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angle
04
어제 내가 어떻게 집에 들어왔지? 분명 김도영을 카페에서 다시 만났고,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나서 근처 술집에서 성경이를 만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말이지. 요즘 따라 김도영과 자주 부딪히는 것 같다. 서로 안 그러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싱숭생숭한 마음에 성경이를 집 근처 호프집 'WIN WIN'으로 불렀고 술에 취해 떡이 되어 널브러져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성경이의 한심한 눈빛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의 기억이 전혀 없다. 아흐 억지로 생각하려고 하지 말자. 잘 들어왔으면 된 거지 뭐. 옷도 안 갈아입고 자다니 나도 참 나다. 양말은 반쯤 벗겨진 채였고 어제 입고 있던 가디건만 깔끔하게 접혀 베개 옆에 놓여 있었다. 옷을 갤 정신은 있었나 보다. 대충 편한 옷을 꺼내 입고 화장실로 걸음을 돌렸다. 지금이 11시니까 거의 10시간 동안이나 화장을 하고 있었던 거네? 아으 내가 미쳐. 그렇게 화장실 문고리를 잡아 돌렸는데,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고 있는 민형이가 보였다.
"어, 어… 미안!"
그래도 다행인 건 옷은 입고 있었다는 거. 아니 얜 씻으면 씻는 기척이라도 하던가 아무도 없는 줄 알았네. 화끈화끈 달아오른 얼굴에 부채질을 해댔다.
"노크는 기본 아닌가."
"응?"
"다음부턴 조심해요. 서로."
"아, 미안…… 진짜 몰랐어."
됐어요. 짤막하게 떨어진 녀석의 음성에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문도 안 잠군 게? 라고 말할까 하다가 다시 목구멍 뒤로 삼켜냈다. 혹시나 정말 싸우게 될까 봐. 축축하게 젖은 수건을 목에 두르곤 민형이는 방으로 들어가려는 듯했고 나 또한 화장실로 가려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등 뒤로 민형이의 음성이 뚝 꽂혔다.
"너무 늦게 다니지 마요."
이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응? 나 때문에 깼었어?"
문을 소리나게 닫았나, 그것도 아니면 계단을 올라가는 내 발걸음이 너무 시끄러웠나? 문고리에 올린 손을 슬그머니 내리곤 몸을 돌렸다. 그리고 민형이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민형이는 그런 나를 흘끔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돌린다.
"기억 안 나면 됐어요."
차라리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네. 그 말을 끝으로 민형이는 제 방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다. 으응? 민형아 무슨 말인지 알려주고 가주면 안 되겠니? 멍청한 머리로는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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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sub>〈sup>〈/sup>
"야 이성경!"
"아, 깜짝이야! 왜?"
"어제 나 너가 데려다줬어?"
"뭐?"
"아니이… 어제 나 어떻게 들어갔냐고……"
"너 기억 안 나?"
저 멀리 익숙한 뒷모습에 총총 달려가 어깨 위에 손을 턱하고 올리니 깜짝 놀란 두 눈을 하고선 돌아본 성경이가 있었다. 어제의 일에 대해서 캐묻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점은 성경이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누가? 대체 누가? 기억이 안 난다는 내 말에 성경이는 조금 고민하는 듯 싶더니 곧 천천히 입을 뗐다.
"아, 이름이 뭐더라? 민영? 이었던 것 같은데."
"민영? 야 설마…… 민형이?"
"아! 맞아 민형이!"
솔직히 진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뱉은 그 이름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성경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할 말이 없어졌다.
"네가 전에 말했던 그 하숙집 아들 아니야?"
"맞는데…… 왜?"
"야 얘 착하고 싹싹하던데? 네가 싸가지 없다고 하길래 궁금했었는데 아니드만 뭘."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어제."
그러니까 어제, 길게 이어지는 성경이의 말을 들으면서 입이 크게 벌어졌다.
떠오르는 김도영과 사귈 적 생각, 아니 헤어질 때의 일이 나를 술에 취하게 만들었고. 성경이가 도착했을 때 나는 이미 술이 떡이 되어 엎어져있었다고 했다. 온갖 진상 짓을 해대는 바람에 성경이는 주머니 속에 있던 내 핸드폰을 꺼냈고 그렇게 연락한 게 하숙집 번호였다고. 아, 그러네. 민형이랑은 번호 교환한 적이 없었지. 그렇게 받은 게 민형이었고 내가 술에 취했다는 그 말에 민형이는 윈윈까지 나온 거라고. 말도 안 돼. 성경이의 말을 중간에 끊고 답했다. 말도 안 돼, 그게 사실이라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게 팩트다 친구야. 민형이라는 애랑은 잘 들어갔고?"
"어… 어?"
