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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선] 우리에게 끝은 없다 0 7 | 인스티즈








부정의 궤적










 우체국 문은 어린 시절에 본 시골 병원의 문처럼 길다랗고 둥근 스테인 손잡이가 달리고 성에 무늬의 반투명 유리가 끼워진 단단한 두 짝의 목재 문이었다. 나는 출입문이라는 흰색 페인트 글자가 씌어진 오른쪽 문을 밀었다. 그리고 김창수와 눈이 마주쳤다. 김창수는 내가 문을 열기 전부터 이미 문 밖에 내가 온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반투명 유리 때문이였을까. 비스듬하게 얼굴을 든채 턱을 내밀고 눈을 약간 내리깐 상태에서 한순간에 전체를 훑어 내리는 듯한 김창수의 무례한 눈은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모욕적이면서 동시에 깊숙이 간직된 본능을 일순간에 후끈 달아오르게 만드는 집중된 시선. 그는 역시 사춘기 때, 자신의 미를 강박적으로 훼손시켜야 했을 만큼 잘생긴 남자였다.


 우체국 안에는 한 명의 배달부가 우편물을 구역별로 분류하고 있었고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직원과 이십대 초반의 여직원이 공과금 영수증을 정리하고 있었다. 냉방이 되고 있었고 매끄러운 바닥엔 깨끗하게 물걸레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캐비닛만큼이나 키가 큰 벤자민 나무는 초여름 상추처럼 싱싱해 보이는 초록빛이었다. 좁다란 로비의 창문 역시 초록창틀인데 바깥의 장식살을 따라 나팔꽃 넝쿨을 타고 올라 바람에 살랑거렸다. 창문 곁엔 녹슨 철제 팔걸이의 구식 비닐 소파가 하나 놓여 있고 어디에 있는지 모를 라디오에서 방송국의 로고송이 끝나자 오래된 기타곡이 흘러나왔다. 실내의 빛은 전체적으로 연한 배춧잎 같은 푸른빛을 띠었다. 기능적이고 소박하고 청결한 시골의 우체국 실내였다.


 나는 혜윤에게 책과 짧은 편지를 띄우려고 했다. 여직원이 내 책의 무게를 단 뒤 무게를 달고 우표를 주는 동안 나물 꾸러미를 든 노파가 우체국에 들렀다. 노파는 나물 꾸러미와 함께 도시의 아들이 보내준 우편환을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내놓았다. 그리고 청년 한 명이 팩스를 보내기 위해 들렀고, 우표를 사기 위해 들른 농협의 아가씨도 있었다. 책을 우편물 상자 속에 넣고 나오니 김창수가 뒤따라 나왔다.



“ 지금 바로 휴게소에서 봐요. ”



 그는 숨을 몰아쉬며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휴게소 뒤편 도로에 차를 세웠다. 휴게소 여자는 비치 파라솔 아래에 앉아 경찰 옷을 입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는 나에게 알은체를 했다. 그리고 가게로 들어가 얼음이 담긴 오렌지 주스를 말없이 뽑아주고 돈을 받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웃었다. 딸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차 안에서 주스를 마시고 있으니 김창수의 차량이 이내 나타났다. 그는 나의 곁에 차를 세우더니 자신의 차로 옮겨 타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가방과 주스가 든 종이컵을 들고 그의 차로 옮겨갔다.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



“ 인간은 행복이나 불행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어요. 



 김창수는 감정 없이 말했다. 나는 그의 손등에 새겨진 가위로 찍은 자국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 말을 정확하게 어떤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오히려 행복이나 불행이 인간을 자유롭게 선택해요. 지금은 바로 그런 시간인 것 같아요. 행복이면서 불행인 것이 동시에 우리 둘을 선택한 시간. 당신은 한 번쯤 만나고 싶어했던 바로 그 여자예요. oo씨는 어때요? ”

“ 난 상상해 본 적 없어요. 당신이든 어떤 다른 남자든, 누군가 다른 남자가 내 인생에 필요하게 될 거라고는… ”

“ 그렇게 처량하게 말하지 마요 ”

“ 좋으세요? 이 삶이? ”

“ 그럼요 ”



 그의 차는 기차역이 있는 소읍을 지나 국도변의 한 모텔로 들어갔다. 희디흰 인조석 벽 모서리에 빨간색의 풍차 날개가 달려 있고, 방마다 둥근 발코니가 달린 부조화하고 기묘한 모텔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초록색 카펫이 깔린 복도를 들어갈 때 나는 그의 얼굴을 굳이 외면한 채 구두코를 내려다보았다. 마을을 숨기고 의미도 없는 게임으로 이 모든 행위를 포장한 냉정하고 뻔뻔스러운 남자 앞에서 나는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전혀 모르는 소녀같이 불안했다. 그 엉뚱한 밀회가 어떤 모습을 띠게 될 것이며, 그 게임에서 나를 어디까지 허용하게 될지, 그러고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까마득히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시간의 힘과 게임의 의지에 나를 맡겨버린 상태였다.


