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필터링으로 인해 제목이 두개인점 양해부탁드립니다
원제는 뭘 봐, 병신아가 맞습니다
05. 뭘 봐, 병신아
w. Lafleur
" 할머니, 저 가요 "
'그려, 늙은이 생각나면 다음에 한번 또와' 할머니는 몸이 불편해 나가지 못해 미안하다며 방문가에 앉아 힘없이 잘가라며 손짓하셨다. 나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았던 나이키 운동화를 대충 구겨신고 뒷축을 찍찍 끌며 도망치듯이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병신은 아까 김씨아저씨네 심부름을 간다고 한 뒤로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나를 피하는 것이였으리라. 그런 병신의 마음을 잘 알기에 나는 다소 착찹한 심정으로 그곳에서 나왔다.
" 아 맞다.. "
올라갈때보다 내려갈때의 발걸음은 조금 가벼울줄 알았는데 마음이 무거워서 그런지 내려오는 발걸음도 결코 가볍지 못했다. 할머니의 말을 들은 뒤로 발에 돌덩이를 달아놓은듯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고, 발목이 잡혀 걸음이 느려지는 기분이였다. 그래서 잠시 쉬고 갈 요량으로 반쯤 내려간 계단 중턱에 앉아 습관처럼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려던 참이였다. 아, 근데 핸드폰이 없다. 아까 할머니가 전화한통만 쓰시겠다고 하는바람에( 병신의 집엔 전화도 없는듯 했다 ) 폰을 잠깐 꺼냈었는데 깜빡하고 그곳에 두고온 모양이였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여졌다. 병신에게 학교를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마음 한켠에선 병신이 안 올것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없이 잠시 쉬려던 몸을 일으켜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되돌아 밟아가는 발걸음은 지독히도 무거웠다.
" ......올꺼지 "
좁은 모퉁이를 돌면 바로 병신의 집이 있을것이다. 왠지 그 모퉁이를 도는 발걸음이 망설여져서 괜히 애꿏은 운동화 앞코를 툭툭차며 벽에 비스듬히 기대있는데 파란대문이 끼익-열리는 녹슨소리와 함께 익숙한 두개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가 났다.
" 응.. 갈께.. "
" 그래, 내일 저녁에 보자 "
씨발. 목소리를 듣자 절로 욕부터 나왔다. 내 귀가 병신이 아니라면 저건 광무새끼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집나갔다는 새끼가 왜 여기있는건데? 그리고 니네둘이 또 무슨 비밀을 만드는건데.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야 병신, 넌 내가 학교오래도 안온다던 녀석이 광무녀석 한마디에 어딜 그렇게 제깍 가겠다는건데? 너 못가 씨발.
멈칫. 울컥하여 한걸음 앞으로 내딛으려던 발을 잠시 멈칫했다. 내가 지금 멈춘건 광무녀석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무언가 알수없는 묘한 끌림이 나를 제지했다. 난 결국 이런놈이였나. 내딛으려던 발을 다시 뒤로 숨기고 돌담밑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쥐뜯었다. 그래, 결국 나도 똑같은 놈이였다. 가만히 무릎에 고개를 묻고 귀를 쫑끗 세우니 흙먼지를 일으키며 타박타박 멀어지는 광무녀석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인정하기 싫지만 한광무는 존나 대단한 새끼일지도 모른다. 씨발 존심상해
" ..어? "
" 뭐 두고가서 가지러 왔어.. "
" ..으응.. "
한광무 새끼가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쪼그려앉은 다리가 저려올 쯤에야 나는 돌담을 짚고 일어나 힘없이 파란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역시나 끼익-하는 녹슬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마루라고도 할수없는 좁은 공간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병신과 시선이 마주쳤다. 병신은 멍하니 있던 시선에 초점을 불어넣자 이내 보이는 내 인영에 깜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푹 숙였고 나는 괜한 죄책감에 말끝을 흐렸다.
