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사모예드를 집에 들인다면
"보고싶었어."
강과장이었다. 어쩌면, 조금은 수척해보이는 것 같은 얼굴을 한 그가 서있었다.
그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벙 찐 채로 그를 바라봤다. 살풋 웃은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잃어버렸던 내 휴대폰이었다.
"........."
"....아.. 고마워요.
아, 아니.. 근데 이게 다 뭐예요. 언제부터 기다렸어요?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늦지는 않을 것 같았으니까.
...내일까지 기다리기 싫었어."
조금 잠긴 목소리로 내일까지 기다리기 싫었다고 말하는 그가 왜 이렇게 위험해 보이는지.
며칠 간 느끼지 못했던 그가 주는 설렘과 두근거림이 다시금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분명히 몸이 천근만근일 정도로 피곤하고 졸리고 힘들었는데, 어쩌자고 이렇게 맨정신이 또렷하게 돌아와버린 건지 모를 일.
"저녁은 먹었어요? 퇴근하고 바로 온 거예요?"
"응. 매운 족발 사왔는데.
매콤한 거 먹고 싶어할 것 같아서."
안 그래도 얼큰칼칼한 라면이나 하나 끓여먹고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매운 족발이라니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메뉴에 귀가 쫑긋, 눈이 번쩍 뜨였다.
일본에서 먹은 음식이 입에 안 맞았던 건 아닌데,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매콤한 음식이 당긴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런 타이밍이라면 정말 좋은ㄷ.....
"매운 족발 어딨는데요?"
"차 안에."
"어디서 먹을 건데요?"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
아무리 매운 족발이 좋다고 한들 차 안에서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차 안이 아니라면 먹을 수 있는 곳은... 지금 내가 향하고 있던 곳은... 그리고 지금 우리 눈 앞에 있는 곳은...
......우리 집인데.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우리집에서 먹자고...? 그것도 강과장이랑 나 둘이서...?
그런 생각은 아직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좀 당황스러웠다.
강과장을 집에 끌고 들어오리라는 생각도 안 해봤는데 버젓이 둘이서 매운 족발을 뜯고 있는 것도 상상해보니 어이가 없었던 거다.
"그럼 우리 집 갈래?"
사뭇 기가 죽은 목소리로 본인 집에 가자는 강과장.
아니 근데 아무리 근처라고 해도 여기까지 와놓고 그쪽 가서 먹는 것도 웃긴 거다.
게다가 내 손에는 지금 캐리어를 포함한 짐이 한 보따리고, 먹고 나서 집에 다시 올 생각만 해도 피곤이 두 배는 쌓일 듯한데.
강과장 집에 가서 먹는 건 좀 더 아니라는 마음에 일단 먼저 저지르고 봤다.
"차에서 족발 가지고 와요. 먼저 올라가서 좀 치우고 있을게요."
"응."
응, 이라는 한 마디가 좀 낭랑하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여튼 강과장에게 호수를 알려주고 나는 먼저 캐리어를 끌고 올라왔다.
출국일 아침에 집안 곳곳을 미처 치우지 못하고 갔다. 주말에 청소할 때 치워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손님이 와버렸다.
구석구석을 후다닥 돌아다니며 재빨리 치워냈다. 마치 처음부터 깨끗했던 양, 괜찮았던 양... 그리고 섬유탈취제도 칙칙 뿌리고.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 생각이 들 때쯤 띵동, 벨이 울렸다.
"들어가도 돼?"
"네, 들어와요."
나만의 공간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들어온 건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게다가 그게 그냥 친구도 아니고... 어.... 강과장님이니까, 조금 더 신기했다.
강과장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들어와서 식탁을 찾더니 그 위에 하얀 봉지 하나와 검은 봉지 하나를 올려놨다.
하얀 봉지 안에는 족발인 것 같고... 검은 봉지는 맥주인가?
쭈뼛쭈뼛 들어오는 걸음이 어색했다. 나라고 어색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매운 족발을 사온 패기는 어디 가고 이렇게 잔뜩 풀 죽은 멍멍이만 남으셨는지.
귀여워진 마음에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보이지 않게 하려고 억지로 끌어내렸다.
"이건 냉장고에 넣어야 돼."
"...네, 주세요."
짧은 시간에(실은 언제부터 생각했는지 모르겠으나) 디테일한 부분까지 챙겨온 그를 봐서 웃음을 참는 건 실패.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낮게 웃었더니 그가 슬쩍 내 눈치를 본다.
내가 왜 쳐다보냐는 듯 눈을 반짝 뜨니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저 먹을까? 아니면 씻을래?"
