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체대에서 살아남기
머리가 복잡할때, 그리고 고민이 있을때
항상 찾게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사람한테 물어볼게 쌓여있거든.
“넌 왜 꼭 이렇게 공강에 부르냐.”
툴툴대며 모자를 눌러쓴 채로 커피를 쪽쪽 빨아들이는 재환이었다.
여주는 픽하고 웃으며 앞에 있는 컵을 문질렀다.
“아, 뭐야. 진짜 뭔 일 있어???”
평소와 다른 느낌에, 촉이 왔는지 재환이는
의자를 고쳐앉고는 물었다.
“너, 왜 말 안했어?”
“뭐,뭐를..”
크게 움찔하는 것이 평소에 숨기는게 많기도 했나보다.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다니엘 말이야.
너 예전부터 연락했으면서도 왜 나한테 말 안했었냐고,”
입 밖으로 나온 그 이름에, 갑작스레 정적이 찾아왔다.
재환은 자신을 쳐다보는 두 눈을 피하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투로 대답을 보채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난, 말하지 말라는 걔 부탁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넌 알잖아,
내가 얼마나 궁금해하고 보고싶어했는지”
분명 재환이의 탓이 아닌데도, 탓하게 되었다.
너가 말해줬으면, 그럼 더 빨리 알아서 더 빨리 위로해줬을텐데.
그러지 못했던 내가 너무 미워서..
“넌 보고싶고, 궁금하기만 했잖아.”
“뭐..?”
“다니엘은... 그 새끼는 그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고.”
재환이는 미간을 찡그리며 머리를 헤집었다.
한숨을 푹 내쉬곤 말을 이었다.
“너를 보는 것도, 너를 안보는 것도 다.”
“....”
“됐어,임마.. 그런 표정 짓지마.
우리가 너한테 그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을거 같애?
일부러 안한거야. 잘 잊고 사는 사람 들쑤셔서 어쩔건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재환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줬잖아, 편지.”
“그게 무슨 소리야 또”
“아니, 우리 고삼 올라갈때 내가 다니엘 편지 전해줬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난다, 정말로.
내가 편지를 봤다면, 본거면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진 않을거 아냐.
여주는 본 적이 없다고 확신했다.
“나 진짜로 받은 적 없어.
넌 그럼 내가 왜 답장도 없고,
아무 말도 없는데 왜 안물어봣는데?”
“야 그럼 넌 그걸 내가 일일히 다 확인해야되냐?
내가 뭐 사랑의 큐피드라도 되냐?”
“뭐?”
“아, 됐다 됐어.”
서로 성질만 돋구고는 아무런 성과 없이 대화가 끝났다.
시원한 해답을 들으려 불렀는데 오히려 더 꼬이고 꼬인 느낌이었다.
게다가 카톡을 해도,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다니엘이었다.
얼마 전 그 날 이후로는 꼬박꼬박 짧게라도 항상 연락했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재환이도, 성우나 민현이도 연락한지 꽤 오래 전이라고 했다.
다들 훈련이 바빠서 휴대폰 할 시간도 없을거라고 했다.
하긴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분위기가 살벌할 만도 했다.
그래도 그 편지가 무엇인지,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꼭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체대에서 살아남기
낮부터 시끌벅적 들뜬 분위기가
오늘이 축제임을 알려주는 듯했다.
저 멀리 운동장에서 현수막과 천막을 설치하는
사람들도 간간히 보였다.
타과에 비해 체대에 여자가 얼마 없는 만큼,
여자동기들은 모두 서빙에 배정되었다.
그 안에는 당연히 여주도 포함되었고.
다니엘은 아쉽게도 훈련때문에 못 나오는 듯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나머지 셋도 각각 다른 일들을 부여받아,
축제 내내 찢어져 있어야 할 판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해야할 일이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수업이 다 끝나고 나니,
학교 안을 울리는 음악소리가 훨씬 더 커졌다.
벌써부터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체대 주점을 찾아 헤매는 여주였다.
꽤나 좋은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주점을 보니
선배들의 입김이 쎘었나보다.
그만큼 바쁜 예정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서둘러 주점 안에 들어가니,
삼삼오오 모여있는 여자동기들이 보였다.
다들 자신을 봤으면서도 어느 누구 한명
아는 척 안하는 것이 참 고까웠다.
이젠 익숙해진 분위기였다.
앞치마를 두르며 일을 시작하는데,
점점 사람들이 몰려 들어왔다.
그렇게 정신없이 몇시간이나 지났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화장은 다 무너져 내린거 같고, 땀을 연신 닦으며
거울도 보지 못한 채로 일만 하고 있는 여주였다.
안에서 요리하는 게 제일 힘든 일인데,
여자동기들 중 누구랄것도 없이
다들 여주에게 떠맡겨버린 것이다.
잠깐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갑작스런 선배의 호출이었다.