" ..뭐..뭔데? 내가 갖다줄께.. "
" ..어? 아니야, 됐어 "
병신은 간줄 알았던 내가 들어오자 안절부절 못하며 또다시 손을 꼼지락 댔다. 그러다가 내가 몇걸음 앞으로 성큼 내딛자 더욱 안절부절 못하는지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난리도 아니였다. 내가 자기를 잡아먹을줄 아나보다. 더욱 앞으로 다가가자 병신은 불쑥 자신이 갖다 주겠다며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고, 워낙 말수가 없는 병신이라 말을 걸거라곤 예상도 못했던 나는 오히려 더욱 당황하여 찐따같이 말을 흐렸다. 그러자 풀이죽은 목소리로 '어..'라고 짧게 대답한 병신은 나와 최대한의 거리를 유지하려는듯 그 비좁은 마루의 더욱 구석탱이로 숨어들었다. 나는 아까와같이 운동화를 대충 벗어두고 방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찾아왔다. 이내 핸드폰을 찾고 방문 밖으로 나오니 병신이 아까보다 좁은 구석탱이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불안한 눈빛으로.
" 뭘 그렇게 봐 "
" 그..그냥.. "
마루에서 걸음을 디뎌 좀더 병신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병신은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또다시 불안해 했지만 더이상 옮길 자리가 없어 그자리에 딱딱하게 굳은채로 망부석처럼 앉아있었다. 더이상 다가갈 마음이 없던 나는 어느정도 일정거리를 유지한채 병신의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 여기 오면 하느님 보일줄 알았는데 "
" 하..하느님? "
" 농담이야 병신아 "
피식 웃어보이며 병신을 쳐다보자 나를 곁눈질로 힐끔힐끔 쳐다보던 병신은 내 입꼬리에 걸린 미소를 보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다 이내 자기도 입꼬리에 미소를 슬쩍 지어보인다. 그 모습이 병신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손을 뻗어 윤기나는 갈색 머리칼을 만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랑 몸이 따로논다. 어차피 병신도 내가 만지는걸 싫어할 것이란 생각에 슬그머니 손을 거뒀다.
" 내일 아무데도 안가지 "
" 어? 그..그냥.. "
" 학교 진짜 안올꺼냐 "
" .................... "
묵묵부답.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였다. 한숨을 푸욱 쉬고 오래된 나무를 지지대 삼아 팔로 쭉 밀어 상체를 일으켰다. 내일 학교안나오는 이유가 한광무새끼 때문이냐고 묻고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광무새끼는 나보다 괜찮은 새끼기 때문이다. 빨리 집에 돌아가서 곰곰히 고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신이 학교를 나오던 말던, 왠지 그건 오세훈의 권한이 아니라는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파란대문을 열고 병신의 집을 나왔다.
*
" 오늘 야자 제낄꺼지? "
간만에 만난 병신생각에, 더불어 간만에 본 한광무새끼의 생각이 얽히고 얽혀 가뜩이나 복잡한것을 싫어하는 내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오랫만에 머리를 써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지끈 거려 대가리에 빵꾸가 뚫릴 지경이였다. 힘없이 책상위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있는데 백현이새끼가 와서 툭툭치며 야자를 뺄꺼냐고 묻는다. 안그래도 아파서 조퇴할꺼라고 말을 했더니 변백현 이새끼는 잘됐다며 '오늘 갈꺼지?'라고 묻는다. 내가 아픈게 잘된거냐 씹새끼야. 그나저나 가긴 어딜가.