"잘 들어갔으니까 이렇게 학교에 왔겠지 뭐. 됐다 난 간다?"
야, 야! 그렇게 가는 게 어디 있어! 멀어져 가는 성경이의 뒷모습에다 소리를 냅다 질렀다. 내 소리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경이는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늦게 다니지 말라고 아침에 그랬던 건가. 집에 가면 민형이 번호부터 물어봐야겠다. 무거운 날 이끌고 들어왔을 어제의 민형이가 떠올라 괜히 미안해졌다. 꺼냈던 핸드폰을 다시 가방 속에 넣으며 강의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정재현의 얼굴에 고개를 휙 돌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최대한 멀리…… 멀리 앉자.
"시민아 여기."
오늘도 역시 실패다. 나는 입술 틈새로 나오려는 울음을 꾹꾹 참고 정재현이 가리키는 자리, 그래. 정재현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나는 아직도 작년의 정재현의 싸늘한 낯이 잊히지 않는데 이렇게 옆에 앉아있는 게 참 이상했다. 너도 날 싫어했던 거 아니었을까? 내가 느끼기론 그런 것 같았는데. 정재현과 대화를 할 겨를도 없이 교수님이 빠르게 들어오셨고 그렇게 수업은 시작되었다.
"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 익숙한 대사와 익숙한 목소리는 설마.
"이름이 뭐니? 처음 보는 얼굴인 거 같은데."
"김도영이요. 수업 바꾼 걸 깜빡해가지고…… 죄송합니다."
김도영이 강의실에 들어오자 안에 있던 학생들의 모든 시선에 내게로 향했다. 옆에 앉아있던 정재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웃고 있었다.
"얼른 앉고, 자자 다시 이번 계획 다시 설명할게요."
중간, 기말은 1번씩 총 2번. 지각 3번은 결석 1번이랑 똑같이 치겠습니다. 아, 그리고 처음부터 세게 나가서 미안하지만 바로 조별 과제가 있어요. 조는 4인 1조로 하겠습니다. 따로 뽑는 거 없이 알아서들 정하시면 돼요. 줄줄이 소시지처럼 이어지는 교수님 말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조별 과제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조별 과제, 조별 발표라니. 이건 교양도 아니고 전공이었기에 학점에 더더 예민했다. 수업은 어느새 끝나있었고 교수님이 나가시자마자 내 쪽으로,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재현 쪽으로 몰려드는 인파에 나는 툭하고 옆으로 밀려났다.
"야야 재현아 나랑 하자."
"아 선배는? 재현이 저랑 할 건데요?"
"재현 선배 저랑 해요."
역시 과탑, 역시 정재현이었다. 오히려 나는 마음이 편했다. 사실 정재현이랑 조별 과제를 한다고 하면 학점은 문제 없겠지만 하는 내내 눈치를 보는 내가 떠올라 문득 슬퍼지기도 했고. 그나저나 그럼 나는 누구랑 해야 하나? 일단 나유타랑 하고. 그 다음은 누구랑… 하필 나유타가 오늘 빠지는 바람에 나는 혼자서 고민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김시민, 나랑 할래?"
누구랑…? 김도영……? 갑자기 툭 튀어나온 얼굴에 나는 놀라 얼굴을 뒤로 뺐다.
"어? 어? 뭘…?"
"조별 과제, 할 사람 없어 보이는데."
아니 시바. 그렇게 팩트로 조져버리기 있는 거? 아싸인 내 존재가 서글퍼지는 날이었다. 김도영의 끝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 사람이 없다는 말이 정말 팩트였기 때문에. 그럼 일단 나랑 나유타, 그리고 김도영까지 됐고 한 명만 남았는데.
"저 같이 할 사람 있어요."
"응? 누구?"
"누군데? 뭐야 정재현, 나한테 말도 없이."
"미안. 그럼 나 먼저 간다."
정재현이 온다. 어디로? 이쪽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나와 김도영이 앉아있는 이 자리로.
"먼저 빠져나가는 게 어딨냐."
"엉?"
"같이 하기로 했잖아."
"내가 언……"
"했잖아. 그치?"
"어, 생각해보니까 그런 거 같아."
언제…? 라고 물어보려는 내 물음은 정재현의 건조한 낯에 끝까지 잇지 못하고 뚝 끊겨버렸다.
"안녕, 김도영."
"어, 어. 안녕."
이 조합은 대체 무슨 조합이냐고. 엉엉. 지나가는 사람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중에 전화로 나유타에게 이 사실을 전하니 학점은 걱정 없겠다며 신난 듯한 목소리에 나는 그냥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그래 그렇게 생각 없이 사는 것도 참 능력이다. 과탑 정재현에, 항상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김도영에 우리 조는 모든 학생들에게 부러움을 받았다. 그렇게 부러우면 나랑 바꿀래? 바꿀 사람…… 어디 없니?
