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변치 않는 것을 갈망한다. 변치 않는 아름다움, 변치 않는 우정, 변치 않는 사랑.
하지만 내게 그것은 두려움이다. 아주 뚜렷하고도 추상적으로 나를 둘러싼 감정.
나는 계속해서 변화해 시시각각 점점 더 흉악한 괴물의 모습으로 진화해야 한다. 나는 약하고 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 걸맞은 껍데기를 얻게 될 때에 비로소 나는 안전해짐을 느낀다.
내막
- 이태용의 순간들 -
사실 나는 좋은 형, 또는 오빠는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오빠!'
그만 해.
'태용이 오빠! 제발!'
이제 그만. 내가 잘못했어.
좁고 열악한 이십 평 내외의 공간에는 열 다섯 명이 조금 넘는 아이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교회에서 떼어 온 낡은 자주색 암막 커튼은 그나마 조그맣게 나 있는 창문을 단단히 가리고 있었다. 쥐의 배설물로 군데군데가 얼룩진 아이보리색 천장에는 아이들이 마구 때려 잡은 벌레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더럽고 비참했다.
열 시가 되면 아버지는 방의 불을 껐다. 모두 잠에 들 시간이었다. 낡은 옷장과 사물함 따위의 가구를 제외하고 나면 우리에겐 한 사람 당 한 평 남짓한 크기의 공간이 주어졌다. 키가 자랄수록 자리에 누운 우리의 허리는 점점 굽어졌다. 열 시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움직이지도 않고 새우잠을 잤다. 남을 배려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은 그런 때에 빛을 발했다.
모로 누워 옆에 누운 아이들의 머리통이나 발, 등판 따위의 것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천장이고 벽에서 쥐가 뛰어다니는 소리가 났다. 나무로 된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방 안에 노오란 빛의 사각형이 비치면 나는 왠지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숨을 멈추었다. 그 문이 다시 닫히고 딸깍이는 잠금 장치 소리가 나고 나면 방 안은 다시 암흑으로 변했다. 나는 그 어두움을 사랑했다. 지금은 증오하게 된 어둠이었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대외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흠 잡을 곳이 없는 멋진 어른. 그에게는 지긋이 나이가 들어가도 숨겨지지 않는 느긋함과 그에 잘 어울리는 부드러운 분위기가 있었다. 우리를 위해 여생을 바칠 수도 있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우리의 아버지를,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니까.
아버지는 늘 우리에게 '보육원 출신'이라는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 않아 했고, 그래서 아버지는 언론의 찬사와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거부했다. 자신의 선행을 어디에도 알리려 하지 않았다. 그저 작은 보육원에 스스로 갇혀 버려졌거나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집중했다.
그 때 내게는 동생이 한 명 있었다. 아니, 사실 여럿이었다. 형편없이 말라 근처의 공사장에서 일을 할 수 없었던 나를 제외하고 내 또래의 남자 아이들은 전부 일을 했다.
거의 아버지의 선행과 희생 차원에서 운영되는 보육원의 형편이 그리 좋지는 못했으므로 그 애들이라고 건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굳이 나만을 집에 남겼다. 성격이 유순하고 꼼꼼하니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도우며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를 돌보고 기르던 누나들이 한꺼번에 보육원을 떠나서였다.
이제 집에 남은 사람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건 나였고 집에는 아주 어린 아기들부터 내 또래의 동생들까지 전부 장애가 있거나 몸이 약한 아이들 뿐이었다. 말라서 힘이 없는 걸 제외하고 개중에 가장 건강했던 나는 자동으로 아이들의 기둥이 되었다. 전부 보호막 하나가 없이 내가 지켜주어야 하는 작은 아이들이었다. 나는 어린 꼬마들이 사랑하는 형이었고 작고 약한 여자애들의 유일한 오빠였다.
나와 고작 한 살 차이가 나던 여동생도 있었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함께 집에 있던 아이였다. 아기 때부터 한 핏줄처럼 나눠 입고 나눠 먹어서 그런지, 그 애는 유독 나를 따랐다.