자신이 여기 담당할테니 서빙 좀 도와달라는 말이었다.
아니 차라리 마음 편히 요리하는게
나은 것 같다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선배의 말은 우리 체대에서 법.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고는 메뉴판을 들고
테이블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일은 훨씬 쉬웠다. 하지만, 이런 새끼들 때문에
하기 싫었던 건데..
“몇 학년이에요? 나 번호 좀.”
아까부터 끈덕지게 달라붙는 한 남자에
이제 여주는 대놓고 싫은 티를 내며 무시했다.
그럼에도 귀엽다는 듯이 계속 쪼개는 남자였다.
분명 의도한 느낌인데, 애매하게 스치는 손길도
소름돋을 만큼 꺼림칙했다.
여주는 다시 한번 살짝 노려보고는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보니 교대할 시간이 왔다.
수고했다며 어깨를 두드리는 선배에 꾸벅 인사를 하고,
뿔뿔이 흩어져 있는 제 친구들을 찾아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얘들아 어디야? 나 끝ㄴ남
카톡도 안읽고, 다들 정신 없나보네..
단톡방에 숫자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무대나 구경할까하고 그 쪽으로 향하는 여주였다.
붐비는 사람들을 비집고 가는데, 누군가 확 손목을 잡아채었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틈에서 아프게 끌고 가는
그 사람에 잡힌 손목을 풀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사람들을 뚫고 나와보니, 그 사람은 아까 주점에서
계속 치근덕 대던 그 사람이었다.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 왜 그러세요..”
“아 저 번호 좀 달라니까요.. 제 이상형이에요”
꼬인 발음이 술에 취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이끄는 대로 끌려오다보니
사람들과 떨어져있는 곳에 있었기에 더 그랬다.
급하게 주머니에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찾았다.
마침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통화 버튼을 꾹 누르고
다시 그 남자와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래도 이렇게 끌고 오시면 어떡해요,
저 여기 어딘지도 모르는데.”
“으흐.. 그니까 일루 왔지이.. 사람 없잖아요,
여기 축제 기간동안 안쓰는데라 사람 안와요 .
우리 밖에 없어”
우리 밖에 없다는 말과, 사람 안오는 곳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흥분에 가득해 소름끼쳤다.
속으로 제발.. 제발.. 대뇌이며 여주는 침착하려 애썼다.
“ 번호 알려드릴게요. 그럼 저 가도 되죠?”
번호 알려준다는 말에 웃다가
뒷말에 갑자기 표정을 굳히는 남자였다.
가길 어딜가냐고 다시 잡은 손목에 힘을 주었다.
정말로 손목이 아파 얼얼할 지경이었다.
소리라도 질러야하는건가 고민하는 찰나에,
갑자기 손목이 탁 풀리고
그 남자가 자신의 뼘을 감싸쥐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미친 새끼가..”
뛰어왔는지 거친 숨을 내쉬며,
민현이 주먹을 쥔채로 있다가
곧장 여주 쪽으로 몸을 돌려
어디 다치지 않았냐고, 괜찮냐고 살폈다.
그제서야 긴장이 탁 풀리고 울컥했다.
그런 여주를 민현이가 좀 더 일찍 못와서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품에 안고 다독여주었다.
바닥에 누워있던 남자는 한 대 얻어맞더니 술이 좀 깼는지,
자신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남자가 등장하자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가버렸다.
“흐..”
아직도 새어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어
찡그린 얼굴을 한채로 손으로 연신 볼을 닦는 여주였다.
그런 여주의 손을 살짝 잡아 내리고는
민현은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방울을 닦아주며
민현이 말했다.
“이제 좀 괜찮아? 놀랐지.”
“...응”
“여기랑 좀 떨어진 곳에 있어서
오는데 시간이 걸렸어. 미안해..”
주머니 속에 있어 혹시라도 못들을까 걱정했는데,
작게 들리는 소리로나마 이곳인 줄 알았나보다.
민현의 걱정스런 눈빛에 여주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왜 이런 일 있을때마다,
너가 짠 하고 나타나는 거 같지?”
정말로 그랬다. 학교에 입학하고, 어쩌면 인생에서
제일 다사다난한 하루들을 보내는 요즘이었다.
좋은 일 뿐만 아니라 안좋은 일들까지도.
그럴 때마다 항상 옆에 민현이가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참 고맙고, 그랬다.
“다행이다.”
“뭐가?”
“짠하고 나타날 수 있어서 말이야.”
생긋하고 웃는 얼굴엔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그게 자신이여서 행복하다는 듯한 표정이 담겨있었다.
아직도 쿵쾅거리는 스피커의 음악소리가
마치 저 먼세계의 일인마냥 아득하게 느껴졌다.
“여주야, 나 할말이 있는데..”
민현은 무언가 결심한듯 말을 꺼냈다.
