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사귄 양아치 남친이랑 끝난 (게 아닌) 이야기
01
"아, 씨발 비 와." 야자시간. 창가에 앉은 애가 혼자 그렇게 말하기에 저절로 그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장마철이 지난 지가 언젠데 난데없는 폭우가 쏟아진다. 우산 없는데 좆됐다, 그렇게 생각하고 같이 집까지 쓰고 갈 만한 애들을 몇 명 떠올린다. 일단 바로 옆집에 사는 박지훈한테 빌릴까 생각했지만 걘 백퍼 지 여친이랑 같이 쓰고 갈 게 뻔해서 패스. 내 앞자리에 앉아 엎드려 자고 있는 정지민은 아마 우산이 없을 테고, 얼굴에 뭘 자꾸 쳐바르고 있는 옆자리의 황서현은 집이 반대편이어서 안 되겠네. 그럼 이제 남은 건 배진ㅇ... 아, 우산 빌리는 건 그냥 포기해야겠다. 어차피 학교에서 집까지 별로 멀지도 않으니까. 기껏해야 뛰어서 10분... 존나 머네. 빡친다. 몰라, 야자 끝나려면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그 안에 그치겠지. 이렇게 쏟아붓는 거 보니까 소나기겠네. 내게 시간만 많다면 그칠 때까지 그냥 하염없이 기다릴 텐데, 내겐 지금 그럴 여유가 없네. '야, 키 좀 커라. 진짜 좆만해 가지고.' '좆만해서 불만이야?’ '아니, 평생 안 컸으면 좋겠어.’ ‘누구 맘대로 평생을 논하냐, 너 나랑 평생 사귈 거야?’ ‘평생 사귈 건 아니고. 결혼해야지.’ 평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뭐? 결혼? 그냥 웃음만 나온다. 거짓말도 그런 거짓말이 없어. 그나저나 지나고 보면 사소한 것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더니 진짜네. 100일 때 이런 거 한 번도 안 해본 거 티 팍팍 나는 귀여운 이벤트해 줬던 거, 2주년에 첫 키스 진하게 했던 거, 올해 내 생일에 내가 맨날 갖고 싶다고 했던 커다란 곰인형 사 줬던 거... 특별했던 날들도 물론 기억에 남지만, 그보다도 나는 같이 떡볶이 먹으러 갔던 날 너무 맵다며 쿨피스를 연거푸 3컵이나 들이키던 모습, 자기 전 전화할 때마다 낮게 웃는 목소리, 매점 내기했다가 져서 내 초코우유를 계산하던 모습. 어떻게 뭐 이런 것들만 더 기억에 남냐. 그래도 참 잘 만났던 것 같다 우리. 예쁜 추억이 너무 많아. 진짜 뭐가 이렇게 많은지 이거 좀 봐, 이렇게 그때 회상만 했는데도 벌써 종 치기 5분 전이다. 지금 기분이 이렇게 싱숭생숭한 건 그냥...단지 그 셀 수 없이 많은 순간들이 이젠 과거에만 머무르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주는 공허함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생각을 정리하고 창밖을 다시 돌아봤다. 빗줄기가 줄어들기는 커녕 더 거세져서 창문을 둔탁하게 두드린다. 소나기 치고는 꽤 오래 내린다. 아마 밤이 지나는 내내 그치지 않을 것 같다.***
"야, 집 안 감?" "우산 없어 씨발..." "나랑 쓰고 가자!" "최주연이랑 안 가냐?" "걔 오늘 아파서 조퇴했는데, 몰랐음?" 뭐야, 나한테 말도 없이 조퇴했나 보네. 최주연 그거 백퍼 구라일 텐데. 박지훈도 그걸 아는지 싱글싱글 웃고 있다. 아마 최주연이 진짜 아팠다면 분명 지도 같이 조퇴하고 걔 옆에 딱 붙어있었을 테니까. 순간 또 스며들어오는 그 애의 기억에 고개를 젓는다. 좀 꺼져라, 제발. 사실 진짜로 그냥 가방 뒤집어쓰고 집까지 뛰어가려고 했었는데 비가 생각보다 너무 미친 듯이 쏟아붇길래 교문 앞에 서서 다른 방법을 찾던 중이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박지훈이 우산 같이 쓰자고 내 가방을 잡아당긴 덕분에 살았지. 얘랑 둘만 있어본 게 얼마만인지, 얘가 최주연이랑 사귄 뒤로는 한 번도 같이 하교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물론 그 전엔 나도 다른 애랑 같이 하교하긴 했지만. 아, 뭘 해도 그 애네. 