키가 크고 같은 목욕탕을 쓸 수 없게 되어도 그 애는 늘 나를 사랑하고 생각했다. 오빠, 이거 먹어. 오빠, 이거 가져.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나와 나누는 아이였다. 같은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나를 철썩같이 믿고 따르며. 그 애만 건강히 잘 자라 준다면 나도 아주 나쁜 오빠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눈이 떠진 날은 일 주일에 한 번 나오는 싸구려 코코아를 가장 어린 동생에게 양보한 날 밤이었다. 코알라처럼 내 다리에 들러붙어 빨래도 못 하게 방해하는 아주 작은 남자아이였다. 내가 좋아서 그러는 거였지만 그 아이 덕분에 넘어져 무릎을 찧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 애는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못한 어린 나이였고 아주 밝았고 나를 좋아했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주인만 보면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았다. 미워할 수 없었다.
그 날 저녁, 더 큰 애들에게 뺏길까 봐 이리저리 동그란 눈을 굴리다 채 식지도 않은 코코아를 들이켜 버리는 것을 보았다. 목구멍이 뜨거워 인상을 쓰고 혀를 내미는 아이의 등을 문지르며 내 컵을 내미는 수밖에, 달리 씁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천천히 먹어, 천천히. 형이 보고 있을게. 진짜? 형아는?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의 아이는 이미 두 손으로 내가 건넨 머그컵을 말아 쥐고 호호 불면서 물었다. 나는 이거 싫어해. 너무 달아.
물론 거짓말이었다. 나는 코코아가 좋아서 요만큼 어릴 때 찬장에서 몰래 가루를 훔쳐다 퍼먹은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때의 나는, 나도 미성숙한 주제에 그런 욕심은 이런 작은 꼬마들에게만 허용되는 여유라고 생각했다. 십 대의 초반이 조금 지난 애매모호한 나이였다. 모두가 아직 불완전하다고 말하는데, 막상 집에서는 내 몫의 일을 하지 않고 먹기만 해서는 안 되는 그런 나이였다.
나를 좋아하던 꼬마는 그날 밤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았다. 잘만 자던 아이가 몸을 뒤척이더니 깨지도 못하고 징징댔다. 입속으로 신음처럼 웅얼거리는 얇은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는 바람에 잠이 깬 나는 아이를 깨워 앉히고 물었다. 나쁜 꿈 꿨어? 정신이 없는 듯 초점 없는 눈으로 취한 듯이 천천히 기우뚱거리던 아이는 울컥 헛구역질을 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상에 덜컥 겁이 났다.
그 날 따라 정신이 또렷했다. 주변에 이리저리 누워 자고 있던 아이들은 놀란 나의 목소리가 꽤나 컸음에도 한 명도 깨지 않았다. 원래 잠에서 잘 깨지 않는 편이었는데 아이가 아픈 걸 알아채서 다행이었다. 나도 모르고 자고 있었더라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고개를 푹 숙이고 공처럼 둥근 모양으로 앉아 있던 아이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대로 다시 재우기엔 불안했다. 데리고 나가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침실을 향해 조심조심 걷던 중 불이 켜진 창고에서,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보았다. 계속해서 수도 없이 떠올리게 될 장면을. 복도를 뒤덮은 어둠 속에서 파란 백열등이 빛났다. 먼지 쌓이고 박스가 이리저리 놓인 허름한 공간 안에서 아버지가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다. 왜 먹지를 않니? 코코아를 마시면 잠이 잘 온다니까. 매일 그렇게 잠을 못 자니까 힘이 하나도 없는 것 아니야. 걱정하는 말을 하면서 목소리는 화를 내고 있었다.
짐짓 엄한 음성으로 다그치는 목소리에 힘없이 앉아 있던 여자 애가 코코아를 목으로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꿀떡, 꿀떡, 그래. 잘 마시면서 꼭 이렇게 따로 돌봐 줘야 먹더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부터 갑자기 냉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평소의 인자하던 목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어딘가 냉랭하고, 욕심이 많아 보이는 그런 음성이었다.