언제 사온 족발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미 식었을 것 같기도 하고, 뜨끈한 것 보다는 식은 족발을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굳이 족발을 먼저 먹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일단 피곤한 게 우선이었던 지라 집에서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있으려면 씻는 게 낫겠다 싶어 씻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나 씻는 동안에 혹시라도 심심할까봐 TV를 켜드렸다. 물이라도 한 잔 드릴까요? 물었더니 고개를 젓는다.
나는 방에서 속옷가지와 집에서 입는 옷을 꺼내 화장실로 들어갔다.
너무 익숙한 공간에 너무 어색한, 낯선 사람이 있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서로 너무 배고플까봐 움직임을 조금 서둘렀다.
-
"........"
"...오, 그래도 얼추 맞네요?"
"...맞는 거야?"
"네. 원래 이 정도 핏이에요."
나는 이미 씻었는데 또 하루종일 일하다 온 사람이 수트까지 쫙 빼입은 채로 방 안에 있는 것도 피곤할 것 같아서,
과장님도 씻으실래요? 했더니 처음에는 갈아입을 옷이 없다고 거절해놓고는 넉넉한 옷 있다고 하니까 솔깃하셨던 모양이다.
품이 제법 넉넉한 반팔 셔츠가 하나 있었고, 전에 아빠가 잠깐 입다 집에 두고 간 반바지 비스무리한 뭔가가 하나 있었다.
입고 나온 모습을 보니 워낙 신체조건이 좋아서인지 제법 잘 어울린다.
입혀놓고 보니 수트 입을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가 눈에 띄었다.
그가 씻고 있던 동안 TV 앞에 조그마한 상을 깔고 그 위에 족발과 맥주, 젓가락을 세팅해놓았다.
상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보는데 갑자기 웃음이 좀 났다. 서로가 서로에게 있을 수 있는 가장 편한 상태가 된 거다. 엄청 어색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크으- 아, 진짜 맛있다."
"많이 먹어."
"네, 과장님도요. 많이 드세요."
씻고 어쩌고 하다 보니 저녁 치고는 조금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식사를 시작했다.
잠시 TV는 꺼두고 나는 일본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강과장은 회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회사야 뭐, 두 사람 빠진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있을 곳은 아니었지만
내가 강과장이었어도 휴대폰까지 잃어버려 연락도 안 되었던 내가 어떻게 지냈을지는 궁금할 것 같아서 썰을 풀기 시작했다.
"근데 거기서 딱, 비가 와가지고.
그래서 호텔까지 비 맞고 들어간 거 있죠? 우산도 안 가지고 왔고..."
"안 추웠어?"
"밤공기가 좀 쌀쌀하긴 했는데, 밖에 돌아다닌 건 이틀 정도밖에 안 됐어서.
괜찮았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앞에 쫀득한 고깃덩어리를 놔주었다.
나는 냉큼 받아먹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 짠- 하는 소리와 함께 맥주가 한 모금 더 들어갔고, 그는 캔을 내려놓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회사에서는 한참 어른처럼 보였던 그와 이렇게 같은 공간에 편하게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다른 건? 불편한 건 없었고?"
그가 묻는 '다른 것'에 왠지 옹과장님도 포함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옹과장님에 관해서는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더군다나 강과장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도 있었지만,
구구절절 다 이야기를 하게 되면 결국 서로 감정이 상하게 될 것 같아서 일부러 말을 아꼈다.
네, 불편한 건 없었어요. 라고 답했다. 그가 내 눈빛을 읽었다면 일정 부분 내 마음이 전해지리라 믿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잘 다녀와서."
'다행'이라는 그의 말에 수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아 마음이 좀 찡했다.
연락 자주 하겠다고 했는데, 휴대폰도 잃어버려 자주 하지도 못하고.
마음은 마음대로 불안하기도 한 데다 걱정도 많이 했을 것 같아서 미안해짐과 동시에 또 고마웠다.
나를 보는 그에게 눈을 맞추며 고맙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미안해하지 말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는 그 찰나에 잊고 있던 게 갑자기 떠올랐다.
"맞다, 선물 사왔는데!"
캐리어 안 어딘가에 박혀 있을 향수가 생각났다. 지금이 딱 주기 좋은 타이밍이란 생각이 들어 재빨리 캐리어를 찾았다.
낑낑대며 캐리어를 여는 모습을 보다 못한 그가 일어서서 도와주려 해서, 내가 안 돼요! 괜찮아요! 스탑! 을 외쳤다.