" 몰라? "
" 모르니까 물어보지 미친놈아 "
" 오늘 광무새끼가 한턱 쏜댔는데 "
" ..그새끼 왔냐? "
" 어, 미친새끼 가출하더니 일치고 온거같던데 "
하긴 어제 봤으니 왔냐고 묻는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어딜가냐고 물어봤더니 광무새끼가 한턱 쏜단다. 그것도 사고를 치고와서 한턱 쏘는거란다. 정신나간새끼
" 그새끼 사고치는거 한두번이냐. 새삼스럽게 왠 지랄 "
" 야야, 이번엔 완전 급이다르다니까? "
" 양아치 새끼가 거기서 거기지 "
" 너 진짜 모르냐? 그새끼 이번에 생활 들어갔잖아 "
조폭? 미친새끼. 이새끼가 완전 인생망하는 고속도로위에 올라섰구만. 이젠 양아치 짓으로도 모자란거냐. 혀를 끌끌차며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뒤로 등을 쭉 빼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하긴 나도 힘좀 꽤나 쓴다는 형님들한테 자기네 파에 들어오라는 권유받은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개념없는 새끼도 아니고 인생 조지고 싶어 환장한 새끼도 아니라 거절했었다. 물론 싸가지없게 ' 내가 대가리에 총맞았냐? ' 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바람에 딱 죽기 직전까지 두드려 맞긴 했지만.
" 아 씨발, 부럽다 "
" 부럽냐? 병신새끼 "
" 뒤질래? 아맞다 그나저나 병신은 왜 학교 안나오냐 "
변백현새끼는 나의 병신이란 한마디에 병신이 떠오른듯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간만에 병신을 찾았다. 학교안나온지 일주일 넘었다 새끼야. 아마 변백현 새끼는 모르겠지, 병신이 안나오면 다른 조잡한 새끼들을 괴롭히면 그만이니까. 뭐라고 대꾸해주고픈 마음도 없어 아무말없이 다시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모든게 귀찮다.
클럽 Panic 안. 고막을 찢을듯한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한눈에 보기에도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야살스런 옷을 입고 넘쳐나는 사람들 속에 각각의 남녀가 리드미컬하게 서로의 신체를 맞대고 끈적하게 부비적 대고 있었다. 이런분위기는 완전사절이다. 아 씨발 존나 오기 싫었는데 학교가 끝나자마자 빠른걸음으로 나가는 나를 붙잡고 ' 광무새끼가 너 꼭 데려오랬어 ' 라며 무릎을 꿇고 통사정을 하는 변백현 새끼때문에 하는 수 없이 오만가지 상을 다 찡그리며 이곳엘 온것이다.변백현 새끼는 작정을 하고 온건지 삐끼마냥 정장을 쫙 뺴입고 왔다.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빈티지 스타일로 걸쳐입고온 나완 다르게. 사람들을 헤치고 스테이지를 가로질러 테이블로 가자 한쪽에서 거만스런 자세로 술을 퍼마시고 있는 광무새끼가 시야에 보였다.
" 오세훈, 왔네? "
" 생활 들어갔다며? "
" 아, 그거? 내주먹이 꽤 쓸만한건지 형님들이 부르시더라? "
" 삽질하고 자빠졌네 "
분수도 모르고 깝치긴. 털썩 쇼파에 주저앉아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한까치를 빼어물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 짧은 한마디에 옆자리에 앉아 광무새끼와 내 눈치를 보던 변백현새끼가 자켓 안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내 재깍 불을 붙여준다. 그 모습을 보던 광무새끼는 픽-하고 조소를 말아올렸다.
" 변백현, 나없는 사이에 오세훈 시다바리됐냐? 존나 보기 좋다 "
" 어? 아니야, 야 시다바리는 무슨.. "
변백현새끼는 난감한듯이 불을붙여주던 손을 슬그머니 거둬들고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 얘가 내 시다바리냐? "
좆같은 새끼. 입술사이 물려져 있던 담배를 길게 한모금 마시고 뿌연 연기를 후우 내뱉으며 손가락 사이에 있던 담배를 튕겨내듯 재떨이에 비벼껐다. 순간 클럽안의 곡이 부드러운 노래로 바뀌면서 우리사이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신경쓰지 않는다는듯 즐겁게 웃고 떠들며 개념없이 놀던 광무새끼들 친구들이 긴장탄 눈빛으로 우리를 번갈아본다.
