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한- 두 달 뒤?”
“너 교수님한테는 말씀 드렸어? 어머니는?”
“응, 다시 가겠다고 하고 카페 얘기도 했어.”
“너 하성운 얘기는 했냐?”
“···.”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얘기는 둘째 치고, 남자와 같이 살고 있다는 얘기가 귀에 들어가면
뉴욕 전역을 다 엎어버릴지도 모르는 엄마 아빠였기 때문에 차마 남자의 ‘남’ 자도 꺼내지 못했다.
“한국 가면 어디서 살게?”
“몰라··· 일단 아빠한테 말하긴 했는데 그 때까지 집 구해지면 들어가고.”
지잉- 지잉-
[잘 놀구 있어?]
[보고싶어ㅠㅠ]오후 5:29
[잘 나왔지]오후 5:30
혼자 사진 찍고 있었을 생각하니까 너무 귀여워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큭큭 대면서 웃었다.
그러면서도 답장은 [일하세요] 라고 딱딱하게 보내니 너무한다며 삐진 티를 팍팍 낸다.
“야야, 일로와 봐.”
“왜?”
“손가락 하트, 하트 빨리 해.”
오후 5:32[내 걱정은 하지마 ㅎㅎ]
[떨어져]오후 5:32
[이따 혼날줄알어]
[빨리 떨어져]오후 5:33
한탄하는 옹성우에게 메롱하고 놀리니까 옹성우는 어우, 유치해가지고. 하고는 포기했다는 듯이 축 늘어졌다.
슬슬 나올 때가 됐다 싶어 카페를 나와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옹성우를 말리고 혼자 걸어갔다.
눈 온 뒤에 날씨가 조금은 풀린 듯 했지만 아직 공기도, 바람도 차가웠다.
미국에 온 이후로, 하루하루가 꿈같았다. 하성운이라는 사람을 만난 것이,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이지 않을까 싶다.
귀가 안 들리게 된 것을 액땜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될 정도로, 나에게 다가온 행운이 과분할 정도의 행복을 가져다주어서,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이 뭔지 매일매일 느낄 수 있어서, 하루하루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
“안녕, 또 보자-”
네 달 동안 지내면서 정이 들대로 들어버린 집에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다시 볼 수 있겠지.
한국에 가면 성운이는 회사 근처에 원룸을 얻었고, 나는 건물 1층은 카페, 2층은 집으로 쓰기로 하고 전세 계약을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같이 살았기 때문에 떨어져 살면서 만나는 건 어떨까 궁금해지긴 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성운이 집과 우리 집이 차타고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어서 자주 만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약속 지켜, 단골손님.”
“맨날맨날 갈게.”
처음 여기에 왔던 날 같이, 캐리어 두 개를 끌며 공항에 발을 들였다.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로 들어가는 통로를 걸어가는데, 그제야 실감이 났다.
끝이구나, 꿈같던 생활들이. 분명 우리나라로, 그리운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건데 울컥 눈물이 났다.
그런 내 모습이 우스워서 자리에 앉아 빨리 눈물을 닦아냈는데, 어떻게 봤는지 내 얼굴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린다.
“몰라···.”
“···.”
“아쉬워서··· 여기 있는 동안 너무너무 행복했는데, 이제 다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나는 안 사라지잖아, 여기 있잖아.”
“···.”
“울지마···.”
토닥토닥- 나를 안아 달래주는 손길에 감정이 북받쳐 더 눈물이 나왔는데, 성운이는 그걸 느낀 건지 나를 품에서 떼어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흑, 니··. 달래, 흑. 주, 니, 까 흑. 더··· 흑.”
“안, 흑. 헤어, 지는, 거, 흑. 아는ㄷ, 흑.”
“안 헤어지는 거 아는데, 괜히 마음이 막 그래?”
“웅·· 흑.”
성운이는 승무원에게 휴지를 받아 내 눈물을 닦아주고 이제 이륙한다며 벨트도 메어주었다.
비행기가 달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앞으로. 그리고 서서히 기울어지고 심장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안녕, 고마웠어.
-
카페 알바 3일차, 사장님도 좋은 분 같고, 손님도 적당히 있어서 참 좋은데 부끄러운 게 하나 있다.
“이, 이거랑 이거 주세요.”
“‘연애하고 싶을 때’ 한 잔이랑 ‘이별 후’ 한 잔 맞으시죠?”
커피 이름이 다소 특이하다.
특이한 이름 덕분에 입소문을 타 페이스북 페이지 같은 곳에 올라오고, 홍보가 되긴 하는데···
말하는데 민망하지 않으려면 좀··· 오랜 적응 기간이 필요할 것 같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아, 그 새로 오셨다는 분이구나.”
다짜고짜 악수를 청하는 손님에 얼떨결에 넵 하면서 악수를 했다.
“‘일하기 전에 번잇업’ 주시고요, 어- 사장님 어디 가셨나요?”
“아, 넵. 사장님 방금까지 계셨는데···.”
“하성운!”
“이름아- 으아, 며칠만이야.”
사장님 남자친구이신가보다.
“PT 끝난거야?”
“응, 방금 끝내고 왔어··· 힘들다.”
한국에 와서 카페를 개업하고 안정될 때까지 1년 정도가 걸렸고 그동안 성운이도 회사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바쁘게 일했다.
