完
백현은 자신의 방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잘 정돈되어져 있긴 했지만 곳곳에 심심찮게 보이는 사이사이에 끼워진 작은 볼펜과 종이같은 것들이라거나, 동전들이라거나 오늘따라 백현의 눈에 거슬리는 것이 많아 제대로 정리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었다. 백현은 곳곳에 끼워진 통신문, 성적표 그리고 어릴 때 만들었던 연필꽂이통에 꽂혀있는 별 필요없는 것들, 그리고 액자에 쌓인 먼지까지 신경썼다. 그렇게 꼼꼼하게 청소겸 정리를 하다가 문득 한 책이 눈에 들어와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책갈피가 접혀져 있는 책이었다. 백현은 책갈피가 접힌 쪽을 자연스레 펴보았다.
'사랑받는다는 건 때로 두려움을 동반하는 것이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인생에서
신은 간혹 나쁜 때를 골라 좋은 사람을 보내준단다'
백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제가 이 문장을 읽으면서 했던 생각까지 떠올랐다. 사랑 받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나 궁금하다고, 나쁜 때를 골라 좋은 사람을 보내준다면 이미 나에게 수십 명을 보내줘야 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아아. 백현은 뭔가 조금 깨달은 듯한 눈치였다. 분명 그렇게 오래 전에 읽은 말은 아닌데도 백현이 전에 이 글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지금 글을 읽으며 드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나쁜 때를 골라, 좋은 사람을 보내준다. 좋은 사람. 찬열이. 백현은 자동적으로 찬열이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달라진 것은 없었다. 찬열은 제가 깨닫기 전부터 계속 백현을 좋아해왔고 백현은 크게 깨닫지 못했지만 친구 이상으로 잘해주었다. 처음부터. 찬열과 백현이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백현은 다시 읽은 이 글이 달라보였다. 달라진 것은 찬열도, 상황도 아닌 제 마음이었다. 나쁜 때를 골라서 좋은 사람을 보내준다라. 조금 비웃으며 넘겼던 그 문장이 어쩐지 와닿는 느낌이었다. 나쁜 때를 골라서 보내준 좋은 사람. 백현은 찬열이 제게 했던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울던 저를 토닥여주며 힘들면 말해도 된다고 했던 그가,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못하는 저를 안심시키며 위로해주던 그가, 우울할때면 부러 더 밝게 웃으며 농담을 하곤 했던 그가. 백현은 왠지 가슴이 조금 벅차올랐다. 찬열은, 제게 한 마디로 '좋은 사람'이었다. 수십 명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사람. 백현은 이 글이 마음에 들었다.
-
백현은 잠시 쉬어가는 주동안 지루함과 답답함을 겨우 참으며 지냈다. 보충학습이 끝나면 좋을 줄 알았던 그였건만 슬프게도 보충학습의 끝이 더 불행같은 느낌을 주었다. 보충학습의 끝은 곧 설날의 시작이었기 때문에 친가와 외가에 각각 하루씩 머물렀다. 헌데 그동안 백현은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사촌들과 특별히 친한 것도 아니었고 불편한 부모님과 있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 차라리 하루종일 학교에 있으라고 한다면 당장 가방을 매고 학교로 달려갈 수 있을 정도로 백현은 그 곳이 갑갑하고 싫었다.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님이 밖에서라고 금슬 좋은 부부처럼 굴 재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백현은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지냈다. 오랫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찬열이 백현에게 자주 연락을 해준 것도 아니었다. 그도 자주 친가와 외가를 오가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래서 백현을 신경 쓸 만한 여유가 되지 않음을 백현은 알았다. 분명 백현은 찬열이 이해는 갔지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첫째날과 둘째날엔 전화도 세 번씩 해주고 문자도 시간마다 보내주더니 그 이후로 찬열은 아예 연락이 뚝 끊겼다. 찬열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데 혹시나해서 전화를 할 수도 없고, 또 먼저 연락하자니 연락없는 찬열이 짜증나기도 하고. 그래서 백현은 온종일 뾰루퉁한 채 몇 번씩 휴대폰을 확인하곤 했다. 박찬열 밉다. 연락도 없고…. 백현은 찬열이 밉다고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결국 5일째 되는 날에 백현이 참다 못해 찬열에게 문자 한 통을 넣었다. 찬열아 왜 연락이 없어.. 보내고 나서 백현은 답장을 기다렸는데 답장조차 오지 않았다. 10분을 기다려도 답장이 오지 않고, 30분, 1시간, 2시간, 3시간, 그리고 결국 하루가 지나도 찬열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백현은 하루종일 답답했다. 평소엔 귀찮을 만큼 자주 하던 찬열과의 연락이 정작 제가 제일 지루하고 필요할 때 되지 않으니 그럴만도 했다.