그 애 생각은 오늘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너 최주연이랑 며칠이냐?" "오늘 237." "너네도 진-짜 오래 간다.” “너네만 하겠...... 냐.” 헐, 미안. 자기도 말해놓고 당황했는지 내 눈치를 보는 박지훈이다. 아, 박지훈 개새끼. 오늘은 정말로 더 생각하기 싫었는데 또, 또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 집과 박지훈의 집이 있는 익숙한 골목길에 들어서면 이미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와 버린 기억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나타낸다. 연노랑색 우산을 쓰고 그 애랑 같이 여길 걸어갔었던. 나 그때 그 우산 유치원생 같다고 존나 놀렸었는데. “......너 우냐?” “뭐래 병신아. 안 울어.” “걔 다시 담배 피더라.” 터벅터벅 힘없이 걸어가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예전에 위로글을 모아놓은 책을 읽는데 그런 말을 봤었다. 헤어진다는 건 단지 그 사람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 그 뿐이라고. 정말 지나간 시간들은 아예 없던 것처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듯 했다. 그 애랑 처음 싸웠던 것도 담배 때문이었는데. 그 뒤로도 그것 때문에 수차례 싸웠었고.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빗줄기가 우산을 때리는 소리만 골목에 가득 울린다. 박지훈이 내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야, 너네 그렇게 된 게 네 잘못이냐? 그렇게 혼자 우울해하지 말라고 진짜. “그냥 잘 걸러냈다고 생각해, 그 쓰레기 새끼.” 박지훈 말 틀린 거 하나 없다. 그러게, 세상에 남자가 걔 하나도 아닌데. 날 얼마나 힘들게 했는데, 얼마나 아프게 했는데. 마지막까지 날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데. 지친다 이젠. ‘야.’ ‘뭐.’ ‘떨어져 있기 싫다.’ ‘좋으면 좋다고 말해라, 돌리지 말고.’ ‘와, 과대해석이 거의 뭐...’ 그렇게 툭툭 말을 내뱉으면서도 내 머릴 쓰다듬으며 웃던 게, 그 서툰 표현들이 왜 자꾸 생각나지. 어째서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원래대로, 없던 일처럼 그게 다 정리되지가 않는 거지. 하긴 3년을 어떻게 3개월만에 정리해. 아예 이렇게 떨어져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해 본 것 같다. 근데 우리 왜 헤어졌더라. “쓰레기?” “어, 그게 쓰레기지 ㅇ...” “거기까지만 해라.” “......아이고, 넌 아직 멀었다 내가 볼 땐.” 진영아, 나 진짜 네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야야, 일로 와.” “아 누님 진짜 한 번만 봐 주십쇼.” “응 안 돼, 3학년 1반 김재환 조끼 미착용-“ “......진짜 실망이다.” 선도부장인 내겐 매일 똑같은 아침이 반복된다. 형광색 조끼를 입고 단정한 교복 차림을 한 채로 교문 앞에서 불량한 아이 (?) 들을 잡아내는 것. 고등학교 들어오고 1학년 때부터 해왔던 선도부 활동 마저도 그 애 때문에 시작한 것이었다. 걘 내가 고 1일 적에 중 3이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철이 1도 안 들어서 매일마다 술, 담배, 싸움 등등으로 번갈아가며 내 속을 박박 긁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 해에 기어코 이 학교에 오고 말겠다는 그 애를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응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선도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한 선도부 3년차, 내가 선도부장으로 임명되던 날 우리는 헤어졌다. 