약간 열린 문틈으로 손을 집어넣어 문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내게 반쯤 안겨 있던 아이가 형아, 하고 속삭였다. 형아, 나 무서워. 쉬 마려워. 작은 손이 차갑게 식어서 내 팔뚝을 붙들었다. 안색이 조금 창백할 뿐 아까만큼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알았어.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에 다녀왔을 때, 바람이 불어 한 뼘 정도 더 열린 창고 안에서는 끔찍한 소리가 났다. 어딘가에 꽉 막힌 괴로운 신음 소리와 몇 번의 둔탁한 소리였다. 이게 뭐지. 무슨 상황이지. 품에 안겨 잠들랑 말랑 하던 꼬마의 머리통을 감싸 안아 눈과 귀를 막고 가슴팍에 묻었다. 새어나오는 밝은 빛에 아린 눈을 찌푸리며 숨죽여 열린 문틈을 들여다 보았다.
익숙한 얼굴의, 잔뜩 충혈된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착하고 예쁜 내 여동생이었다. 아버지의 몸에 깔려서, 주먹으로 마구 얼굴이며 배를 구타당하고 있는 내 피가 섞이지 않은 여동생. 칭칭 감긴 넥타이에 막힌 비명이 웅웅거렸다. 갈색 눈동자가 허공을 이리저리 방황하다 내 눈을 스쳐 지난 것 같았다. 너 때문에 귀가 아프구나, 조용히 좀 하겠니? 다정한 말투로 말한 아버지가 싸이코처럼 빈 머그컵을 바닥에 내리쳤다. 컵을 쥐고 있던 오른손이 긁혀 피가 났다. 공포에 질린 여동생이 마구 고개를 저었다. 눈앞이 하얘지고 손이 덜덜 떨렸다. 나는 두려웠다.
품에 고개를 묻고 잘 자던 꼬마에게까지 나의 긴장과 공포가 전달된 모양이었다. 아이가 작은 소리로 칭얼댔다. 이러다 들키면 어쩌지. 극도의 긴장감에 숨이 막혔다. 놀라서 숨을 훅 들이킨 나는 그대로 소리 없이 내달려 방으로 돌아왔다. 쉼없이 떨리는 몸으로 계속해서 창고 안의 풍경을 되새기면서, 하루 종일 눈물도 나지 않는 무력감 속에서 밤을 지새웠다.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빌었지만, 한 밤 내내 빌어도 내게 주어졌던 기회는 이미 형편없이 깨어진 후였다. 나는 여동생을 지키지 못한 것이었다. 그뿐이었다.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얼굴이 푸석푸석해진 내게 몸이 안 좋으냐고 묻는 아버지는 내가 사랑하는 자상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평화로운 보육원에는 아무 일도 없었고, 어제의 일이 정말로 사실이었느냐고 붙들고 물어볼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린 내가 혼자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아침에 눈만 뜨면 끔찍했던 그 장면과 소리가 떠올라 오래 된 영화필름처럼 미칠 듯이 끊이지 않고 재생되었다. 오빠, 어떻게 그냥 갈 수가 있어? 오빠, 내가 구해달라는 게 들리지 않았어? 오빠, 잠이 와? 나는 못 자겠어. 하지도 않은 여동생의 원망이 환청처럼 맴돌았다. 사실은 정말로 내게 그렇게 말했을지도 몰라. 나는 시간이 갈수록 파괴되어 갔다.