왜냐면... 꼭 내 손으로 직접 주고, 또 처음도 내가 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찾았다. 잠시만요!"
"......."
"이거예요. 고민 많이 하다가 골랐어요."
그의 옆으로 꼬물꼬물 가서 두 손을 모아 포장된 향수를 내밀었다.
고개 숙인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직까지는 어리둥절한 것 같았다.
그의 큼지막한 손이 거침없이 향수 포장지를 뜯어냈고, 곧이어 향수는 제 맨몸을 드러냈다.
"향수에요. 맡아보고 제일 어울리는 걸로 골랐어요."
1초라도 빨리 향을 맡아보게 하고 싶어서, 향수 뚜껑을 열어서 과장님의 손목에 칙, 하고 한 번 뿌렸다.
내가 과장님의 양 손목을 잡아 그 손목끼리 부딪히게 해서 향수가 잘 발리도록 했다.
그리고 손목을 놓고 과장님께 향을 맡아보라고 하려 했는데,
".....어?"
내가 그의 손목을 쥔 틈을 타서 제 품에 안기도록 나를 끌어당기는 그였다.
덕분에 완전한 무방비였던 나는 훅 그의 품에 들어가버렸고, 그가 달큰한 향이 폴폴 풍기는 팔로 나를 감싸 안았다.
따뜻하고 넓은 품에 내가 열심히 고르고 맡아보고 산 그 달콤하고 좋은 향이 난다.
기분이 좋아져서 흐흥, 하고 소리 내어 웃었더니 조금 더 힘을 주어 나를 안는다.
"...고마워."
"고맙긴요. 내가 더 고맙죠."
"......."
"마음에 들어요?"
응, 이라는 대답 대신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그가 느껴진다. 귀여워진 마음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니 얼굴이 좀 빨개진 것 같다.
그의 볼을 만지며 좀 빨갛네요, 했더니 무장해제 웃음을 지어보인다. 이렇게 활짝 웃는 웃음은 처음이라 예뻐서 넋을 놓고 바라봤다.
"과장님, 웃는 거 엄청 예뻐요."
"예쁘다고?"
"네. 이렇게 예쁜데 왜 자주 안 보여줬어요."
곰실거리니 좀 부끄러운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아무런 말 없이 조금 더 힘주어 나를 안았다.
이러다 뼈가 하나 부서질 수도 있겠다 싶어 툭툭, 그를 쳐냈더니 나를 살짝 떼놓는다.
행복. 두 글자 말고 다른 걸로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 감정이었다. 모든 게 너무나 완벽해서 아찔하기까지 하다.
혹시 꿈일까 싶어 그의 가슴팍에 대고 머리를 문질렀다. 닿아오는 따뜻한 온기를 보니 꿈은 아니다.
그가 손을 내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나는 사랑 받는 기분이 들어 흐흥, 하고 또 소리내어 웃었다.
"안 졸려?"
"졸려요."
"잘래?"
"과장님은요?"
"나는... 네가 하라는대로 할게.
가라면 가고."
"....."
치, 갈 생각도 없으면서. 하고 눈을 흘겼더니 응, 갈 생각 없었어. 하고 웃는 그다.
그의 말랑한 입술이 내 입술 위에 겹쳐진다. 적당히 불그스름했던 게 이렇게 따뜻하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그의 손이 내 볼을 감싸고, 내 팔은 그의 목에 둘러져 있다. 그렇게 또 말캉한 혀가 섞인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달콤했다.
나를 만지는 그의 손길이 부드럽고, 내가 안겨있는 그의 품이 따뜻하며,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달콤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지만 행복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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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있었던 30명 중에 겹치는 분이 계셔서 지웠더니 29명이 되었고, 그래서 계획했던 80명보다 한 명 더 받았습니다. '작소뿌'님 밑으로 댓글 달아주신 분들은 죄송하지만 다음 기회에 신청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이번에 많이들 신청해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꼭 다음에는 다들 암호닉 신청 성공하시기를 바랄게여..ㅜㅜ
오늘 좀 짧아여... 뎨둉해여 ㅠㅠㅠㅠ 흑 주말에 더 길게 올게요!! 다녤이 집에 오는 에피소드를 꼬옥 한 번 써보고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소원성취할 수 있어서 정말 뿌듯합니다! 이제 오늘 왔으니 주말에야 올 수 있겠지만 그래도 9편 읽고 또 읽고 하시면서 금요일을 기다려주세요ㅎㅎ 글에 대한 소재는 언제든 받고 있습니다! 의견 주시면 흐름 봐서 적극 반영하도록 할게요. 다들 편안한 화요일 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린 주말에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