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cilienne. 악보를 받아오긴 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피아노와 조화가 중요한 곡인데, 박자는 어떻게 맞추냐. 그것보다 문제는 집에서 연습하려면 성운이한테 말해야 되는데, 막상 애기하려니 막막하다.
“성운아!”
“응?”
“그··· 아니다.”
말할 타이밍이다, 싶어도 말을 꺼내려고 하면 자꾸 멈칫하게 된다. 옹성우가 내일 첼로 갖다 주겠다고 했는데, 오늘 저녁엔 꼭 말해야 되는데. 복잡한 마음에 거실을 돌아다니면서 머리를 쥐어뜯어보기도 하고, 갑자기 엎어져서 뒹굴거리기도 하고 아무튼 난리를 치고 있는데, 누가 툭툭 건드린다. 성운이인걸 알면서도 항상 적응이 안 돼,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한 손에 흰색 비닐봉지를 머리 위로 들고는 강아지 같이 헤헤 웃고 있는 성운이가 보였다.
“짠-”
미국 온 뒤로 첫 치맥, 행복하다. 치킨을 한 조각 먹고 차가운 맥주를 들이키자 뭔가 드라이아이스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 같다. 성운이는 벌써 한 캔을 비우고 빈 캔을 자기 옆에 탁- 놓더니 내가 자기 얼굴을 보게 한다.
“내가 먼저 말할게.”
아까와는 다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는 성운이를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성운이는 천천히,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살짝 웃어 보이는 성운이의 얼굴에서 나는 슬픔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나 때문에, 안 좋은 기억들을 꺼내, 하나하나 들춰보는 성운이를, 나는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자리에 앉았는데, 처음 들었던 얘기가, 아니 처음 알아들었던 말이 North Korea, 북한. 이 단어 하나였다-. 나 북한 사람 아닌데, 그치.”
또 웃으면서 얘기하는 성운이에 복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말을 계속 이어갔다.
“걔네는 노래까지 만들어서 나를 놀렸어. 나중에 안건데, 내용이, 말 못하는 벙어리. 뭐 이런거더라구.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니까, 그냥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 있어서는 주먹이 날아오더라.”
“체구가 작으니까 약할 거라 생각했나봐, 근데 나 힘세잖아.”
자기 몸을 쿡쿡 찌르며 허세를 부리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는데, 이런 상황에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살짝 째려봤는데 계속 말을 이어간다.
“그냥, 맞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때렸는데 그, 뭐라 하지 대장?이라 해야 되나. 암튼 걔 어깨가 탈골돼가지구. 나는 징계 먹고 걔네는 그냥, 잘 지내더라구. 그 때 엄마아빠한테 엄청 혼났는데, 괴롭힘 당했던 거는 말을 못 했어 아직도. 마음고생 하실까봐.”
“그 때부터 공부만 했어, 딴 과목들 말고 영어만 죽어라 했어. 말을 알아듣고, 말을 만들고, 말을 하고. 고등학생 때까지 그것만 하니까 되더라고. 뭐- 그래서 내 얘기 끝.”
누구나 아픔은 있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여도, 인생에 굴곡하나 없는 사람처럼 보여도. 누구나 아픔은 하나씩 가지고 있다. 성운이도, 나도, 옹성우도, 우리 엄마, 아빠도. 이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나하나 꺼내서 펼쳐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성운이에게 다 털어놓았다. 내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들어주는 성운이를 보면서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 생각했다.
“아, 그래서 옹성우 내일 첼로 가지고 온댔어.”
“여기? 히얼?"
눈을 동그랗고 크게 뜨고 손가락으로 밑을 가리키며 여기? 하더니 ‘아아 안 돼, 옛말에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하길래 ‘너랑 나는?’이라고 받아치니까 갑자기 귀가 빨개진다.
“아아아, 암튼. 안 돼.”
