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angle
03
그때 이후로 정재현은 남들이 안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나를 괴롭혔다. 일반적인 그런 괴롭힘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정말 누구도 눈치채지 못 하게. 나는 왜 하필 이 교양을 선택해서는 이렇게 정재현 눈치나 봐야 된다니.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되냐고! 수업이 끝나고 오늘도 여느 때나 다름 없이 정재현의 가느다란 손가락들은 내 팔목을 잡는다.
"점심, 같이 먹을래?"
여느 때와 똑같은 대사와 함께 말이다.
"아 미안, 알바 가야 돼서."
"아 그래?"
그럼 하는 수 없고. 팔목 위에 얹어진 제 손을 거둔다.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아니 정재현 얘는 왜 갑자기 친한 척이야? 설마 그때 눈이 마주쳐서? 근데 눈이 마주친 걸로 친한척하기에는 좀 아닌 거 같은데. 왜? 대체 왜? 내가 나유타 친구여서? 그렇다기엔 나유타랑 정재현이 막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 걸까.
학교 앞 'Coffee Moon'이라고 써져 있는 가게에 들어갔다. 내가 일하는 곳이었다. 일이라기 보다는 아르바이트 정도? 시원한 공기와 커피의 특유의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카운터에 서 있던 태일 오빠에게 늦어서 죄송하다는 사과를 건넸다. 오빠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입을 뗀다.
"시민이 왔어?"
"늦어서 죄송해요."
"늦기는, 얼른 옷 갈아입고 와."
"네."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받고 있는 태일 오빠의 옆선이 보였다. 하숙집도 들어갔겠다 이젠 시간 걱정 없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주문 받은 커피를 내리고 있는 내 머리 위로 태일 오빠의 음성이 떨어진다.
"이따 새로운 사람 한 명 들어올 거야."
"새로운 사람이요?"
"응. 영호 나간 지 좀 됐잖아."
영호는 나보다 5살 많은 오빠였다. 태일 오빠의 친구이기도 하고. 원래 시카고에서 살던 오빠였는데 한국에 잠깐 온 김에 태일 오빠의 카페 일을 도와주고 있다가 다시 시카고로 떠나게 되면서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새로운 사람이라,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게 어려운 나는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계속 봐야 할 얼굴일 텐데. 친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이게 뭐, 무슨.
"왔어?"
"아, 늦어서 죄송해요."
"오늘따라 늦어서 죄송하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괜찮아."
누가 장난이라도 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되냐고. 해가 떨어지고 하늘이 어두워지자 익숙한 형체 하나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그 얼굴에 나는 입을 작게 벌렸다. 네가 여길 왜? 내가 여기서 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아, 알았으면 들어왔을리가 없겠지.
"둘이 같은 학교던데. 서로 처음 보나?"
카페 안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네 얼굴 또한 선명했다.
"아니요. 아는 사이에요. 같은 과."
아는 사이, 그래. 우리한테 딱 맞는 단어 선택이었다. 친구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아 그래? 잘 됐다. 시간도 같을 텐데."
"네? 시간이요?"
내가 들은 게 맞다면 지금 태일 오빠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러니까, 나랑 김도영이랑 파트 타임이 같다는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둘 다 마감 타임. 시민이 집 가까워졌다고 마감 타임으로 옮긴다 그러지 않았나?"
"아아, 네에. 그랬죠."
그랬는데, 제가 왜 그랬을까요.
전에는 7시부터 10시까지 전철 시간에 맞춰 평일 저녁 타임이었는데. 집도 가까워졌겠다 학비도 벌어야 하고 집을 나와서 살려니 부담 되는 비용이 더 커졌고, 그래서 마감 타임까지 일을 쭉 늘렸다. 그런데 하필 김도영이 마감 타임이라니. 그러고 보니 김도영은 학교랑 집이 가까웠었지.