그렇게, 모든 수업이 끝나고 나는 곧장 카페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주문을 받으면서도 하루 종일 멍했던 거 같다. 오죽했으면 옆에서 같이 청소하던 태일 오빠가 무슨 일 있냐며 묻기까지 했으니까. 그래도 다행인 건 오늘 김도영은 나오지 않는 날이었다는 거다. 정재현은 원래 이상한 애였지만 김도영 너는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뭘까. 청소를 다 끝내고 옷을 갈아입으려 올라가려는데 내 눈에 보이는 수박 두 통에 앞치마를 곱게 접고 있던 태일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 이 수박 뭐예요?"
"아는 분이 주셨어. 아! 시민아 하나 가져갈래?"
"네? 그래도 돼요?"
"응. 어차피 많아서 혼자 어떻게 먹나 고민했거든."
"감사합니다아-"
받을 생각으로 물어본 건 아니었는데. 뜻밖의 행운이었다. 여름이 다 끝나갈 무렵의 수박이라니 나름 색다르고 좋을 거 같은 느낌에 나는 옷을 갈아입고 내려와 수박을 들었다. 꽤 무게가 나가는 탓에 낑낑거리면서 들고 오느라 애는 좀 먹었지만 말이다. 아주머니도 주무시는 것인지 집안은 조용했다. 조심조심 들어와 부엌까지 수박을 옮겼다. 이쯤에 두면 되겠지? 큰일이라도 하나 마친 듯한 뿌듯함을 안고서 계단을 올라갔고 문틈새로 비치는 빛에 나도 모르게 민형이의 방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부를 하고 있었던 건지 책상 위에 잔뜩 펼쳐진 문제집 위에 엎드려 있는 민형이의 옆모습이 보인다. 나는 방문을 살짝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허락 없이 들어와도 되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뭐 어때. 자고 있는데 뭘. 나는 가방 속에 항상 넣어두었던 담요를 꺼내 민형이에게 덮어주었다. 요즘 일교차가 심해서 종종 챙기고 다녔던 담요였는데 가지고 다니길 잘했다.
"이렇게 자면 불편할 텐데."
마음 같아선 침대로 옮겨 편하게 자게 해주고 싶었는데 옮기는 순간 민형이가 깰 걸 알기에 나는 담요만 덮어주고 바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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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sub>〈sup>〈/sup>
"저기요."
"으으… 안녀엉… 민형아……."
"이거 그쪽 거예요?"
이른 아침부터 알람 소리를 듣고 깬 탓에 아직까지 정신이 들지 않은 상태로 말끔한 민형이의 얼굴을 마주했다. 넌 이른 아침에도 잘 생겼구나. 세상 참 불공평하다 정말. 그나저나 민형이가 들고 있는 건 내 담요…… 아, 맞다. 내가 어제 덮어주고 나왔지. 고개를 끄덕거리는 내 모습에 민형이는 담요를 곱게 접어 내 손에 쥐여주었다.
"민형아."
"네."
"편하게 불러주면 안 돼?"
나는 민형이 민형이 거리는데 너는 저기요, 그쪽, 저쪽하는 게 좀 그런 것 같아서. 이어지는 내 말에 녀석은 가만히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위아래로 작게 끄덕였다. 이로써 호칭 정리는 된 건가? 나름 뿌듯한 마음에 담요를 손에 꾹 쥐고 화장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민형이의 담담한 목소리가 그런 내 발걸음을 잡았다.
"누나, 제 번호 알아요?"
"응?"
"저는 누나 번호 모르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가 싶어 고개를 돌린 채 그저 아무 말 없이 민형이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하숙집 말고, 저한테 전화해요."
꾸깃꾸깃한 종이를 건네주면서 민형이는 그렇게 말했다.
씻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민형이가 건넨 종이를 펼쳤다. 010-oooo-oooo 낯선 번호가 써져있었고, 그 밑엔 늦게 다니지 마요. 라고 썼다가 지운 흔적이 보였다. 지운 게 무슨 소용이야 이렇게 다 보이는데. 밑에 쓸 말을 한참 고민하고 있었을 민형이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풉 하고 웃어버렸다. 이럴 때 보면 까칠해도 아직 애 같기도 하고.
어니언's
저번 편에는 민형이가 너무 안 나온 것 같았는데 이번 편엔 거의 민형이가 차지했네요. 크크.
저는 요즘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답니다. 독자님들은 어떻게 보내시는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아, 그리고 조만간 남자 주인공 투표 글을 올릴 생각입니다. 열아홉, Sunflower 이 두 글입니다! 호그와트 글도 짜고 있는 상태여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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