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nd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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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카로디아 협정을 다시 맺자는 소리가 서프딘 대륙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클로브 대륙도 마찬가지입니다."
"협정 중 어느 내용을 말인가?"
"무역에 관한 내용입니다. 현재 클로브 대륙과 서프딘 대륙은 블로 무역로를 이용해 서로 무역을 하고, 데이몬 대륙과 우리 하르트 대륙은 로딘 무역로를 이용해 무역을 하지 않습니까? 서프딘 대륙은 우리 하르트 대륙과, 클로브 대륙은 데이몬 대륙과 무역로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 협정을 재체결하자는 전령이 왔습니다."
"무역이라…."
왕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날강도 같은 놈들. 데이몬 대륙과의 무역은 선왕 때부터 질질 끌었던 것을 겨우 제가 성사시켜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거의 날로 먹으려 하고 있다. 새끼들아, 그런 건 직접 전령을 보내던가 해서 체결하라고! 왕이 속으로 울부짖었다. 이대로 데이몬 대륙과의 무역로를 다른 대륙에게 터 준다면 속이 쓰려서 일 년 간은 고생해야 할 것 같았다. 순순히 내어줄 수는 없었다. 왕이 머리를 감싸쥐고 끙끙 앓자, 옆에 서 있던 찬열이 왕의 귀에 속삭였다. 폐하,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찬열은 기사였지만, 왕 못지 않게 국제 정세에 대해 식견이 높았다. 그래서 왕은 찬열과 함께 앞으로 카로디아를 주도해 나갈 대륙은 어디인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그런 찬열이 좋은 생각이 있다고 하니, 왕의 몸이 절로 찬열에게 쏠렸다. 귀를 찬열의 입 가까이에 갖다 댄 왕이 '응, 그렇지.' 하는 말을 몇 번 입 밖으로 내더니, 대번에 얼굴이 환해져서는 찬열에게 '너는 천재야.' 하고 말했다. 왕의 반응에 왕당파와 귀족파의 이목이 쏠렸다.
"카로디아 협정을 3일 후로 하자고 서프딘 대륙의 전령에게 전해라. 그 외에 다른 말은 일체 하지 말고. 알겠느냐?"
"예, 폐하. 그러면 협정의 내용은 어찌 하실 것인지…?"
"내게 좋은 생각이 있으니 경들은 걱정 마시게. 오늘은 이것으로 회의를 마쳐도 되겠지?"
"예. 오늘의 내용은 카로디아 협정에 대한 것이었으니까요."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회의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왕의 뒤를 찬열이 따랐다. 회의장을 나서자마자 왕은 무거운 왕관과 망토를 벗어 찬열에게 버리듯이 떠넘겼다. 매번 있는 일이라 찬열이 놀라지도 않고 그것들을 받아 들고 다시 왕의 뒤에 바짝 붙었다. 찬열이 생각할 때, 왕은 이중인격인 것 같았다. 정사를 볼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었다. 정사를 볼 때에는 한없이 진지해지고,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구는 왕이었지만, 정사가 다 끝나고 휴식 시간이 되면 덤벙거리고, 장난스럽고, 뭐든지 대충대충 넘겨버렸다. 저번에 한 번 암살 시도가 있었을 때에도 ── 무려 5년만의 암살 시도였다 ── 왕은 졸린지 하품을 하며 '그냥 풀어 줘, 잭. 그게 싫으면 마음대로 하고.' 라 말하고는 다시 침대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 때, 찬열은 '폐하의 목숨이 걸린 것인데 그렇게 대충대충 넘어갈 수가 있습니까?!' 하고 소리 지르고픈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또 한 번 잠을 깨운다면 하루 종일 히스테리를 부리며 괴롭힐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암살자를 자근자근 밟는 것으로 화를 푸는 찬열이었다.
게다가 정원에서 다과를 먹자고 찬열을 정원으로 끌고 나갔는데 오히려 길을 잃어버린 적도 있었다. 카로디아의 지리는 줄줄 꿰고 다니는 왕이 이십 여년 동안 살아온 곳의 지리를 모르는 기막힌 상황에 찬열은 그냥 기절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래서 찬열은 정사가 끝난 후로는 항상 왕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왕을 모시는 기사가 아니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를 보살피는 유모 같았다. 그런 찬열의 모습에 귀족파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의 자제가 '지금 기사는 개다' 라고 말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찬열은 그 남자 ── 여자가 찬열을 욕하는 것은 드물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외모지상주의' 라고 답 해 주겠다. ── 를 찾아가 웃는 낯으로 온갖 육두문자를 선물해 주었다. 하르트 어로도 모자라 서프딘 어까지 사용해가며 남자를 괴롭힌 후, 왕궁으로 돌아온 찬열의 모습은 굉장히 상쾌한 모습이었다. 어쨌든지간에, 찬열은 굳게 믿고 있었다. 왕은 이중인격이라고.
