가 맞는 듯 했다.백현은 끝내 인정했다.
그렇게 별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 백현의 휴대폰에 작은 진동이 지잉-울렸다.백현은 금세 그것을 확인하려 화면을 터치했다.두근두근- 또,별 거 아닌 것에 두근거리잖아.백현은 생각했다.
'쉬는 시간에 올라갈게,어디 가지마'
찬열의 연락이었다.백현의 얼굴에 얕은 미소가 번졌다.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울렸다.알았어.조심스럽게 입력하고,확인버튼을 눌렀다.
-
찬열은 전처럼 푹 가라앉아 있지만은 않았다.몰랐는데,백현은 오늘 찬열을 보고서야 깨달았다.나때문이었구나.하지만 찬열에게는 별 말을 꺼내지 않았다.점심을 먹은 후 학교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둘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그런데도 둘은 웃고 있었다.아무 말도,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도 간지러운 공기 탓같기도 했다.그러다가 언뜻 눈이 마주치면 찬열이 먼저 웃음이 터졌다.그러다 백현도 따라 웃음이 터지고,그리고 다시 말이 없었다.그런데도 백현은 그 순간이 좋았다.찬열도 딱히 어색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그냥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이다가,백현을 보고 다시 웃음이 배어나오고.그럴 뿐이었다.
"뭐 기분 좋은 일 있어?"
종인이 무심하게 묻는 말에 백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말 없이 웃어보였다.곱게 휜 눈꼬리에 시선을 고정하던 종인이 곧 시선을 제 앞으로 옮겼다.왜?낮게 묻는 말에 백현은 고민없이 대답했다.
"그냥,다."
다 좋아.
뭐 사실이었다.
그래?종인이 옅은 미소를 띠며 샤프를 꼭꼭 눌러썼다.어찌나 꼭꼭 눌러쓰는지 샤프심가루가 자꾸만 나왔다.오늘 오세훈 지각해서 엉덩이로 이름 쓰기 했대,그 반 담임 존나 깐깐하잖아.종인의 툭 던지는 말에 백현이 진짜?하고 소리내어 웃었다.어,그랬대.종인은 무언가를 계속 눌러쓰고 있었다.꼭꼭 눌러쓰던 샤프에서 결국 톡-하고 샤프심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멈칫하다가,종인은 그냥 샤프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
백현은 부러 가방을 매는 듯 마는 듯 했다.찬열의 문자때문이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종인이 말없이 가방을 챙기고 맸다.백현은 턱을 괸 채 입술을 물어뜯다가 백현아,하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찬열이었다.백현은 꼭 데이트라도 하러 가는 것마냥 긴장됐다.찬열을 보자 마자 가방을 제대로 매고 먼저 일어선 종인보다 빨리 복도로 나왔다.찬열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다,뒤를 돌아 종인을 향해 인사했다.종인아,잘 가.짧게 말하고는 백현이 찬열과 나란히 발을 맞추어 걸었다.
"..."
걷는 발 소리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침묵이 이어졌다.백현은 솔직히 조금 민망했다.말하자면 조금 낯부끄러운 통화를 하고 나서 설레는 감정이 우선이긴 했지만,그 뒤를 잇는 것은 만만찮은 낯설음이었다.어색함이라 표현하기엔 좀 편했고,서먹하다고 표현하기에도 뭔가 많이 부족했다.말 그대로 서로의 낯선 모습에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그렇게 둘은 말 없이 계속 걸었다.침묵을 유지하며 교정을 지날 때쯤 백현은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가 흠칫 놀랐다.종인이 백현의 뒤쪽 조금 가까이서 걸어오고 있어서였다.그런데 어쩐지 뒤를 돈 순간 바로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당황한 백현은 금세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종인은,백현의 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걷고 있었다.여전히.
-
"뭐,할 말 없어?"