참 나, 타이밍도 개거지 같아라. 그때 우린 이미 사귄 지도 1000일이 훌쩍 넘어 있었다. 충분히 아쉬울 만한 긴 시간이다. 눈은 내 앞에 줄지어 서 있는 복장불량자들을 향해 있지만 사실 온 신경은 저쪽 교문에 꽂혀 있었다. 그 애와 끝내고 그 뒤 세 달이 지나 현재 시점까지 오게 되는 내내 나는 늘 똑같았다. 막상 기다리던 것이 눈앞에 나타나면 뒤로 물러나 버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등교마감을 10분이나 넘긴 시간이 되어서야 저쪽에서 걸어오는 그 애와 친구들이 보인다. 이것들은 아침부터 또 어디서 싸우고 온 건지 얼굴이 만신창이다. 특히, 배진영. “자, 차례로 학번 대고.” “에이, 누나. 이 정도면 이제 다 기억할 때도...”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쳐 불러라.” 2학년 5반 문재한, 2학년 6반 강석현, 2학년 6반 조찬민... 그리고 말 안 해도 알 것 같은 한 명. “.......” “2학년 3반, 배진영.” 그 세 글자가 뭐길래 자꾸만 내 심장을 미친듯이 내려찍는 걸까, 낮게 자신의 이름을 내뱉는 그 얼굴을 끝내 올려다볼 수 없었다. 보면 울 것 같으니까. 그저 시선을 선도일지에 내리꽂은 상태로 쓰고 싶지 않은 이름을 꾹꾹 눌러 썼다. 응, 이제 가면 돼. 내 말이 끝나자 그대로 내게서 시선을 거둔 네가 걸음을 옮긴다. 왜 다친 건지,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지, 담배는 대체 얼마나 피다 온 건지... 묻고 싶은 게 많지만 결국 마음 속에다 묻어버리는 나다. 함께였던 시간이 얼만데 고작 그거 하나 못 물어봐서. 고작 이렇게 쉬운 거 하날 못 해서. 그렇게 오래 봐 왔는데 이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린, 그 허탈한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헐? 언니 울어요?” “괜찮아? 야, 미친 왜 울어!” 어, 근데 왜인지 오늘은 눈가에 눈물이 고이네. 참 이상하다. 고인 눈물을 닦으려 손을 들었다. 누군가 그런 내 팔목을 잡아온다. 옆에 있던 선도부 친구들과 동생들이 눈이 동그래지며 뒤로 물러선다. 팔목을 잡은 손길에 힘이 실려 있으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래서 안 아팠다. 너 왜 가다가 돌아왔어. 나때문에? “야.” “.......” “내가 울지 말라고 했잖아, 나 때문에 우는 것 같아서 좆같다고.” “...그런 거 아니니까 꺼져.” “아, 내가 좆같으니까 그냥 울지 마.” 나때문에 가던 길을 되돌아온 그 애는 여전히 내가 우는 게 싫다고 했다.더보기 |
안녕하세요 작가임니다 희희 ٩(๑❛ᴗ❛๑)۶ 가져오라는 너왜친은 안 가지고 오고 웬 신작이냐... 신작도 예고했던 다녤 지훈 둘 다 아닌 진영이냐... 라고 물으신다면 사실 할 말이 없씁니당 왜냐하면! 갑자기 이게 너무너무 땡겼가 때문이죠. (순 제멋대로임) 그렇기 때문에! 독자님들의 반응을 보고... 괜찮다 싶으면 연재를 시작할 예정... 왜냐하면 아직 제게는 너왜친이 남아 있기 때문이죠. 아마 이걸 연재하게 된다면 너왜친보다는 좀 더더 길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당. 재밌게 읽어주시면 감사해요... 알러뷰 ╰(*´︶`*)╯♡ +암호닉은 너왜친 때 걸로 그대로 쓸게요! ♥암호닉♥ 암호닉은 [~~~] 형식으로 신청해 주세요 :) [0226] [수 지] [0618] [1102] [원이] [임금] [메모] [두동] [우찐이] [캐도] [112] [복숭아] [바구진] [라온하제] [호두] [제티] [쥬쥬] [샘봄] [wj1102] [크왕] [나로] [꿍] [땸떄] [포키] [빵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