이번에는 대기업 건물을 새로 짓는데, 그 건을 성운이 팀이 맡게 되어서
클라이언트 미팅하랴, PT 준비하랴 바쁜 성운이에 얼굴 볼 틈도 없이 일주일 정도를 지냈다.
“손님 많네, 역시 내 감각이 먹혔어.”
“뭐라 하고 싶은데, 맞는 말이라서 뭐라 할 수가 없다.”
우리 카페 인테리어도 성운이 팀에서 맡아 주었는데, 그래서 SNS에 분위기 좋은 카페라고 추천하는 글이 올라오면 더 뿌듯하다.
약간은 병맛스러운 커피 이름도 성운이 아이디어가 많이 피력되어있어서, 카페가 잘되고 손님이 많은 데에 성운이 공이 크다는 건 백번천번 옳은 말이다.
“가봐야겠다. 퇴근하고 올게.”
“오지마, 피곤하잖아.”
지잉-
옹씨
[한국 도착]오후 12:58
“으엑?”
“왜?”
얘는 불쑥 찾아오는 병이 있는 게 분명하다며 성운이에게 화면을 보여주자 한 번 더 지잉- 하고 울리는 핸드폰에 나를 째려보는 성운이다. 왜? 하며 핸드폰을 보자,
황민현
[한국입니다]오후 12:59
“아이- 왜 그래, 친구잖아-”
“그러니까 잘 노세요-”
자켓을 챙겨 나가려고 하는 성운이에 화났어...? 하고 묻자 장난이라며 진짜 재밌게 놀아, 가봐야겠다. 란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나가길래 뛰어가서 잡았다.
“장난 아닌 것 같은데.”
“··· 뭐 어떡해, 왔다는데. 이따 같이 밥이라도 먹자.”
“성운아···.”
“이따 봐···.”
아이고, 얘네는 연락이라도 하고 올 것이지. 카페 개업할 때 온다는 걸 겨우겨우 말렸는데, 한국에 온 뒤로 처음 만나는 거라 반가움도 있었지만 성운이가 영 마음에 걸렸다.
“사장님 멋져요!”
“너넨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면 어떡하냐, 연락이라도 하지.”
“연락했잖아?”
“아오, 됐다. 말을 말자.”
성운시점
괜히 이름이한테 투정을 부린 것 같다. 꼭 오늘이 아니어도 되잖아. 주머니 속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 괜히 열어보고, 만지작거렸다. 이따 가서 사과해야지, 싶다가도 옹성우, 황민현이랑 좋다고 웃고 있을 모습을 떠올리니 짜증이 난다. 알바생은 또 왜저렇게 잘생긴거야.
“진짜 유치하다 나···.”
/
“야, 소주 딱 한 잔만 하자.”
“뭔 소주야, 고기나 먹어.”
“맞아, 빨리 먹고 들어가게.”
성운이가 퇴근하고 나서 옹성우와 황민현를 데리고 카페 근처 고깃집을 갔는데, 성운이가 아까부터 말이 없는 게 영 신경 쓰인다.
고깃집에서 헤어지고 나와 성운이 둘만 남았는데, 어색한 공기가 흘러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눈치만 보고 있자
내 얼굴을 들어 마주보게 하고는 좀 걸을까? 하길래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내가 너무 유치했어.”
“네가 왜 미안해···. 내가 미안해.”
서로 미안하다고, 아니라고, 괜찮다고. 그렇게 한참을 걷다 공원 벤치에 잠깐 앉았다.
공원은 한적했고 간간히 가로등 불빛들만이 주변을 어둡지 않게 비추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싸운 날, 우리의 연애가 시작된 날이 생각나 성운이를 바라봤는데,
성운이가 대뜸 손을 잡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 날씨 적당하고,”
“나 오늘 좀 괜찮고.”
“넌 항상 예쁘고.”
성운이는 자켓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뭔가를 꺼내 열었다.
그제야 성운이의 왼손 약지에 껴진 반지를 볼 수 있었다.
“더 좋은 곳에서, 멋있는 말 하면서 하고 싶었는데.”
“···.”
“결혼해줄래?”
바보같이 눈물이 나왔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복잡한 감정들이 얽혀, 그냥. 눈물이 계속 나왔다.
양손으로 내 볼을 감싸고 눈물을 닦아주는 성운이를 보니까, 또 눈물이 나왔다.
“이렇게 우는 거는 싫다는 거야?”
“장난이 나오냐.”
좀 진정이 됐다 싶었는데 그새 장난을 건다.
“그럼 대답을 해주세요. 성이름, 나랑 다시 같이 살 건가요?”
“생각 좀 해볼게요.”
너도 당해보라고 큭큭 대며 말하자 진짜 놀랐는지 진짜? 진심이야? 라며 계속 물어온다.
쪽-
“아니요.”
언제 울었냐는 듯이 웃으면서 말하자 성운이는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나는데. 하고는 다시 입을 맞춰왔다.
“사랑해.”
우리의 연애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아주 꽉 막힌 해피엔딩으로.
막은 내렸지만 무대의 뒷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인 것을 우린 잘 알고 있었기에,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었다.
“이름아.”
“성운아.”
지금 이대로, 내 곁에, 언제까지나 머물러줘.
-
특별출연 박지훈 군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드디어 완결이네요.. 그동안 읽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긴 말은 다음편에 외전+후기+메일링 공지에서 하겠습니다
여러분 너무 사랑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