내 문자 씹는거야?
야아..
답장 좀 해
별의 별 문자를 보내봤지만 찬열은 그래도 답장이 없었다. 백현은 너무 짜증이 나서 속이 다 아렸다. 뭘 하기에 답장도 없고…. 백현이 이미 친가와 외가를 다녀와 집에서 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찬열은 답장이 없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너무 신경질이 나서 백현은 제 손이 가는대로 자판을 누르더니 전송버튼을 눌러버렸다. 너 나 좋아하긴 해? 헐. 백현은 문자를 전송하고 난 뒤 1초 후에 바로 그 문자를 보낸 것을 후회했다. 내 손이 무슨 짓을. 제가 그런 문자를 보낸 것에 당황해서 황급히 다시금 문자를 보냈다.
미안 잘못보낸거야
실수야..
찬열말고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백현은 잘못보냈다고 변명했다. 어차피 답장도 없는 찬열인데 괜찮겠지 싶어 실수라고 변명한 문자를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놓았는데, 순간 휴대폰이 지잉 울렸다. 백현이 화들짝 놀라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찬열이었다. 찬열에게 전화가 왔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잠시, 아까 제가 보냈던 문자가 생각났던 백현은 당황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백현이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아, 백현아 미안 엄마가 휴대폰 가져 갔었어!
"..응?"
-설날에 사촌들이랑 안있고 자꾸 휴대폰 붙들고 있는다고 자는 사이에 어디 가져가 버려서.. 지금 집이야 아까 받았어
아... 그랬구나. 미안해 찬열아 밉다는 말 취소. 찬열의 말에 백현은 제가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무안해졌다. 아까 보낸 문자는 못본건가? 생각하자 백현은 불안해졌다. 찬열은 그동안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둥 네 목소리 듣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는 둥 쉴 새 없이 말을 해댔다. 응, 응 나도…. 당연하지. 어느새 웃음을 띠며 찬열의 말에 백현이 하나하나 대답해주었다.
-엄마가 여친 생겼냐고 묻더라
"..그래?"
-응 자꾸 물어
"뭐라고 했는데?"
-생겼다고 했지
찬열이 전화너머로 키득거렸다. 뭐, 뭐? 어쩌려고. 당황한 백현이 말을 더듬으며 소리를 낮추었다. 뭐 어때, 사실이잖아. 담담한 찬열의 말에 백현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 그렇긴 하지. 백현도 어느새 찬열을 따라 조금 대담해졌다.
-아, 나 잠시만 끊을게
"왜?"
-화장실..
백현이 배시시 웃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곧 찬열이 전화를 끊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이 바닥이었던 백현은 금세 얼굴이 활기를 되찾았다. 찬열과 연락이 되지 않았던 날들은 꼭 지겨운 다큐프로그램을 몇 시간동안 돌려보는 것마냥 따분했다. 어느새 찬열이 제 일상이 돼 버린 것이었다. 찬열의 연락없이 지냈던 몇 일간이 얼마나 지루한지 몰랐다. 뭐 어찌 됐건 이제 찬열의 전화를 받은 백현은 기분이 좋았다. 얼굴에 웃음을 잔뜩 배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데 곧 또 진동이 울렸다.
'뭐?ㅋㅋㅋㅋㅋ'
찬열의 문자였다. 으응? 찬열이 이제서야 문자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찬열의 문자 위엔 백현이 보낸 '너 나 좋아하긴 해?' 가 번듯하게 보내져 있었다. 아악. 백현은 어쩔 줄 몰라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왜 그런 문자를 보냈지? 아 창피해.
'들켰네'
찬열의 문자가 하나 더 왔다. 들켰다고? 백현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좋아하기는, 사랑하는거지♡ 사랑해 백현아'
으윽. 다시 한 번 뜬 찬열의 문자를 읽고 나서 백현은 그냥 침대에 드러누워버렸다. 오글거려야 하는 거 아니야? 백현은 하얀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근데, 난 너무 좋기만 한데…. 백현은 휴대폰을 들어 찬열의 문자를 다시 보고는 이불을 눈 밑까지 덮어썼다. 키득키득. 자꾸만 백현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얀 천장 위에 찬열의 얼굴이 두둥실- 떠다녔다. 백현은 계속 천장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찬열아, 나 네가 너무 좋아져버렸어.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이 드는 백현이었다.
