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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 위에 선 성열이 눈을 감았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려왔다. 내려오라는 아우성과 함께 다가오는 밑의 풍경이 아찔했지만,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었다. 성열은 이제 이 더러운 인생의 종점을 찍을 준비를 서서히 하고 있었다. 성종에게 끔찍한 모습을 보여줬던 것은 더 이상 성열을 견디지 못하게 했다. 그가 보지 못하게 얼굴을 가렸더라면, 오지 못하게 했더라면! 수치심에 성열은 결국 완벽하게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끝맺음을 내고 말았다. 이제 완전히 끝이라는 생각을 하며, 막 앞으로 몸을 날리려던 순간 귓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의 첫 모습은 아름다웠다. "
" 그러나 나는 그의 겉모습만 보고 아름답다 여긴 것이 아니라, 단지 그라서, 그였기 때문에 아름답다 생각했을 뿐이다. "
명수였다.
그가 읊은 구절은 엘의 처녀작 [찬가론]의 일부분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 중 하나. 명수는 괴악했던 첫 만남 이후로 가끔씩 저에게 말을 해주곤 했다. 고립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슬픈 자는 타인을 슬프게 한다. 라는 생택쥐페리의 명언부터 시인 기형도와 안도현의 시까지. 그 수준이 제법 높아 가끔 성열은 어째서 명수의 성적이 그저 그럴까 하는 의구심마저 생기곤 했다. 그러나 그중에서 작가 '엘'은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성열은 다른 작가들은 잘 알지 못했지만 엘의 작품은 그의 처녀작부터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열광 팬이었다. 그의 문체는 투박했지만 그만큼 진정성이 묻어났다. 성열은 우연히 서점에서 집었던 그 책의 견본품을 보고 그를 처음 접했는데, 보자마자 펑펑 울어버렸던 과거-그 옆에는 부끄러웠지만 사람이 있었다-까지 있을 정도로 그의 팬이었다. 그는 항상 책 속의 주인공을 Y라고 했다. Y에 대한 찬미론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책에서 Y는 평화롭기도 하고, 이따금 우울하기도 하지만 항상 생동감을 되찾는 역할이다.
그러나 작가의 심리를 투영한 듯한 조연 M은 항상 불행하다. 그저 Y를 사랑하다가 비참하게 스러지는 역할이다. Y는 아름답지만 M은 철저히 뭉개지고 기괴해져 있다. 그러나 성열은 오히려 그런 M에게 더 마음이 갔다. M을 보면 항상 애정에 몹시 굶주려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M은 항상 부르짖는다. Y를 정말, 간절히, 너무나도 사랑하노라고.
[나는 그를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만큼 그의 애정은 모호했지만 그래서, 더 M이 사랑스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애처롭지만 그만큼 그는 진심이다. M은 몹시도 아름답다. 항상 찬란하게 묘사되는 Y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명수는 그 말을 끝으로 성열과 같이 난간에 올라섰다.
성열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가 난간에 올라서 있는 것보다 명수가 올라왔다는 사실이 더욱 두렵다. 명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성열의 가슴은 말 그대로 갈갈이 찢겨지는 것 같았다. 휘둥그레 뜨인 눈빛에도 별 말을 하지 않은 명수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그가 말을 계속 이었다.
" 죽으려고? "
" … 응. "
물음에 성열은 수긍했다. 실은 명수를 내려오게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명수는 말했다. 그럼 같이 죽을까? 성열은 고개를 미친듯이 가로저었다. 안된다고 부정하는 모습에 명수의 표정이 조금 굳은 것도 같았지만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명수가 싫음 말고, 라며 담배 한 대를 물어 불을 붙였다. 진한 니코틴 향이 성열에게로 풍겨왔다.
" 왜 죽으려고 하는 건데? "
"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으니까. "
그 말을 하자 명수는 잠시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 다시 물었다. 내가 싫어? 성열은 그 때와 똑같은 대답을 했다. 모르겠어. 명수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성열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명수가 연기를 내뿜자 다시 한번 니코틴 내음이 옥상을 진동했다. 명수는 이제 성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 겁이 났다.
" 난 엘을 싫어해, "
" 그는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든. "
결국 자신의 이그러진 사랑을 미화시키는 꼴 밖에 더 되겠어?
성열은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성열은 그 점을 좋아했지만 그래서 엘의 작품은 호불호가 크게 갈렸다. 좋아하는 사람은 엄청난 광팬인 반면 싫어하는 사람은 정말로 우울한 사랑 찬가에 분명하다며 싫어하는. 명수는 후자인 모양이었다. 성열은 이제 확신했다. 자신은 명수를 사랑하지 않지만 명수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사실에 괴로워졌지만 명수가 그 다음으로 말한 말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 뭐, 그래도 그렇게 지랄맞게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
명수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지만 그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던 탓에 성열은 여전히 그를 보지 못했다. 명수가 정말 아무렇지 않게 말했던 탓에 성열은 그것이 정말 명수의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명수는 정말 엘을 싫어하는구나. 하고 다시 한번 확신했다.
