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서.”
“네?”
“어쩌자고?”
본인이 생각한 내 반응과 많이 다른 것인지 그녀의 표정은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한 번 찌푸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께 말씀 안 드릴 테니, 좀 떨어져 주세요.”
“……”
“이미 중전이란 칭호도 얻으셨잖습니까.”
“싫다면?”
매우 건방진 제안이었다. 떨어져 달라니. 그녀의 말을 듣다보니 코웃음이 나왔다. 무슨 자격으로 네가 내게 이러는 건데?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냐는 듯 물었다. 그 후 들려온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가 거절할 수 없는
“전하께 말씀드리면,”
“……”
“누가 더 위험해 질까요.”
내 약점이자 아픈 손가락. 이동혁을 건드렸기 때문에.
“…먼저 가 보겠네.”
“잘 생각해 보시죠 마마.”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강녕전을 나왔다. 교태전을 향해 걸어가는 아슬아슬한 그 시간 동안에, 정신을 잡고 가려 애썼다. 녹지 않는 흰 눈을 밟으며 교태전에 도착했을 때, 그 때의 나는
“…허.”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
“어디 아파?”
“아냐 괜찮아….”
이동혁이 찾아왔다. 점심은 먹었냐며 물어오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뭘 먹고 싶지도 않았고, 먹는다고 해서 견뎌낼 속이 아니었다.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내 이마를 자신의 왼손으로 감쌌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진짜 괜찮아 이동혁.”
그는 알겠다며 내 이마에서 손을 내렸다. 이마에 전해졌던 따스한 온기마저 사라지자, 갑자기 힘이 풀렸다. 한숨을 푹 내쉬니, 내 손에 시선을 두었던 그가 눈길을 내게 두었다.
“왜 그래.”
“…아니야.”
“……그래.”
“동혁아.”
“응.”
“…사랑해.”
그는 내 말에 잡고 있던 손을 잡아당겨 나를 품에 가두었다. 누가 볼까 두려움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품에 안겨 한숨 돌리고 싶었다. 이 상황에서 행복이란, 내 욕심이었다.
“나도.”
나지막이 내 귀에 대고 말해주는 그의 음성을 들으니 한결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동혁. 너는 못난 내가 뭐가 좋다고 매일같이 나를 찾아와? 하고 작게 울먹이니, 나를 안고 있던 그가 양 팔을 풀고는 내게 무슨 일이냐 물었다.
“…미안. 나중, 나중에 얘기해 줄게.”
“알겠어. 대신 꼭 말해 줘야 해.”
“응.”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마음이 좀 놓인다는 듯 웃어 보이는 그를 다시 한 번 꽉 안았다.
“너는 나 때문에 혼인도 못 하고 아버지께 꾸중 많이 들을 텐데 그래도 내가 좋아?”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
“너만 그 자리에 있어주면 돼.”
생각했다. 그의 품에 안겨서.
몇 개월을 함께 했음에도 늘 한결같은 사랑을 내게 베풀어 주어서 고맙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다른 사람과 서로 한가로이 예쁜 사랑을 할 수 있었을 너인데,
미안해. 널 여전히 사랑하는 나를 만나 이런 불규칙한 사랑을 해서.
*
“마마. 전하께서 밖에서 기다리십니다.”
“어? 어….”
어영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몸은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손장난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추운 겨울밤, 밖에 있던 그가 교태전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디 아프십니까.”
“네? …아니에요.”
내 앞에 앉은 그는 왜 나오지 않냐는 재촉보다는, 내 안부를 먼저 물어 왔다.
“뭐 불편한 건 없으세요?”
“네. 괜찮아요!”
이렇게 둘이 있을 때는 상관 업겠지. 그녀가 있는 것도 아니니. 분명 둘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편치 못했다. 그가 말하는 것을 몇 번이나 놓친 후 정신을 차렸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건강을 물어오는 그에게 정말 괜찮다며 몇 번이고 말했다.
"나갈까요?" 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함께 나오긴 했지만 추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땀이 뻘뻘 나느 여름보다야 나았다. 한복에 여름이란, 정말 걸리적거리는 계절이었다.
“겨울이 길어 걱정입니다.”
“겨울 싫어하세요?"
"아뇨, 겨울 제일 좋아하긴 한다만,"
겨울이 길어 걱정이라더니, 겨울이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라니. 그의 말을 들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백성들의 식량이 부족할 것 같아서요."