"둘이 아는 사이라니까 하는 일은 시민이한테 배우면 되겠네. 얼른 옷 갈아입고 와."
"네."
오빠의 말에 식은땀이 흘렀다. 날이 더운 건 아니었다. 카페 안이 더운 것도 아니었고. 카페로 들어온 김도영도 내 존재에 꽤나 크게 놀랐던 것 같다. 놈은 하는 생각이나 감정이 바로 바로 표정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나만 불편한 게 아닐 텐데. 일단 최대한 마주치지 않게 피해야 겠다. 그런데 왜 내가 김도영을 맡고 있는 거냐고. 태일 오빠한테 못 하겠다고 말할 수도 없고. 옷을 갈아입고 내려온 김도영의 옆에 서서 커피를 만드는 일부터 주문 받는 법까지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슬쩍 옆을 올려다보니 놈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말에 집중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 있잖아."
"어?"
이해는 하고 있는 건가?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는 거 아니야? 하는 의심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찰나 놈은 짧게 입을 뗐다.
"마감 타임까지 해도 괜찮아 너?"
집 꽤 멀지 않나. 무표정을 일관한 채로 말하는 도영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나 하숙집 들어갔어."
"학교랑 가까워?"
"응. 해찬동."
아니 얜 왜 이런 걸 물어보고 그러는 거야? 그리고 난 왜 대답을 해주고 있는 거지. 사귈 때 집 앞까지 종종 바래다주던 작년의 김도영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땐 지금보다 머리도 더 짧았고, 아직은 고등학생 티가 조금씩 나던 너였는데. 우리는 벚꽃잎이 떨어지는 양이 점점 많아질 봄의 끝자락에 만났으며 정확히 1년 뒤 다시 꽃잎이 흩뿌리던 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었다.
Triangle
〈sub>〈/sub>〈sup>〈/sup>
내가 너랑 헤어져야겠다고 생각을 했던 이유는 곁에 있어도 너무 외로웠다는 것. 같이 있는 것 같아 보여도 항상 나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 그래도 내 나름대로 노력도 했다. 난 너를 잡으려고 애썼고, 넌 그런 내가 무색하게 보일 정도로 저만치 앞서 나아갔다. 내가 잡으려고 할수록 넌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점점 더 멀어져 갔다. 난 그냥 같이 있고 싶었던 것뿐인데 네가 조금 더 날 바라봐주길 바랐던 것뿐인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변해버린 너에게 나는 큰 걸 바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헤어지자."
"그래. 헤어지자."
힘겹게 뱉은 헤어지잔 내 말에도 넌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면, 혹시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식어버린 네게서 많은 걸 바라지 않게 되었고 널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넌 놀라기도 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서로에게 아픈 말들을 내뱉고, 상처를 주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는 서로에게 등을 지고 있었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
"그냥 이 말은 꼭 해야 될 거 같아서."
차라리 하지 말지. 고맙다는 말, 하지를 말지. 있잖아 동영아 난 그래. 이젠 널 똑바로 볼 수가 없고, 고맙다는 네 말을 그대로 믿을 자신이 없어. 이렇게까지 변해버린 내가 너무 싫었지만 후회하진 않아. 지치고 힘들었지만 괜찮아. 내가 헤어지겠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너무 외로워서 같이 있어도 있는 것 같지가 않아서 그래서, 더 이상은 못 버티겠더라. 날 바라보는 식어버린 네 눈을 보는데 이젠 밉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나도 포기한 게 아닐까.
등을 돌렸고, 우리는 서로 엇갈린 길을 걸었다. 갈라진 입술 새로 울음이 비집고 나오려 했다. 하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보던 주인공들이 떠오른다. 헤어짐에 아파하고 슬퍼하던 그 얼굴들. 나도 모르게 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있었던 건 아닐까.
너는 내 옆에 있으면서 없었다.
그런 네가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헤어짐을 받아들이는 내가 생각보다 끄떡없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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