" 오세훈, 많이 컸다? "
" 내가 원래 너보다 컸어. 좆만한 새끼야 "
" 너 그때 옥상에서 안쳐맞아서 니가 아주 쳐맞고 싶어서 발악을 하는구나 "
'그러게나 말이다' 차갑게 웃어보이며 눈앞에 있던 병을 집어들어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광무새끼는 똥씹은 표정을 하고 여유만만한 나의 표정을 응시했다. 저새끼는 지금 성질이 날대로 났다는 얘기다. 씨발, 그래 한판 뜨자.
" 뭘 야려 "
" 씨발, 너 나와 "
" 여기서 덤벼. 왜, 존나 깨질까봐 걱정되냐? "
입술을 적시던 술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미련없이 쇼파에서 일어났다.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변백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괜찮아 임마'라고 말하며 테이블에서 한걸음씩 멀어지던 참이였다. 무언가 와장창-하는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니 이미 테이블은 뒤엎어져 있었고 분에 못이겨 테이블을 뒤엎은 것으로 보이는 광무새끼의 손에는 내가 아까 반쯤 마시다 놔둔 갈색 맥주병이 날카롭게 깨어져 광무새끼의 손에 들려져 있었다. 역시 뭘해도 넌 미친놈.
" 과..광무야.. "
그래 이판사판이다 젠장. 어차피 한번은 부딪혀야 했었을 일이라 깨어진 병맥주를 들고 내앞으로 다가오는 광무새끼를 팔장을 끼고 느긋한 포즈로 쳐다보고 있었다. 니까짓놈이 해봤자지. 가까이 다가왔을때 어퍼컷이나 한대 날려서 개쪽을 줄생각으로 그놈을 야리고 있었는데 광무새끼가 갑자기 그자리에 우뚝 멈춰서는게 아니겠는가? 뭔 어이없는 시츄에이션인가 싶어 그놈을 바라보니 빵빵하게 틀어진 소음들 속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싶어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의 병신이 서있었다.
" 왜..왜그래.. "
병신은 흰 니트에 청바지를 입은 아주 수수한 모습이였다. 그럼에도 이차림으로 클럽을 들어 올 수 있었던건 끈적한 조명아래서 붉게 타오르는 입술과, 왠일로 쓰지않은 진한 뿔테를 벗어던진 눈동자에서 볼수 있는 그윽한 반짝임에 입구를 지키던 소위 물관리 하던 놈들이 이정도는 일급수라 판단 됐기 때문이다. 이런 월척을 안들여보내주면 병신이지.
" 과..광무야.. 이거.. 내려놓구.. 응..? "
병신은 온통 한광무새끼의 손에 들린 맥주병에만 시선을 쏟는건지 몸을 돌려 바보같이 헤-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나는 안보이나보다. 그나저나 이 병신새끼, 이렇게 보니까 더 예쁘다. 나긋거리는 몸짓으로 ( 내눈엔 그렇게 보인다 ) 광무새끼에게 한발한발 다가가 떨리는 두손으로 반쯤깨어진 맥주병을 꼬옥 쥐고 자신의 품으로 뺏는 병신의 몸짓이 나를 유혹하는 고도의 춤사위라도 되는마냥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물론 한광무 새끼도 마찬가지로. 병신이란 복병의 등장으로 우리의 싸움의 전초전은 이렇게 싱겁게 끝나버렸다.
" ...이따가 보자 "
미친개 한광무새끼가 순식간에 완전히 순한양이되어 병신에게 유유히 끌려가며 나에게 던진 한마디. 바라던 바다 씹새야. 아니꼬운 표정으로 어느새 습관처럼 물고있던 담배를 픽 던져버리고 우리가 지지고 볶고 하는사이, 엎어버린 테이블은 종업원들에게 맡기고 더욱 구석으로 밀려난 테이블로 자리를 옮긴 일행을 따라 그곳에 몸을 앉혔다. 조금은 느릿한 걸음으로 일행을 따라가니 이미 분위기에 흠뻑취한 그들은 광무새끼의 비위나 맞춰줄겸 스테이지로 나간건지 테이블엔 나와 병신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 ...왔네 "
" ..어..어? 아..안녕.. "
답답하게 푹 눌러쓰고있던 모자를 벗어제끼고 좀더 병신의 옆으로 가까이 가자 그제서야 날 발견한 병신은 조금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나는 잔뜩 눌린 머리를 손으로 대충 헝크러뜨리고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병신에게 인사를 건넸다.