그는 마음이 깊은 사람이었다. 어딜 가든 늘 본인보다 백성들 생각을 먼저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아아. 하고는 웃어보였다. 내 손을 따듯하게 잡아오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숙의가 있는 이 궁 안에서 언제 또 잡아볼지 모르는 손이었다.
"오늘따라 전하의 손이 더 따듯하십니다."
"부인은 늘 손이 차십니다."
겨울이 긴 이곳에 오고 나서는 원래 타던 추위를 더 많이 탔다. 더위도 추위도 많은 나에게 극과 극인 겨울과 여름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는 맞잡은 그의 손과 내 손을 바라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제 손이 따듯해야 부인 손이 따듯해지죠."
아직까지도 적응이 안 되는 그의 불도저 멘트에, 괜히 부끄러워 웃으며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넓었던 궐을 한바퀴 도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평소 걸음이 느린 내 걸음에 천천히 맞춰 걸어주는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라 그런지 빨리 지나가는 듯했다.
"벌써 다 왔네요."
눈 앞에 교태전을 둔 채 그는 아쉽다는 듯 허탈하게 웃어보였다. 그러다 불쑥
"춥네요."
하며 나를 안아버렸다. 뒤에 따라오던 신하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음에도 어떻게 본 건지 다 고개를 오른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저 안겨만 있다가, 몇초 뒤 나도 그를 품에 안았다. 물론 그가 내 품으로 들어오기에는 내 품은 턱없이 작았지만 그래도 그를 이렇게 안아보는 게 어디냐 싶어 그를 꼭 안았다.
"처음입니다."
"네?"
"부인이 이렇게 안아주시는 거."
그의 말에 고개를 "네?" 하며 고갤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가, 부끄러움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달빛에 취해 소원을 빌었다.
지금 함께 하는 이 시간이 다시 왔으면 좋겠다고.
*
"어?"
방에 들어오자 보이는 것이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흰 천. 가까이서 보니 이미 나와 구면인 것 같아 그것을 집어 들어 눈앞에 갖다 대니, 역시나였다. 꽃이 모서리에 예쁘게 피어났다. 겨울에 보는 꽃이란,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것을 펼쳐 오른쪽 모서리를 보았다.
'정 재 현'
국왕의 손수건이 맞았다. 한참을 보다 전에 국왕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 생각이 나 한 번 웃고는 다시 접어 강녕전으로 향했다.
강녕전에 다다르니, 궁녀들이 고개를 조아린다. 웬일로 내가 왔다고 알리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길래, 내가 직접 알리려 그들에게 입가에 검지를 펴 대었더니, 고개를 조아린 채 아무런 말도 않았다.
"전ㅎ…"
"싫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그의 말소리에 놀라 입이 꾹 다물어졌다. 단호한 목소리의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 싶었다. 본능적인 느낌에 이끌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짝. 아주 살짝 훔쳐볼 수 있을 정도로 문을 열었다.
웬일인지 눈이 빨리 떠졌다. 어제 일찍 잔 것이 아님에도 이 시간에 눈이 떠졌다는 것은, 잠을 설쳤다는 표현으로 대신할 수 있겠다.
가만히 앉아 어젯밤의 대화를 곱씹었다. 솔직히 맞다. 대비마마의 말씀이. 나는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보다는 지금 숙의 자리에 앉아있는 한씨 성을 가진 그 아이가 ,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그 대신들 쪽의 그 아이가 중전이 된다면 그는 지금보다 더 편하게 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한참을 생각하다, 마른 세수를 한 후 교태전을 나와 어영이와 함께 걸었다. 그녀는 내게 춥지 않냐며 물어왔고, 나는 괜찮다며 어영이에게 웃어 보였다. 그 때였다.
"중ㅈ…!"
"전하!"
저 멀리서 남색 용포를 입은 국왕이 나를 발견해 내게 달려오려 했지만, 나보다 그를 먼저 발견한 숙의가 그의 옆을 꿰차고 들어왔다. 갑자기 들어온 숙의에 그의 시선은 숙의에게로 향했고, 그녀는 그에게 말을 걸다 다시 시선을 돌린 국왕을 보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작인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어영이와 뒤를 돌아 다시 교태전으로 향했다. 하. 한숨과 같이 나오는 하얀 입김이 저 하늘로 가 구름 속으로 흩어졌다.