동생에게 찾아가 속죄하고 싶었다. 내가 그 날 너의 괴로움을 보았노라고, 그럼에도 두려워 너를 그 속에서 구해내지 못했노라고, 정말로 미안해서 눈물과 한숨이 멈추지 않는다,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몇 달간 보이지 않던 여동생은 나를 돌보다 떠난 누나들처럼 보육원을 떠났다. 십 수 년을 함께 지내온 내게 아무 말 없이 떠났다 해도 나는 절대 원망할 수 없는 위치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이제 그 애의 오빠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애는 보육원을 나간 게 아니리라. 강한 예감이었다. 멀쩡히 보육원을 나간 거라면, 그 애는 아무리 나약하고 쓸모없는 내게라도 작별을 전했을 것이다. 만약 그 밤에 내 눈동자를 보았더라도 그 너무나도 순하고 관대한 성품으로 나를 용서해서 인사를 하러 왔을 것이다. 아마 그 애는 보육원을 걸어 나가지 못한 것 같았다.
한 번 인륜을 저버린 소년은 또 다시 상처받을 용기가 없었다. 기피하고 무시했다. 의도적으로 여자 아이들을 돌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여자 애들은 어려워요, 제 또래의 여자 애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저는 남자 애들을 돌보고, 걔는 여자 애들을 돌보면 되잖아요. 처음으로 잃은 여동생을 염두에 두고 던져 본 말이었다. 나는 겁쟁이인 대신 이기적이고 비겁해졌다. 나이가 찼는데도 쫓겨나지 않고 버티려면 밥을 조금 먹고 일을 많이 해야 했다. 눈칫밥 먹고 는 것은 잔꾀 뿐이었다.
겉으로는 순하고 허약한 것처럼 굴면서 필사적으로 힘을 키우려고 애썼다. 새벽마다 운동을 했다. 과일을 깎는 데 쓰는 과도를 빼돌려 티 안 나게 옷 속에 칼을 숨기는 법, 소리 없이 공격하는 법, 자물쇠를 따는 법까지 모두 연습했다. 몇 년간 매일 밤 생각했다. 언젠가 이곳에서 벗어나게 되면 여동생을 찾으리라, 찾아서 나의 죄를 고하리라. 그렇게 아이들을 돌보고 몰래 땀에 젖은 티셔츠를 말렸다.
그맘때 즈음, 내겐 여동생이 하나 더 생겼다. 열다섯이 되기 조금 전의 겨울이었다. 이제 내 한 몸 지킬 정도로는 자랐으니 슬슬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며 오솔길을 내고 있던 나를 구경하던 아이가 말을 걸었다. 열 살, 제 나이 치고 한참은 작고 말라서 몇 년 전에 잃은 동생이 생각나게 만드는 애였다. 그 때 동생도 저 애와 비슷한 나이였으니 더 그랬다. 저만한 애들을 보고 욕정을 품는 정신 나간 아버지에게 복종하고 사느라 미칠 것 같았는데, 이상한 소문이라도 돈 건지 망해가는 보육원에 남은 유일한 여자아이인 그 애를 볼 때마다 코에 물이 잔뜩 들어간 것처럼 매워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빗자루로 눈을 치우던 내게 뭐하는 짓이냐고 역정 아닌 역정을 부리던 그 꼬마는 작은 창문을 활짝 열고는 내복 차림으로 꾸역꾸역 몸을 비틀어서 빠져나왔다. 머리부터 눈 쌓인 마당에 톡 떨어졌는데도 벌떡 일어나서 내 쪽으로 뛰어오는 아이였다. 다시는 상처받을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눈길도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솔직히 그 애가 머리부터 떨어지며 꿍,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는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비질을 멈추고 그 방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제멋대로인 애였다. 뇌진탕이 염려되어 아이의 눈동자를 살폈다. 혹시 초점이 나가지는 않았나 하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기우였다. 작고 깡마른 몸에 버슬버슬 일어난 피부를 한 그 애는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나도 어릴 땐 저랬는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새까만 머리카락, 푸석푸석한 피부, 작고 마른 몸, 동그란 눈매까지 나와 너무나도 닮은 아이였다. 내게 달려와 호기롭게 소리친 건 통 뜬금없는 소리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눈을 왜 치워! 저리 가!'
'소리지르지 마, 시끄러워. 지금 길 내는 거잖아.'
'아니 그러니까, 길을 왜 내냐구. 눈은 폭폭 파묻혀서 다니는 건데!'