사실은 삼중인격이라고 믿고 있었다. 정사를 볼 때, 자유시간일 때 말고도 왕이 돌변할 때가 있었으니까. 찬열과 관계할 때였다. 언제부터인지 찬열과 왕은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마 처음 시작은 왕이 술에 잔뜩 취했었을 때였던 것 같다. 그것이 몇 년 전이었더라. 까마득한 과거로 기억되는 그 때에 찬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튼, 찬열과 왕이 관계를 할 때는 뭐든지 다 벗어 던졌다. 옷은 물론이고 ── 찬열에게 옷을 입고 관계를 하는 것을 즐기는 취미는 존재하지 않았다 ── 찬열이 평소에 하는 존댓말도 집어 던졌고, 신분도 벗어 던졌다. 관계를 할 때는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를 대했다. 관계를 할 때면 강아지 같은 얼굴에 요염한 빛이 맴돌고, 행동 하나하나에 유혹의 기미가 뚝뚝 묻어났다. 한 번은 왕이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 봐, 찬열아.' 하고 찬열의 두 손목을 침대 기둥에 묶어 놓고 찬열을 유혹한 적이 있었는데, 찬열은 10분도 참지 못하고 손목을 동여매고 있던 굵은 밧줄을 끊어내 버렸다. 그리고 그 날의 관계는 동이 틀 때까지 멈추지 않았었다. 그렇게 돌변하는 왕이었으니, 찬열이 삼중인격이라고 믿는 것도 아주 무리는 아니었다.
"잭. 방에 가서 아까 그 방법 좀 다시 말 해 보자. 잭 말대로 하면 하르트 대륙과 데이몬 대륙에는 엄청난 수익이 있지만, 클로브 대륙이랑 서프딘 대륙에서 그걸 받아줄 지가 문제이니까. 알겠지?"
"예, 폐하."
아무래도 오늘은 하루종일 정사 모드일 것 같다. 카로디아 협정이 관련되어 있으니, 밤을 샐지도 몰랐다. 밤을 새며 토론을 하려면 먹을 것은 필수였기에 찬열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왕을 테이블로 안내한 후, 바로 옆 방에 있는 부하 ── 찬열의 바로 밑에 있는 직속 부하 ── 에게 '머랭 쿠키랑 마카롱 많이, 브라우니랑 허니버터브레드 적당히, 생크림 여섯 통이랑 우유 세 통 가져 와.' 하고 심부름을 시켰다. 왕과 찬열은 달달한 것이라면 환장을 했기에 밤을 샐 때에는 항상 엄청난 양의 군것질거리가 방 안으로 날라졌다. 한 가지 부러운 점은, 그렇게 먹고도 둘 다 살이 안 찐다는 것이었다. 모든 여자들이 부러워 할 체질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은 오늘도 역시 칼로리 폭탄을 위장 안으로 밀어넣을 생각이었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의자에 앉아 손톱을 보고 있던 왕이 찬열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세를 바로했다. 서랍에서 두툼한 종이 뭉치와 깃펜, 잉크를 꺼낸 찬열이 왕 앞으로 그것들을 놓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 와."
차례로 들어오는 군것질거리에 두 사람의 눈이 번뜩 빛났다. 식도로 침이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우유 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찬열의 부하가 인사를 하고 나갔다. 우유를 주전자에 붓고 화로에 데운 찬열이 투명한 유리잔에 우유를 가득 따랐다. 먹기 좋을 정도로 따뜻한 우유에 왕이 기분 좋은 듯 미소지었다. 시작은 머랭 쿠키였다. 한 입에 쏙 들어갈 크기의 머랭 쿠키를 하나 집어 입 안으로 넣은 왕이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에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찬열도 역시 머랭 쿠키를 입 안에 넣었다. 빨리 먹기 위해 쿠키를 씹자, 머랭이 찬열의 치아에 달라붙었다. 쩍쩍 소리가 나며 떼어지는 찬열의 치아에 왕이 소리내어 웃었다. '머랭 쿠키는 맛있기는 한데, 씹으면 너무 이에 달라붙는단 말이죠.' 찬열이 투덜댔다. 왕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게다가 한 번 달라붙으면 잘 녹지도 않아서 빨리 먹기도 힘들고.' 오늘 토론 주제가 카로디아 협정인지, 아니면 머랭 쿠키인지 알 수 없었다. 10여 분 간 대화를 나누던 찬열과 왕이 결론을 내렸다.
"잭."
"예, 폐하."
"내가 1년 안에, 이에 달라붙지 않는 머랭 쿠키를 만들어 낼 거야."
"1년은 너무 긴데요, 폐하. 6개월 어떨까요?"
"좋아. 6개월 동안 카로디아 전체에서 머랭을 가장 잘 만드는 사람을 찾아내고, 그 사람에게 달라붙지 않는 머랭 쿠키를 만들라고 해야지."
"좋은 생각이십니다."
죽이 척척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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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랭 쿠키는 맛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