“그럼 첼로는? 하지말까?”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워 계속 놀려대자 몰라··· 하고 바닥에 드러눕는 성운이. 나도 계속 마시다보니 취기가 올라와서 약간 어지러웠다.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잠이든 성운이를 옮겨주려고 낑낑대다 결국 포기하고 성운이 앞에 주저앉았다. 잘 자네. 평소에는 얘기하려고 입술만 봤는데, 이렇게 보니까 살짝 씩 파르르 떨리는 눈가에 진한 속쌍커풀, 동글동글한 코, 진짜 구름 같이 하얀 피부까지 하나하나 다 예쁘다.
“추···워···.”
이불을 덮으려고 뒤척였는데 이불이 없다. 으으- 또 떨어트렸나. 하고 베개를 끌어안았다. 따뜻한 느낌에 얼굴을 파묻고 다시 잠에 들었다.
“갔다 올게- 점심 굶지마. 그, 옹성우씨 오신다며, 같이 먹어.”
“네 아빠”
“아빠라니!!”
으억, 저번엔 손으로 잡고 늘리더니 이번엔 볼을 양 손바닥으로 꾹 눌러서 앞뒤로 흔든다. 발전 했어... 건들면 안 되겠어... 이따 보자는 말을 끝으로 옹성우 기다리기가 시작됐다. 심심하니까 옹성우 커피도 내려놔야지. 초딩 입맛이니까 원두도 제일 안 쓴 걸로.
지잉- 지잉- 지-지-지-지-지잉-
옹씨
-도착
-문열어
-문여세요
-문
-문
-문열어라
-문ㄴㄴ열어ㅇㅇ
“아, 이런 참을성 없는 놈이 다 있나-.”
문을 벌컥 열자 보이는 옹성우와 황민현. 잠깐, 황민현?
“아···. 어, 안녕! 알아! 난 성이름.”
“나도 알아.”
하하- 하며 눈웃음 짓는 황민현에게서 옹성우로 시선을 옮기자, 연습해야지? 라며 황민현과는 사뭇 다른 악마 같은 웃음을 짓는다. 얼떨결에 들어오게는 했는데, 여기는 성운이 집이지 내 집이 아니라고···.
“근데 여기가 내 집이 아니라 얹혀사는 거라 여기서 연습하긴 힘들 것 같아.”
“아··· 그럼 우리학교 연습실에서 해도 돼, 근데 올 수 있으려나?”
“어쩔 수 없지.”
“미안해지네, 힘든 부탁해서.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다 사줄게!”
넌 정말 바르게 자란 아이로구나. 이럴 땐 거절하면 안 ㄷ···
“너 말 함부로 하지마, 얘가 얼마나 돼진줄 알고.”
황민현은 또 하하- 하고 웃었다. 로봇이 웃는 것 같은데, 뭔가 자기한테 잘 어울리는 웃음이다.
“오늘은 그냥 가야겠다. 민폐 끼치면 안되니까.”
“아··· 여기까지 왔는데, 미안.”
미리 말을 했어야지, 하며 옹성우를 째려봤더니 입술을 삐죽 내민다. 아, 커피 내려놓은 거.
“잠깐만 가지 말아봐.”
옹성우 거는 시럽 추추가. 황민현은·· 잘 모르겠으니까 한 번만 넣어서 큰 종이컵에 담아줬다.
“오- 이제 이런 거도 할 줄 알어?”
“와, 잘 먹을게!”
그렇게 둘을 배웅하고 덩그러니 남겨진 첼로를 바라봤다. 다시, 잘 할 수 있겠지?
Epilogue.
부스럭부스럭거리는 기척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뜨자
“······.”
세상모르고 잠만 자는 이름이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추···워···.”
빠르게 뛰는 심장을 뒤로하고 춥다는 이름이의 잠꼬대에 침대로 옮겨놔야겠다, 생각한 순간. 으어어- 하며 내 품으로 파고드는 이름이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 진짜 이러면 나보고 뭐 어떡하라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이름이를 감싸 안았고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내 온기가 다 떨어졌는지 으으- 하는 소리를 내는 이름이를 안아 침대에 눕히고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잘자. 이따봐.”
어째 끝이 오는 느낌이 ㅎㅎㅎㅎㅎㅎㅎㅎ 암호닉 이번화까지 받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