시끄럽다는 꾸중에 목소리 크기만 줄이고 소곤소곤 소리치는 아이의 얼굴이 심각했다. 이유라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뭐라는 거야, 너나 저리 가. 하고 돌아섰을 때 그 애는 내 허벅지를 이로 물었다. 이갈이 하는 강아지 새끼처럼. 조그만 이가 문 허벅지에는 빨갛게 잇자국이 남았다. 피멍이 들 지경이었다. 조그만 게 독해가지고 별 짓을 다 한다 싶었다. 똘똘한 애들은 상처도 많이 받는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그 아이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만큼의 상처는, 허벅지의 멍으로 치기로 결심했다. 그 눈동자가 세상 무서운 걸 모르던 때의 나랑 너무 비슷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보육원을 나서게 된 일은 애초의 결심대로 머지않아 일어났다. 또 다시 여동생의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전보다 더 늙어 흰머리며 주름이 늘어난 아버지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전과 같은 여유나 멋은 사라진 남자였다. 쭈글쭈글한 얼굴에는 탐욕과 비정이 잔뜩 묻어나있을 뿐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본성을 알아챈 후여서 그런지, 아버지의 못된 성품이 밖으로까지 새어나온 건지 몰라도 더러운 짐승 새끼만 남아 있었다.
아버지를 없애고 동생들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기 위해서 나는 아버지가 매일 드시는 한약을 달여 드리기를 자청했다. 새까맣게 끓어오르는 물 속에 가루를 녹였다. 오랜 시간 기다려 알아낸 것이었다. 우리를 깨지 못하게 만들고, 면역력까지 낮추었던 원인. 코코아였다. 정확히는 코코아 가루에 섞여 있던 수면 유도제였다. 한참이 지나도 생생한 밤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이제는 다 커서 일을 하러 나간 그 때의 남자아이, 내 또다른 동생이 그 밤 앓았던 이유는 내 코코아까지 다 먹어버려서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코코아에 들어있는 수면제의 양도 많아진다는 걸 알아챘을 때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했던 것 같다.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필요한 수면제의 양은 얼마일까. 확실히 많은 양의 약을 숨기기에 다디단 코코아보다는 쓴 한약이 좋았다. 다 아버지가 약을 달여 드시는 덕분이었다. 아이러니했다.
수면제를 점점 늘려 나갈수록 아버지는 피폐해졌다. 계속해서 방 안에 누워만 있는 일이 허다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약해진 몸이라도 짐승 버러지는 맞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약해진 몸을 가지고도 또 더러운 손을 뻗어댔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짐승 새끼, 길러 준 나름의 예의랍시고 천천히 티나지 않게 죽이려고 했는데 잘못 생각한 것 같았다. 아직 여물지도 못한 어린 몸을 쓰다듬던 손을 발견하고 달려가 떼어놓으려고 했을 때 그 아이는 옛날의 내 동생과 달리 먼저 손을 콱 깨물었다. 이 년이! 화가 난 남자가 발을 들어 아이의 명치를 찼다. 말라 빠진 몸이 종이인형처럼 날아가 선반 모서리에 부딪히고 나동그라졌다. 선반 위에 올려져 있던 길다란 쇠파이프가 아이의 위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면서, 나는 예전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과거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탕약을 달이던 사기 주전자를 그 짐승의 머리통에 대고 깨었다. 주전자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쓴내가 진동을 했다. 움직이지 않는 몸뚱아리에 쏟아진 뜨거운 탕약에서 김이 났다.
일 년이 지났는데도 눈을 치우던 그 날처럼 창 밖으로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쓸쓸했다. 이제 법적으로나마 나를 보호하던 울타리도 없고, 내내 일종의 신념처럼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책임감도 없었다. 몇 년 전의 여동생처럼, 부릅뜬 눈으로 눈물을 흘리는 작은 새 동생을 끌어안았다. 오빠가 구해 줄게. 다른 데로 가자. 여기 말고. 이미 굳어져서 눈도 감지 못한 채 머리에서 쏟아진 피로 범벅이 된 작고 하얀 얼굴을 마구 쓰다듬으며 울었다. 이제는 눈물을 참을 힘이 없었다. 나는 그 정도로 강하지 못했다.