 냉방이 잘 된 커다란 방, 벽 하나를 다 메운 어두운 색의 무거운 커튼, 티 테이블과 팔걸이가 달린 두 개의 의자. 사이즈가 큰 이인용 침대와 나의 심장처럼 잔뜩 부풀어오른 베개, 작은 냉장고와 옷을 걸도록 되어 있는 졸다랍고 긴 갈색 장롱, 화장대와 티슈통, 그리고 바닐라 아이스크림 냄새 같은 값싼 남성용 로션의 향… 이런것이 우리 게임의 장소가 될 것인가. 마치 아픈 이에 한쪽 손바닥을 대고 치과에 들어선 것 같았다. 내 마음에 회의와 한심스러운 슬픔이 차올랐다.


 방 안엔 여름 한낮의 햇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나는 창을 등진 채 가방을 테이블에 놓고 팔걸이 의자에 앉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나에게 다가왔다. 흰색 여름 니트의 웃옷이 길어서 허벅지까지 덮인 상태였다. 그는 나의 무릎에 닿을 정도로 붙어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것을 내가 보아주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한 기분이었다.



“ 할 수 없어요 ”

“ …… ”

“ 난 이런 일에 익숙하지 못해요 ”

“ 물론 어색한 일일 수도 있어요. 우린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되어가는 것 같기도 할 것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행위가 부도덕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테니까. 하지만 서로 알고 이해하면 그런 문제들이 많이 완화돼죠. 밝은 곳에서 나를 보고 당신도 나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특이하고 신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왜 안되는 거죠? ”



 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 … 글쎄요. 그런 적이 없어요. 내 몸을 보면 당신은 내가 잊은것까지도 다 읽게 될 거예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여자의 몸은 남자와 달리 일어난 모든 일은 생생하게 기록하니까요. 그리고 그런 오직 나만의 것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읽히고 싶지 않아요. ”

“ 우린 사랑하려는게 아니라 게임을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 편이 나아. ”



 나는 그 말에 한편으로는 동의했다. 여기에는 어떤 환상이나 미화도 필요없었다. 수줍음조차도 룰을 어지럽힐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거친 게임이 꼭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 다음에요. 그래야 한다면 좀 익숙해진 다음에 할게요. ”



 그는 창가로 다가가 짙은 색의 커튼을 쳤다. 방 안은 어둑해졌다. 그는 냉장고를 열고 캔 맥주를 두개 꺼냈다. 우리는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나는 전에 비해 살이 많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몇 년 동안 너무 많은 낮잠을 잤기 때문이었다. 나는 옷을 벗고 섹스를 하게 될 것에 대한 불안 떄문에 맥주를 빠르게 마셨다. 


 그가 뒤에서 원피스의 지퍼를 내려주었다. 나는 원피스와 슬립을 얌전히 옷장에 건 뒤에 시트를 끌어당겨 몸을 가리고 침대에 걸터 앉았다. 그는 그런 나를 불만스럽고 단순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자신의 웃옷을 훌렁 벗어 던졌다. 피할 수도 없이 한 남자의 신랄한 몸을 직면한 꼴이었다. 한낮이든 한밤이든 바로 앞에서 완전히 자신을 드러낸 남자를 나는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그는 나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눈앞에 그의 것이 보였다. 나는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얼마간은 침대에 나란히 앉은 채 손끝으로 살갗을 쓰다듬기만 했다. 아주 고요했고 숨을 쉴 때마다 부드러운 암시나 최면처럼 그의 냄새가 천천히 나의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내 몸에 그의 냄새가 가득 찼다고 느끼는 순간 마침개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낯선 몸이 처음 안을 때의 기분은 몹시 섬세하고 자극적이어서 신경이 곤두섰다. 그의 몸도 나처럼 차가웠다. 그는 나를 꽉 끌어안은 상태에서 손을 돌려 브래지어 후크를 풀었다. 그리고 성급하게 눈으로 보려 하지 않고 가슴으로 나의 가슴을 누른 채 가만히 느끼기만 했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매력적인 방법이었다. 잠시 뒤에 그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 약간 간격을 띄웠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 속옷을 벗겼다. 그리고 재빨리 간격을 메워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맨 몸이 되었는데도 전혀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잔털이 먼저 스치고, 긴장된 피부가 건드려지고 내 키가 그의 목께에 닿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목이 이쪽과 저쪽으로 감기고 부딪치며 가볍게 흥분하였다. 짧게 입술이 부딪치고 저절로 열리는 입술의 틈으로 입술이 얽히고, 그리고 체온과 맛이 다른 혀가 입 속으로 와락 넘어들어왔다.