" 강무랑.. 싸운거야..? "
아직 서빙이 되기 전인지 테이블엔 과일안주쪼가리 몇개밖에 있지 않았다. 손을 뻗어 아삭거리는 사과를 하나 집어들고 입에 넣었다. 아삭거리는 사과향이 입안 가득히 퍼져나갔다. 갑자기 이 향을 병신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테이블엔 병신과 나, 둘뿐이였다.
" 아니 "
" ..아.. 다행이다.. "
사실 병신이 뭐라고 물어봤는지 잘 생각도 안났다. 머릿속엔 귀를 통해 들어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온갖 잡생각이 가득했으니 병신의 말을 듣지 못한건 당연할 수 도있다. 게다가 병신은 아직까지도 찐따처럼 말을 흐지부지하게 내뱉으니 말이다. 아, 근데 끝에말은 들은것 같다. '다행이다'라고. 뭐가 다행인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아무말 없이 스테이지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화려한 조명앞에 드러난 병신의 얼굴은 더욱 희고 고왔으며, 아찔하도록 섹시했다. 의도한건지, 아님 저 병신이 그냥 입고온건지 모르겠지만 평범한 흰 니트마저도 관능적으로 차려입고왔다. 가늘고 흰 목에 키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테이블에서 손가락을 튕기며 리듬을타는 고운 손가락을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손을 뻗어 병신의 손 위에 겹쳐놓았다. 리드미컬하게 테이블위에서 튕겨내던 손가락은 갑자기 겹쳐오는 낯선이의 제지에 잠시 리듬을 멈추더니, 이내 역동적인 튕김으로 짓눌려있던 손을 쓰윽 빼낸다. 그리곤 겹쳐진 내 온기가 무색하게끔 뺀 손을 밉살스럽게 꼼지락거린다. 뻘쭘한 마음에 테이블 위에 놓여져있던 과일쪼가리를 집어들었다.
" 미..미안.. "
괜히 못들은척. 다시 모자를 푹 뒤집어 썼다. 아까보다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쓰고, 몸을 더 깊숙히 쇼파에 파묻었다. 나의 행동에 병신은 더욱 당황한듯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면서도 결코 나에게 손을 내민다거나, 다가오는 일은 없었다. 그런 병신이 짜증이 났다. 여전히 입안가득 퍼져있는 사과향이 문득 떠올랐다. 고개를 들어 병신을 봤다.
" ..으..읍..ㅇ.. "
나도 왜그랬는진 모르겠다. 다만 이 기분좋은 사과의 아삭거림을 병신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병신은 도통 생각이 없는건지 입을 꽉 다문채 나의 호의를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버둥거리며 나를 밀쳐내려 한다. 병신의 손목을 꽉 잡았다. 한손안에 들어온 팔목이 생각보다 가늘었다. 그렇게 병신의 하나하나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아직은 이런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
" 오세훈!! 이 개새끼야!! "
분명 아까까지는 달콤한 사과향이 났는데, 이상하게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면서 입안에서 피비린내가 난다. 더불어 따뜻하고 말랑말랑했던 병신의 온기도 사라져버렸다. 고개를 돌려 바닥에 침을 찍 뱉었다. 침을 뱉고 고개를 드니 눈앞에서 씩씩거리는 한마리의 미친개가 보였다. 아 한광무 저 씨발새끼는 도통 도움이 안돼. 그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난 황소마냥 씩씩거리고 있는 광무새끼에게 주먹을 날렸다. 근데 이새끼도 단단히 빡이 돈 모양인지 왠만한 주먹질에는 꿈쩍도 하지않는다. 아니, 잠시 비실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성난 맹수처럼 달려든다.