침묵을 깨고 찬열이 뱉은 말이었다.그 달고 묘한 음성에 백현은 움찔할 뿐 달싹이는 입을 열진 않았다.뭐라고 말을 해.백현은 그렇게 생각했다.부러 고개를 푹 숙이고 걷던 백현은 목이 아파 이번엔 평소에는 잘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풍경들로 시선을 옮겼다.조금 덜 녹은 눈들을 소복소복 밟으며 지나가는 연인들이라던가,그럼에도 제법 허전해보이는 거리의 모습 그대로,아니면 찬열의 검은 운동화라던가.백현은 제 눈으로 보는 이 풍경들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제 멋대로 놀아 백현은 머리가 어지러웠다.제가 밟고 있는 이 땅에 과연 제대로 한 발 한 발 딛고 있긴 한건가,의심이 들 만큼 그랬다.
"나,아직 안말했어"
뭘?찬열이 작게 하는 말에 백현의 귀가 쫑긋했다.안 그런 척 찬열의 운동화에 시선을 맞추고 따라 걸으면서 백현은 궁금해했다.무슨 말을 안했는데?순간 찬열의 픽 터지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왜 웃어 너.백현은 운동화에 향한 시선을 찬열에게 채 돌리기도 전에 후읍-숨을 들이킬 수 밖에 없었다.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싼 찬열의 손때문에.곧 깍지를 끼며 제 손등을 덮는 찬열의 다섯손가락에 당황해 손을 빼내려던 백현이 멈칫하다,그냥 조심스럽게 맞깍지끼었다.
"이겼잖아 나,내기한거"
"...아"
"갑자기 생각나서"
"...치사해"
까맣게 잊고 있던 내기이야기를 꺼내는 찬열에 백현은 입술을 삐죽거렸다.뭐 딱히 성적표를 비교해보지 않아도 찬열의 완벽한 승인 내기.승자가 자신이 아니라서 백현은 이제야 말을 꺼내는 찬열이 치사하다고 생각했다.치사하단 백현의 말에 웃음짓던 찬열은 다시금 입을 닫았다.말 안해?소원 들어주기로 한거.백현은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뭐,찬열이 직접 소원이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따지자면 소원이었다.다시 느릿하게 발을 맞추어 걸으며 백현은 하얀 입김을 뿜어냈다.날이 추웠다.그런데 백현과 찬열이 깍지낀 두 손은 꽤나 따뜻했던건지 둘은 쉽게 손깍지를 풀지 않았다.그래,날이 추우니까.
안창피해?백현이 찬열의 신발끝에 시선을 두고 툭 던지듯 물었다.금세 찬열의 시선이 옮겨온 걸 깨달았기 때문에 백현은 새까만 그 신발을 계속 볼 수 밖에 없었다.뭐가?정말 모르겠다는 듯 물어오는 어조에 백현이 우물거렸다.손,손 말야.백현의 말에 찬열이 김 빠진 소리를 냈다.뭐가 창피해?당연하다는 듯한 그 목소리에 백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창피하진 않고,그냥"
"..."
"그냥 심장 뛰는데,들려줄까?"
백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찬열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왜.미소를 머금고 백현을 보며 그렇게 말하는데,처음으로 백현은 찬열이 능글맞다고 생각했다.부..아,부끄럽잖아.백현은 꼭 찬열과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쑥스럼을 탔다.억지웃음은 짓지 않았지만.
"어색해서 그래?"
"..그건,아닌데"
"그러면"
..좀 낯설어서.백현이 잠시 뜸들이다 사실대로 말했다.깍지낀 손에 조금 땀이 차는 것 같았다.찬열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백현은 그저 부끄러워 귀끝이 빨개지고 얼굴이 달아올라,조금이라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또 푹 숙일 뿐이었다.말 없던 찬열이 후-하고 한숨 아닌 한숨을 뱉었다.
"뭐가 낯설어?"
"..그냥,"
찬열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는 것을 백현은 느꼈다.찬열은 백현에 시선을 고정하고 또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난 그대론데"
"..."
..나랑 처음 만났을 때,기억나?너 그때 나 완전 경계했었잖아.모르는 줄 알았지,다 티났어.
억지로 웃기도 하고,그냥 표정에서 다 드러났어.이제서야 말하는거지만 너랑 친해지기 얼마나 어려웠는지 몰라.
..뭐,그러다가 어느정도 친해졌을 때 니가 웃어줬잖아,억지로말고.
그땐 몰랐는데 나 그때 엄청 설레었어.그냥 기분이 그 날따라 좋은 줄로만 알았는데.생각해보니까.