 그는 나의 육체에 대해 냉정했다. 그는 신중했고, 부드러웠고 어떤 의미에서는 좀 신랄했다. 어떻게 첫 관계에서 내가 그토록 자연스럽게 흥분할 수 있었을까 … 그가 삽입한 후 멈춘 채 얼마간의 순간들을 천천히 보낼 때, 그때 이미 나의 몸은 그와 친숙해진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낯익힐 시간을 배려한 것이었다. 그 정지의 시간동안 나의 것이 온기를 회복하며 한 잎 한 잎 열려 그를 맛보고 빈틈없이 조이며 끌어안고 뜨거운 숨을 쉬며 깊이 빨아들여 마침내 삼켜버리려 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무엇이었던가. 나는 유체 이탈된 영혼처럼 나의 내부뿐아니라 외부에서도 결합되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끼며 동시에 너무나 생생하게 의식했던 것이다. 혈관이 진동을 일으킨 마지막 순간에 경련이 반복되는 동안 밤하늘에 번갯불이 일어나듯 내 존재의 어두운 뿌리에 불꽃이 하얗게 보인 듯했다. 우리는 두번의 섹스를 나눈 뒤 똑같이 잠이 들어버렸다.


 모텔에서 나왔을 때, 이미 어두워진 하늘 끝에서 밤바람이 불어왔다. 처음으로 머리끝까지 피가 운반되는 신선한 생기가 몰려왔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 있다. 그 일은 나에게 그런 일이었다. 남편이 아닌 남자와 육체관계를 가진다는 것. 그 일이 어떻게 시작될 것이며, 어떻게 옷을 벗고 어떻게 전개되고… 그러나 생은 그 모든 것을 태연하게 꿀꺽 삼킨다. 혼돈과 불안과 죄책감과 두려움 그토록 선명하고 충격적이던 생경한 육체의 감각까지도. 처음에 나는 나 자신에게나 아니라 오히려 생의 태연함에, 육체의 포용력에 조용히 경악했다.






 다음날 다시 우체국을 찾아갔다. 그리고 역시 나의 차를 휴게소에 세워둔 채 그의 차를 타고 가 모텔에 들었다. 나는 처음보다 오히려 더 서툴게 굴었다. 옷을 다 벗고 맨몸이 되자 금지를 넘고 있다는 지독한 자각이 처음으로 몰려와 야생적인 욕망에 떨렸고 그의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전날에 새겨진 그 선명한 감각의 기억이 되살아나 비명을 내지르며 튀어올랐던 것이다. 손톱 밑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뺨과 몸 곳곳에 아른거리는 선홍빛 반점들이 생겼다. 온몸의 감각이 나의 통제를 이탈해 두서없이 아우성쳤다. 눈에선 눈물이 고이더니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가 얼굴을 온통 적시며 기진한 듯 바르르 떨고만 있자 그가 나의 몸을 꽉 끌어 안더니 천천히 이름을 불렀다.



“ oo아… ”



 한동안 그렇게 있으니 감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발을 바닥에 디뎌봐요. 당신보다 깊지 않아.’ 그가 바닷물 속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허우적거리기를 멈추고 바닥까지 다리를 내렸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지느러미를 일렁거리며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그제야 연못의 밑바닥이 고요한 물의 무게를 느끼는 듯 내 몸의 깊은 바닥이 그의 무게를 받아안기 시작했다.