" 쓸모있어, 너. "
" 뭐…? "
" 쓸모있다고. "
필요해, 나한테.
명수는 다시 성열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성열은 명수의 얼굴과 마주했다. 그에게서는 그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성열은 생각했다. 명수는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구나.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거구나. 슬퍼졌다. 키스는 왜 했던 걸까? 그저 호기심 때문에 했던 걸까. 성열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것을 본 명수의 손등이 잠깐 움찔했지만, 성열은 역시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명수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이 할 말을 끝마쳤다.
" 사귀자, 나랑. "
" 날 위해 살아. "
본래라면 거절했어야 했다.
날 살리려고 이런 말까지 안 해도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성열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몹시도 괴로웠지만, 그 말 한 마디가 너무나도 달콤했기 때문에.
성열은 집안에 들어섰다.
역시나 예상대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정확한 추론이었다. 성열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이럴 줄 알았는데도 아파하는 저 자신이 참 더럽고 추잡하다. 내가 감히 사랑을 바랄만한 입장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이렇게 너를. 성열은 입술을 깨물었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명수가 거실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성열은 기다렸고, 곧 명수가 등장했다. 여자 없이 홀로였다.
" 내가 방해했나 보네. 미안, 나가 있을… "
" 아니. "
" ..... "
가지 말고 집에 있어.
명수의 말은 짤막했지만 강단이 있었다. 너는 무슨 저의인걸까, 의문스러웠지만 명수였기에 성열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평소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나가있으라는 말을 먼저 한 쪽은 명수였는데. 그럼에도 성열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여자가 나가고, 돌아온 명수가 성열에게 말했다.
" 미안. "
" 아니, 괜찮아 "
우리 어차피 아무 것도 안하는 사이잖아.
성열은 이전부터 준비해놓았던 말을 했다. 금방이라도 왈칵 터져버릴 것 같은 눈물이지만,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어가며 억지로 참아낸다. 아아, 어째서 나는 이렇게도 더러운 걸까. 어째서 나는 이렇게까지 명수를 사랑하는 걸까.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 한다면 명수에게 죄가 되는 건데.
성열의 대답에 명수는 한숨을 쉬었다. 성열에게는 그것이 안도로 보였다.
그러나 이내 명수가 던진 말에 성열은 밀려오는 울음을 억누르기 위해 입술을 한번 더 깨물어야 했다.
" 이성열. "
" 내가 그렇게 싫어? "
아니. 너무, 너무 사랑해.
그러나 말하지 못한다.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는 성열의 마음이 괴롭다. 가끔 명수가 이렇게 말을 할 때면 괜시리 기대하게 된다. 말하지도 못할 거면서 하는 기대. 성열은 겁쟁이였다. 난 네게 뭐야? 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명수에게 들을 대답이 두려워 말할 수 없다. 성열은 모순투성이다. 먼저 등을 돌린 것은 자신이었음에도 그것에 상처받는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겠지, 키스도, 이년 전의 고백도 그저 충동일 뿐이었을 거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나도 기뻐했던 나도,
" 모르겠어. "
딱히 정상은 아니겠지.
성열은 여느 때와 같이 문제를 회피했다. 이전에 저가 했던 말과 같은 말을 반복하며. 명수는 최근 들어 ,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제의 일 이후로 조금씩 변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일지 성열은 두려워진다. 이별의 예고일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무엇일지 성열으로서는 절대 알 수 없었다.
" 나, 자러 방에 들어갈게 "
" 어, 그래 "
그러나,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성열은 그렇게 믿었다. 철저히 유린당하고 더럽혀진 저에게 가진 것은 단지 약간의 관심 뿐이었을 것이다. 명수는 저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 되었다. 오히려 사랑했다면 성열은 말 그대로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 내일 아침에 봐. "
왜냐하면, 나는 정말 지나칠 정도로 더러웠으니까.
성열은 이내 오른쪽으로 통하는 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잠그자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명수가 자신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건데, 버리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야 하는 건데 그에게 안겨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것과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어쩜 이리도 괴로운지 모르겠다. 성열은 배개에 고개를 파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다행히 울음소리는 전부 배개 안에 묻혀 새어나오지 않을 듯 했다. 성열은 그렇게 괴로워했다. 사랑해서는 안되는 입장에도 명수를 사랑하는 자신을 책망하며….
그러나, 성열은 알지 못한다.
저만큼이나 괴로운, 아니 어쩌면 자신 때문에 삶을 살아가면서도 지금까지 계속 망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