" ..그..그만해.. "
시끄럽고 빠른비트의 리듬과, 클럽안의 들뜬 열기로 인하여 우리의 엎치락 뒤치락거리는 주먹다짐은 사람들의 시선밖에서 이루어 졌고, 이놈이나 나나 잔뜩 꼴이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눈에 뵈는게 없었다. 이새끼는 또 테이블을 엎어버리려 지랄이였고,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과일안주를 쏟아부으려 지랄이였다.
" ..그만하라고!!!!... "'
또다시 음악이 바뀌면서 알수없는 정적과 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 틈에서 간만에 청명한 병신의 목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병신은 예상외로 하이톤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초점은 그게 아니였지만 내 주된 관심사는 그것이였다. 서로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는 우리의 눈앞에 작은 주먹을 꼭 말아쥐고 입술을 꽉 깨무는 병신의 모습이 보였다.
" ..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
" ..그만 해... "
" 그만해? 하.. 너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냐? "
" ................. "
" 미친년, 이게 오냐오냐했더니 눈에 뵈는게 없나봐 "
단단하게 쥐고있던 나의 멱살을 느슨하게 푼 한광무새끼는 그자리에서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있는 병신에게 저벅저벅 걸어가 이번엔 병신의 멱살을 단단하게 잡으며 언성을 높혔다.
" 놔라 "
" 하.. 너 이새끼 때문이냐? "
" 그.. 그런거 아니야.. "
" 더러운년 "
" 놓으라고 했다 "
" 오세훈, 니가 뭔갈 착각하는 모양인데. 니가 무슨권리로? "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멱살을 쥐고있는 광무새끼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병신의 멱살을 놓으라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나의 도발이 독이 된건지 그 미친새끼는 오히려 병신의 멱살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괴로운듯 바둥거리는 병신의 시야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병신을 처음 가까이에서 봤던 그날과 같은 감정을 느꼈다.
" 놓으라고 씨발새끼야!!! "
" ..너 얘 좋아하냐? "
" ..씨발 "
나는 또 그날처럼 거칠게 광무새끼의 손을 탁 쳐냈다. 다소 오버스러운 나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했던 그때와는 달리 이미 눈치를 깠다는 듯 자신감에 넘치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존나 거만하게 묻는다. 이새끼 좋아하냐고. 광무새끼의 말에 놀란쪽은 오히려 병신이였다. 이 병신새끼는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나보다. 그러니까 니가 병신이지. 이런 병신을 좋아하는 나도 병신인가보다.
" 잘들어, 오세훈 "
" ..................... "
" 이새끼는 나아니면 안돼 "
" 헛소리 하지마 미친ㅅ... "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병신의 뒷 머리칼을 부여잡고 무식하게 입술을 부딪히는 한광무새끼. 무슨일인가 싶어 멍한 시선으로 둘을 바라봤다. 그리고 사태파악이 됐다. 또다시 양아치처럼 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갔다. 아니, 나갈 뻔 했다. 근데 왜 안나갔냐고? 씨발 저 병신새끼때문에 손이 안나갔다. 아까와는 판이하게 다른 저 반응. 내가 키스할땐 내 품에 안겨서 온갖 지랄을 다하더니, 광무새끼가 키스하니까 뒷머리가 한움큼 낚여서도 뭐가 좋은지 측은한 개새끼마냥 눈까지 꼭 감고 얌전히 있는게 아니겠는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비참한 결과가 눈앞에서 나타났다. 아우 씨발!!!!! 옆에있던 테이블을 발로 걷어차고 벽에 주먹질도 해보고 온갖 발악을 해보았지만 분노가 멈추지 않았다. 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씩씩거리자 광무새끼의 눈이 나한테 말하고 있었다.
' 넌 나한테 안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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