보육원을 탈출하고 가게 된 곳은 소년원이었지만 나는 그 끔찍한 기억으로 가득한 장소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기뻤다. 쫓겨나듯 끌려온 곳에서 행복을 느꼈다. 누구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쓰레기다, 내 자신을 책망하면서도 가슴이 뻥 뚫린 듯한 해방감은 어찌할 수 없었다. 나는 이기적이고 비겁하니까. 그래도 습관이란 게 무섭긴 한 모양이었다. 소년원에 있는 아이들이 전부 나와 똑같다는 걸 알고 나서 나도 모르는 사이 다시 시작되는 악몽에 제 발로 기어들어가게 된 것은. 정말이지 운명의 장난 같았다.
나는 역시 비열한 사람이었는지, 이렇게라도 한 번 더 기회를 얻고 싶었다. 이제는 용서받고 싶었다. 책임감의 굴레 속에서 다람쥐처럼 발을 놀리며 나는 나를 포기하기를 선택했다. 이 중 가장 더러운 죄인인 나 말고, 다른 애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는.
문태일을 만났다. 소년원에서 같은 방을 쓰던 조선족이 말했다.
여기가 싫으면 중국으로 갈래요? 거기도 뭐 쓰레기같은 건 똑같지만, 형한테는 여기가 엄청 지옥같은 것 같던데.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꼬마였다. 이름은 런쥔이라고 했다. 문태일, 이라는 한국인에게 반강제로 한국어를 배웠다고 했다. 런쥔은 황인준이라는 가명을 썼다. 아니, 이제 본명이었다. 나에게 한국이 지옥같은 만큼 그 아이에게 중국은 지옥이었다. 그래서 런쥔은 한국어를 배웠다. 문태일은 말을 똑바로 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와야 할 거라고 매일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며 런쥔을 다그쳤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놀랍게도 어느 검문에도 걸리지 않고 런쥔을 황인준이라는 한국인으로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소년원을 나가도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은 전부 런쥔이 살던 곳으로 떠나고 싶어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 아이는 속삭였다.
하, 거기라고 다를 거 없다니까. 그래도 가고 싶으면, 매년 여름에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열리는 밤시장을 찾아가세요. 시장 마지막 날에, 도장 파는 곳으로 가요. 문태일을 찾아왔다고 하면 괜찮을 거예요.
나이가 어려 비교적 처벌 기간이 짧았던 우리들은 소년원을 빠져나오자마자 밤시장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길거리 아무 데에서나 누워 자고 아무거나 주워 먹었다. 잘만 훔쳐 먹던 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조그만 잘못으로 또 잡혀들어갈 순 없었다. 우리에겐 이미 기록이 있었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범죄에 훨씬 불리하다는 의미였다. 그걸 알고 있던 아이들은 독하게도 추운 겨울부터 여름이 되기까지를 길바닥에서 버텨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 차이나타운의 도장 가게에서 처음 만난 문태일은 얼굴이 반질반질한 소년이었다. 기껏해야 나보다 한두 살 많아 보였지만 매끈한 얼굴에 띄운 미소는 나와 달리 많이 부딪혀 본 자의 여유 같은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바다를 건너 연길에 모였다. 후회는 없었다. 지지부진한 인생의 2막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
오늘은 얘기가 많이 어둡죠 독자님들ㅠㅠ
이제 큐앤에이 답변 들고 올게요! 더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얼렁 남겨 주세요ㅋㅋㅋ
빨리 온다고 해놓고 생각보다 늦어졌네요 죄송함댜,,,ㅜㅜ 지금이 딱 바쁜 시즌이자나여 다들 아시져 흐흡...
죗옹해요... 다들 지치기 전에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요! 허허
잘생긴 태용이 보고 푸시길...하트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