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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라멜 마끼아또 레귤러로 주세요. 포장 말고요."
종업원이 커피를 내리고 거품을 만들며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태일은 옆 테이블 빈의자에 몸을 기댔다. 외근이 끝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른 카페는 아직
점심시간이 되기 전이라 그런지 손님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한가한 카페에 앉아있는것은 대학교 졸업 이후 오래간만이라 좀 더 여유를 즐기고 싶어서 커피는 포장하지 말
고 그냥 마시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곧 점심시간이라서 들어간다 한들 또 나와야 했으니 이왕 나온 김에 볼일 다 보고 들어가도 될 성 싶었다.
"지훈이한테 전화나 해봐야지."
다른 곳보다 이른 출근 시간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해야하는 태일과는 달리 매일 아침 지훈은 마냥 여유로웠다. 그가 무슨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 입장이야 지훈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딱히 물어본적도 없었다. 서로의 직업을 묻지도, 말하지도 않는 것. 둘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DIA
는 보안이 철저했다. 아무래도 국가의 중대한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반 마피아 수사기관이고 최근에는 규모가 이 전보다 커졌기 때문에 정보가 외부에 유출되는 것을 막는
것과 맞먹을 정도로 조직원들의 입단속이 중요했다. 제법 복잡한 정보조회 절차를 걸쳐 뽑힌, 하루 24시간 감시가 붙는 중앙 본부의 인사팀외에 일반 조직원들은 자신과
같은 지부의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누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보안이 까다롭고 복잡했다. 때문에 가족은 물론 당장에 같이 살고 있는 동거인에게도
태일은 DIA의 'D'자도 꺼내지 않고 그냥 평범한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으로 비춰지도록 노력하는 중이었다. 다행히 그게 먹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언제 들킬지 모를 불안
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이 위험한 줄타기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이..─일, 이태일?……
응?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디선가 제 이름이 들려왔다. 구부렸던 허리를 쭉 펴고 주변을 살피던 태일에게 주문하신 캬라멜 마끼아또 나왔습니다. 하며 점원이 직접
테이블로 왔다. 원래는 직접 가서 받아와야 하는 데 가져가란 말을 못 들은 모양이었다. 태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잔을 받아들고 애매하게 웃어보였다.
"죄송해요. 잠시 딴 생각을 좀 하느라..."
"괜찮아요, 아직 한가하니까. ...그런데 손님."
"네?"
"통화 연결이 된것 같은데."
"아...!"
종업원의 말을 듣고 허겁지겁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핸드폰을 집었다.
맙소사. 아까 전에 통화 아이콘을 누를까 말까 고민 하다가 내려놓을 때 액정에 실수로 손가락이 닿았던 모양이었다. 벌써 01: 03 을 넘어가고 있는 통화시간을 보며 태
일은 서둘러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대었다.
"어, 어ㅡ 지훈!!!"
[왜 이제야 받아.]
"아 그게, 잠시 딴생각을 좀, ...하느라..."
[...무슨 생각을 했길래 먼저 전화한것도 까먹냐.]
"별거 아냐! 신경 쓰지마!"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회사에 있을 시간 아니야?]
"어 맞아. 그런데 그, 잠깐 밖에 나왔어."
지훈과 통화하면서 태일은 뒷머리를 만지작 거렸다. 어렸을 때부터 당황하건 난처한 상황이 오면 저도 모르게 머리로 손이 올라가곤 했다. 무슨 애도 아니면서 그런 버릇
이 있냐며 지훈에게 고치라는 말은 몇번 들었지만 마냥 쉽게 고쳐지지 않아서 습관버리기에 대한 의견은 현재 소강상태였다.
"아 저기 지훈아!"
[응.]
"혹시 시간되면 잠깐 나올래? 점심 같이 먹자."
[...지금?]
"아... 곤란한가? 그럼 별 수 없고..."
[아니. 나갈게. 지금 어디야?]
"정말? 안 바빠?"
[점심 같이 할 시간은 있어. 그건 그렇고 어디냐니까.]
지훈에게 대충 장소를 일러주고 전화를 끊은 태일의 얼굴에 함박 웃음이 걸렸다. 아, 지훈이랑 같이 점심먹는게 도대체 얼마만이냐. 물론 주말에는 각자 특별한 약속이 없
으면 대부분 집에서 시켜먹건 간단히 만들어 먹건 했지만 평일에 만나서 먹는 것은 정말 대학교 다닐때 가끔 만난 이후로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갑자기 불쑥 꺼
낸 이야기라서 안 될줄 알았는데 선뜻 그에 응해준 지훈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나저나 이 근처 맛있는 음식점이 어디더라. 분명 이것도 고민이지만 아까전에 했던 무거
운 고민과는 사뭇 다른 가볍고 즐거운 느낌이었다. 지훈이 좋아하는 스테이크? 아니면 오랜만에 파스타?
"여기 계산이요. 잘 먹었습니다!!"
**
"기분 좋아보이네."
"..."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걸려온 점심 먹자는 태일과의 통화를 마친 피오의 뒤에서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전혀 비아냥 거리는 투도,
상대를 조롱하는 투도 아닌 그의 평탄한 어조가 이상하게도 귀에 자꾸 거슬렸지만, 무시하고 가려던 그의 발목을 다시금 지코가 붙잡았다.
"애인이라도 만나?"
이번엔 명백한 비아냥이었다. 결국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선 피오의 눈가 주변이 그늘져있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을 보였음에도 마치 관찰이라도 하는 것 처럼 빤히 그
의 얼굴을 바라보던 지코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입가를 비틀었다.
"언제부터 내 일에 관심을 보였지?"
"좀 됐는데."
"...그딴 관심 필요없으니까 꺼져."
평소와 달리 구는 지코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태일을 만나러 가는 길에 굳이 싸우고 싶지 않아 그냥 먼저 돌아섰다. 아까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 넣으면서 보니 차키가 없
어서 가는 길에 집무실에 들러서 라이터와 같이 챙겨와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좀 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약속시간보다 항상 먼저 나와있는 녀석이니 아마 지금쯤 도
착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자신도 빨리 가야 했다. 이것은 태일과 알고 지내게 된 이후 부터 생긴 일종의 버릇이었다. 평생 남을 배
려하거나 크게 의식해본적 없던 피오는 이상하게도 그와 관련된 일이면 누구보다 먼저 반응하고 뒤에서 본인보다 더 예민하게 굴었다. 태일이 이 사실을 알면 한편으로는
놀라면서 내심 좋아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피오는 누구에게도 말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사실을 안다고 한들 뭐가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
"감추려고 들수록 더 알고 싶어지는 법이야."
피오가 코너를 돌아 사라지자 지코 혼자 남은 복도에는 정적이 돌았다. 그 고요한 공간안에서 가만히 벽에 기대 복도에 난 창으로 바깥풍경을 바라보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빈 복도에 듣기좋은 중저음이 작게 울렸다.
그러니까 간수 잘해.
...니 애인 이태일.
그의 입가에는 아직 희미한 미소가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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