마음이 씁쓸했다. 내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정말 그녀의 말대로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 주는 것. 그게 내 할 일인가 싶었다. 교태전으로 들어와 가만히 앉아 멍을 때렸다. 아직 하루고 한 번인데, 벌써부터 마음이 아프다. 앞으로의 나날들을, 나는 어떻게 버텨야 할까.
*
며칠이 지났다. 며칠 동안에 그를 몇 번이고 마주쳤지만, 그의 옆에는 항상 숙의가 있었다. 그는 숙의를 보며 인상을 팍 쓰다가도 나를 보면 늘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했다. 물론 그에 대한 내 답인사는 그저 고개를 작게 숙이고는 돌아서는 것 뿐이었다.
다시 궁에 소문이 돌았다. 보나 마나 뭐 뻔한 얘기일 것이다. 중전과 국왕의 사이가 멀어졌다거나 그런 소문이겠지. 오늘도 며칠동안 해왔던 방에 앉아서 멍때리기. 그걸 시전 중이었다.
" …야 나 들어갈게."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진부한 마마, 이런 것이 아닌 야. 이 목소리와 말투는 눈 가리고 봐도 이민형이었다. 그에게 짧게 "응." 하며 대답한 후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역시 이민형이었다.
"안 괜찮지."
그의 말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궁 안에서의 소문은 늘 돌고 돌았기에, 심지어 이민형은 꽤 큰 중심이었기에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보나마나 숙읜가 뭔가가 또 난리겠지."
"……아냐."
"아니기는."
그의 말에 작게 웃었다. 그러자 그가 "맞으면서 거짓말 하지 마." 하고는 웃어보였다.
"놀리려고 왔냐?"
"이제 며칠 됐는데, 벌써 힘들겠지."
"……"
"앞으로도 그렇게 지낼 생각에 막막하겠고."
그의 말에 눈물이 나오려던 걸 참았다. 아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졌는지 모를 일이다. 이번에는 슬퍼서 라기보다는 그냥 그가 내 마음을 너무도 잘 꿰뚫어서. 누군가 알아주는 것이 고마워서, 그게 또 이민형이어서 눈물이 날 뻔했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내 앞에서 그가 한 말은
"떠나자."
떠나자는 말이었다. 그의 말에 무슨 말이냐며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보는데,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
"청나라로. 떠나자."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갑자기 힘들어하는 게 누군데."
진지한 그의 표정에 눈을 굴리며 곰곰히 생각을 해 보니, 정말 장난이 아닌 것 같았다. 청나라로 떠나자는 그의 말에 나는 생각했다. 이게 정말 가능성이 있는 일일까. 내가 없어지고 난 후 나라가 뒤집히지는 않을까. 나름대로 '국모' 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인데. 그러자 이민형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아마 부인의 벗께서 청나라에 자주 가신다면, 이거 없이는 복잡한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하겠네요.”
“부인의 벗께서, 부인을 굉장히 소중히 여기시나 봅니다.”
"… 언제 가는데?"
"최대한 빨리. 내일."
그의 말에 고민을 했다.
국왕도 내가 없어야 나랏일에서는 훨씬 편할 테고, 아마 그가 날 찾아 나선다고 해도 숙 편인 대비마마께서 방해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이동혁.
이동혁도, 이제는 놓아줘야 할 때가 된 건가. 어떻게 보면, 나 필요할 때만, 내 고집으로만 그를 잡아둔 것 같아서 미안하다. 못된 년. 왜 그의 행복을 빌어주지는 못할망정 힘든 사랑을 택하게 했을까. 그가 힘든 것에 비하면 내가 힘들 것은 우주에서 지구만큼도 안 될텐데. 왜 나 좋자고.
그리고 이민형의 제안에 대답했다.
"…가자."
! 작가의 말 ! |
여러분, 이것이 민형이가 제목에 꿋꿋하게 존재했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아직 남주는 결정나지 않았죠. 허허? 정말 완결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일단 제게 돌은 던지지 말아주세요 T^T..! 돌 맞을까봐 제일 걱정 됩니다..헝헝. 혹시나 험한 말 (ex>작가 이새x 정신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완결 얼마 안 남았다면서 이따구로 글을 싸질러 놔?) 자제해 주세요 저는 겁이 많습니다 흑흑. 아직 남았잖아요!!! 그저 민형이가 여주 많이 생각해왔다는 걸 알아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팔찌 줬을 때부터 아무 생각 없이 준 게 아니라는 거죠! ♥ 오늘도 부족한 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