-
설날을 끝으로 다시 모인 반은 2학년때 반 그대로였다. 백현과 찬열은 개학이 좋았다. 백현과 찬열은 같은 반에 같은 짝이었기에. 개학 첫 날 자리에 앉아 서로를 마주한 둘은 뭐가 그리 좋은지 말 없이 서로를 보고 웃음짓기만 했다. 책을 읽다가도 살짝 돌아본 모습에 시선이 맞닿고. 그럼 또 그 눈을 계속 맞추다가 찬열이 장난스레 윙크하면 백현이 풉, 하고 웃으며 고개를 돌리고. 그랬다.
"백현아"
"응?"
"내가 재밌는 거 하나 알려줄까?"
뭔데? 벤치에 앉은 둘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축구하는 아이들, 어느새 눈이 녹아 푸슬한 운동장흙. 그리고 하늘은 새파랬다.
"얼마전에 어디서 봤거든, 4계절의 어원?"
"그런 것도 있어?"
"응, 내가 말해줄게"
봄은, 4계절중에 가장 처음으로 만나는 계절이잖아.
그래서 새로운 시작을 본다는 의미에서 봄이라는 말이 나온거래.
산이랑 들엔 꽃이 피어나고, 겨울잠에 깬 동물들이 뛰쳐나오고… 그것들을 보라는 의미에서 봄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대.
여름은 무더운 태양과 가장 많은 꽃을 만날 수 있는 계절이잖아.
여름이란 단어는 '열리다'라는 말에서 어원이 돼서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는 시기라는 뜻에서 나온 단어가 여름이래.
다양한 꽃과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는 계절이 그래서 여름이래.
가을은 봄, 여름을 거쳐서 열심히 자란 열매들이 결실을 맺는 계절이잖아.
가을이란 단어는 갓다라는 말에서 어원이 됐대. 갓다가 뭔지 찾아보니까, 추수한다는 뜻이래.
그래서 갓다라는 말이 어원이 돼서 가을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대.
그렇게 모든 걸 거두어 들이는 계절이 그래서 가을인거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겨울.
겨울은 봄, 여름동안에 자란 열매들을 가을에 모두 거두어들이고 추운 날씨에 모든 생물들이 쉬어가는 계절이래.
겨울이란 단어가 겻다라는 말에서 어원이 됐다는데, 그게 머물다라는 뜻이래.
추운 겨울에 추위를 피해서 잠시 쉬면서 머무는 계절이 그래서 겨울이래.
말을 마친 찬열이 헛기침하며 백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때? 너한테 말해주려고 계속 별렀어. 그러고는 빙긋 웃는 찬열에 백현은 조금 멍해졌다. 둘을 감싸는 공기가 차갑지만은 않았다.
"몰랐다 전혀.. 그런 뜻이 있는 줄은"
"나도 몰랐어"
"지금은 겨울이네, 거의 끝나가지만"
백현이 시선이 올곧게 정면만을 향했다. 끝나가는 겨울. 모든 생물들이 쉬어가는 계절. 잠시 쉬면서 머무는 그런 계절. 백현은 어쩐지 그 말이 참 잘 어울린다고 느껴졌다. 백현은 무슨 생각을 하는 듯 곧 말이 없어지고 제 정면만을 눈에 담아낼 뿐이었다. 찬열의 시선은 자연스레 백현에게 닿았다. 벤치에 등을 기대면서, 조금 차가우면서도 그다지 쌀쌀하지만은 않은 느낌을 느끼며 찬열은 입을 열었다.
"저 말을 처음 듣고, 널 만났던 봄이 생각났어"
"그래?"
"처음 짝 되던 날에말야. 그 날따라 어찌나 봄꽃들이 예쁘게 피었던지"
아직도 생각나. 찬열이 그렇게 말하곤 또 조용했다. 그 또한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하나 좋지 않은 계절은 없었다고. 찬열은 생각하며 백현처럼 정면을 올곧게 마주했다. 두근, 두근. 그저 고요하게 전체를 담아냈을 뿐인데 백현은 조금씩 심장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 낯설고도 익숙한 느낌에 백현은 찬열을 돌아보았다. 찬열은 여전히 정면을 보고 있었다. 백현이 느리게 미소를 머금었다. 끝나가는 겨울이었다.
완연한 봄이 다가오고 있다고, 백현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미 성큼 다가와 있을지도 모르지만.
fin.
2개월간 연재해왔던 불협화음이 25화를 끝으로 완결이 났네요 ((애증의불협))
봐주셨던 분들, 덧글 남겨주셨던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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