그 순간,
피융- 펑-
축제의 하이라이트, 불꽃놀이가 하늘에 수놓아졌다.
팡팡 터지는 폭죽에 민현의 뒷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입모양이라도 읽으려는 듯
여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민현을 바라봤다.
“아니야, 다음에.. 나중에 말할게.”
“그래, 여기 잘 안들려!!”
축제의 뒷편에는 밤하늘을 보며
화려한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여주와,
그런 여주를 바라보는 민현이 있었다.
체대에서 살아남기
축제가 끝났다는 것은, 또 다른 말로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했다.
여름이 조금 일찍 찾아올 예정인지,
벌써부터 더워지는 듯 했다.
공부도 차라리 시원한 곳에서 하자는 생각에
도서관으로 향하는 여주였다.
도착하니 이미 민현이가 먼저 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까지 맡아놓은 것을 보고,
쪽지로 작게 센스 굿이라는 메세지를 남겼다.
민현은 힐끗 보고는 웃음지었다.
얼마나 공부했을까, 목이 뻐근했다.
이리저리 목을 스트레칭하며 민현을 보니
아직도 정자세로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등수가 공개되지 않아 아무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공공연하게 민현이 과수석임은 알려져 있는 바였다.
실기는 물론이고, 이론까지 잘하기는 어려운데
정말 사기캐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길어지자 눈치를 챈 듯
민현은 마주앉아있는 여주를 바라보았다.
입모양으로 왜? 라고 묻자, 여주는 그냥 이라고 답했다.
잠깐 나갈까라고 묻는 민현에
여주는 고개를 끄덕이곤 가디건을 챙겨들었다.
학교 안은 시험기간이라그런지,
아니면 늦은 밤이라그런지 사람이 없었다.
마치 학교 정원을 전세낸듯 단 둘이 걸을 수 있었다.
밤공기가 선선해 답답했던게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아, 너 할 말 있다하지 않았어?”
“아... 할 말 있지.”
“뭔데?”
“음.. 지금 안할래.”
“아, 뭐야.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너 그래놓고 별거 아니면 실망한다?”
안경 너머로 곱게 접은 눈을 한
민현이 장난스레 대답했다.
“별거인지 아닌지는, 네 마음에 달려있는데.”
집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데,
민현이 자신의 가방을 뒤적이다, 책 한권을 꺼냈다.
“이거, 한번 읽어봐. 재밌을거야.”
“정말? 고마워. 시험 끝나고 읽을게”
“아, 저기.. 그..”
“응?”
민현이 할말이 남았는듯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중간에 형광펜 쳐놓은 부분이 있는데,
네 생각은 어떤지 말해줘.”
“그래, 좋은 구절인가보다.”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과 함께, 민현과 헤어졌다.
여름 밤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좋네.
책을 선물 받았지만 읽을 시간이 없어,
짧막하게 끊어 읽는 중이었다.
원래 그 자리에서 다 읽는 타입인데,
시험기간이니 어쩔 수 없이 짬내서 읽는 중이었다.
민현이는 그 책에 관해서 다시 묻지는 않았다.
레포트를 쓰다 잘 풀리지 않아
노트북을 탁하고 닫고는,
침대로 가 책을 손에 들었다.
시험기간엔 공부 빼고 다 재밌단 말이지..
한참을 읽었을까,
이제 다시 공부해야겠다 생각하며
마지막 한 장을 넘기는데,
민현이 말했던 형광펜 구절이 나왔다.
괜히 반가운 마음에 그 부분부터 읽어 내려갔다.
사랑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 어찌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느냐 물으셨지요.
눈을 감는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꿈이 물러난 자리, 사랑은 항상 그곳에 두겠습니다.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세요.
네 생각은 어떤지 말해줘.
민현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네 생각, 네 마음을 알려줘.
이건, 고백이었다.
예고편 |
“니엘아..” 여주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 품을 팍 껴안는 다니엘이었다. 어깨가 축축해지고,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덩치 큰 아이가 엄마에게 안겨 울듯이, 엉엉 우는 다니엘이었다. 여주도 다니엘 얼굴을 보자 눈물이 차올라 눈물 방울이 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품에 껴안고 엉엉 우는 이 아이를 두고 차마, 아니 감히 울 수가 없었다. |
?
포도블입니다~~
그래도 금방 찾아왔습니다! 나름?!
아 오늘 정말 달달하죠?!
책의 구절로 고백하는 민현이입니다
민현이답죠 ㅎㅎ
본문 속 책의 구절은 [달의 조각]이라는
책의 구절입니다. 다들 아시나요?
워너원고에서 민현이가 읽던 그 책 맞아요!
깨알 디테일ㅎㅎ
+
다들 예고편 보셨나요?!
우리 니엘이에게 과연 무슨일이.. ㅜㅜ
❤️ 싸랑하는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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