네가 힘들어 할 때 곁에 있어주는 게,네가 기대는 게 나라서 또 좋았어.
그래서 네가 축 쳐져있으면 맨날 일부러 띄워줬었잖아,웃으라고.설마 다 기억 안나는 건 아니지?나 많이 애썼는데.
너 얼마전에 그랬잖아.첫 눈 나랑 같이 맞은거라고.그 때 네가 얼마나 귀여웠는데.그래서 자꾸 실실 웃었잖아 너 보면서.
가끔 그냥 주체가 안되서 말했잖아,나 너 너무 좋다고.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너라고.뭐 농담 반이었지만.
난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데,그대론데.변함이 없는데.
근데.그래서,뭐가 낯설어?
예상 못한 찬열의 또 한 번의 고백에 백현은 할 말이 없었다.정말 그랬기 때문이다.찬열은 변함없었다.또 찬열은 백현의 생각보다 더 일찍,더 오래 백현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그것을 깨닫자 백현은 도저히 찬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그냥,너무 부끄러워서.백현이 우물쭈물하다 입을 열었다.미안.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말했다.찬열은 다시 말이 없었다.
쉼없이 걷던 찬열의 발걸음이 멈췄다.백현의 집 근처에 다다른 까닭이었다.
백현아.
찬열이 낮게 백현의 이름을 불렀다.이번엔 백현이 고개를 들어 찬열과 눈을 맞추었다.찬열의 눈동자 안엔 백현만이 담겨져있었다.그걸 알아차리고,백현은 제 머릿속을 장악한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여실히 느꼈다.그래,이젠 더 이상 낯설 것도 없었다.
"지금 소원 말하면 들어줄거야?"
"..."
"들어줄거지?"
백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손깍지를 자연스레 풀고,찬열과 여전히 눈을 마주한 채 서로의 동공에 비친 그 모습을.계속 보고 있었다.
"나한테,다시 고백해줘 지금"
"...어?"
백현이 당황스러운 낯빛을 띠었다.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것도 아니고,꽤나 진지한 얼굴로 찬열이 그렇게 말했다.어제 했던 말.백현은 진심으로 당황스러웠다.어젠,아니 어제 한 말도 제 정신이 아니었을 때 한건데.지금,그것도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고 다시 고백해달라고.백현은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상기됐다.
"너무 얼떨결에 들어서,제대로 다시 듣고 싶어"
"..."
"이렇게 얼굴 보면서."
백현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찬열의 그 올곧은 눈빛에 뭐라 말을 할 수 없어 백현은 그저 눈에 힘을 주고 그의 크고 맑은 눈과 똑바로 마주했다.백현이 입을 꾹 닫고만 있다가 끝내 입술을 조심스레 열었다.작은 숨소리가 잇새로 새어나왔다.주위는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조용했다.
찬열아,
...좋아해.
백현은 들릴 듯 말듯하게 그렇게 말하고는 민망함에 눈을 꼭 감아버렸다.너무너무,민망해서.그래서 백현의 살짝 뜬 눈의 눈꼬리엔 눈물이 작게 맺혀있었다.그래,그래도 이정도면 됐다고 백현은 생각했다.이제 정말 낯설지 않았다.저의 감정을 완벽히 인정한 지금 백현은 비로소 그렇게 느꼈다.찬열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기도 전에 백현은 차마 용기가 없어 먼저 돌아섰다. ...갈게.단순히 너무너무 부끄러워서.그렇게 돌아섰다.
돌아서 한 발자국을 떼려던 백현은 갑작스레 허리에 감기는 팔과 등 뒤의 포근한 느낌에 걸음이 멈춰버렸다.찬열이었다.하아.백현의 목부근에서 찬열의 따뜻한 숨결이 내뱉어졌다.숨이 멎을 것 같아서,백현은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찬열이 자연스레 백현의 등에 몸을 좀 더 기울였다.백현은 꼼짝 못한 채 찬열에게 폭 안겨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나도"
나도,좋아해.많이.
찬열이 백현을 꼭 안은 채,그렇게 귓가에 속삭였다.
* *
꽃피는 사랑의 결..실^0^
점점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잇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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