 이틀이 지난 뒤 점심시간에 김창수를 만났다. 우리는 작은 해수욕장을 지나 좁다랗고 새하얀 이층 목조 건물인 레스토랑의 옥외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카시아 언덕 아래 해안선을 따라 편편하게 뻗어 있는 해안도로가 지구는 둥글다는 듯 둥그렇게 휘어져 있고 바닥엔 물이 넘칠 듯 가득했다. 그는 바닷가재 요리를 풀 코스로 시켰다. 나이 든 웨이터는 그를 잘 아는 모양이었다. 그는 요리될 바닷가재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뒤 나에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손등이 덮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음식을 먹을 때 소매가 걸리자 그는 나의 소매를 위로 걷어올려주었다. 여름 천인데다 소매의 폭이 넓어 쉽지 않았지만 그는 얼굴을 숙인 채 꼼꼼한 손길로 팔목이 들어나도록 올려주었다. 그 사소한 보살핌 때문에 내 마음은 순식간에 연약해졌다. 제대로 자란 성인 여자들이라면 여자들을 아이같이 취급하는 그런 얄팍한 보살핌을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한때는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나는 마음이 연약해진 나머지 포크를 잠시 놓아야 했다. 모든 것이 날씨 탓잇 것이다. 나쁜 날씨, 내 인생은 나쁜 날씨 속에서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었다. 숲의 무덤 뒤쯤에서 문득 뻐꾸기가 울기 시작했다.



“ 흔히들 더 선량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람을 한다고 착각을 하지만, 실은 정말로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끝까지 하는 자들은 나쁜 사람이지. 보다 덜 선량하고, 부도덕하고, 연약하고 이기적이고 변덕스럽고 질투하는 사람. ”

“ …지금의 나 같은 사람이네요. ”



 자백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공감하다는 듯이 끄덕였다.



“ 상처받은 사람의 모습이에요. 거부하는건 자신을 규정하는 거에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알아볼 수 있었어요. 당신이 안감힘으로 거부하고 있는 당신의 상처를. 거부한 나머지 상처 그 자체가 되어버린 그 자체가 되어버린걸. ”



 그는 나를 너무나 잘 안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문제삼아 비난하는 것도 아니고 감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여느 타인에게 하듯이 나라는 인간이 그런 유형이라는 말일 뿐이었다. 세상에 연애를 다 알고 있는 듯한, 우리 사이의 마지막 장면도 이미 알고 있는듯한 잔인하도록 나른한 어조.


 나는 처음으로 마주 앉은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담담한 눈빛, 얄팍한 입술, 단정한 코, 얼굴을 조금은 정감 있어 보이게 만드는 입꼬리, 게임을 하는 육체와는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무욕의 표정. 욕망까지 채운뒤라 예의바르고 냉정해 보이기까지 한 태도. 언젠가 나를 괴롭히게 될 얼굴이라는 것을 이내 알 수 있는, 흡사 운명이 마련한 나의 심상 속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얼굴.  벌써부터 그가 보여주는 거리감이 나를 괴롭혔다. 그 거리감이란 그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려는 내가 만들기 시작한 거리감이었다. 그는 다만 한결같을 뿐이였다.


 해수욕장 주변에는 텐트를 친 사람들이 카레를 끓여 점심을 만들거나 낮잠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얼굴이 검붉은 나이 든 시골 남자들이 비치 파라솔 아래서 소주와 파전을 먹고 있었다. 바다 속에는 햇볕에 그을은 어촌 마을의 아이들 넷이 담요처럼 넓은 검정색 튜브를 타고 떠 있었다. 바다는 파도도 없이 풀밭처럼 고요했다. 한 여름의 건조하고 새하얀 햇볕 속에서는 누구나 영혼이 해리되어 보였다. 길이나 나무나 집들조차도. 그리고 그도 나도.






 점심을 먹은 뒤 그는 약속이 있다면서 서둘러 돌아가려 했다. 그는 휴게소에 차를 세운 뒤 토요일에 도시의 아파트에 가서 자고 일요일 오후에 돌아온다면 일요일 네시에 바로 이곳에서 보자고 말했다. 나는 가능한 한 사무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몹시 고통스러웠다. 신발을 잃어버리고 누더기 옷을 입고 상한 호박 속에서 기어나온 것 같은 참담한 기분이었다. 막 내린 무대처럼 가설의 게임은 끝나고 몸 안에서 빛나던 불빛은 꺼져버렸다. 더 나쁜 사람이 더 잘 사랑에 빠지고 더 끝까지 사랑한다는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김주영은 낮에 전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산 속 집에 전화를 걸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의 음성은 기대에 가득 찼다.


 김창수였다.



‘ 잘 들어갔어요? ’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몇 년 동안이나 못 본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를 갑자기 듣는 것 같았다.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 네, 이제 막 들어왔어요 ”

‘ 오래 걸렸네 ’

“ 휴게소에서 차 마시고 들어왔어요 ”

‘ 누구랑? ’



 그가 너무 서둘러 물었기 때문에 나는 소리없이 웃었다.



“ 휴게소 여자랑요 ”

‘ … 약속 장소로 가는 중인데, 궁금해져서 전화했어요. ’

“ …… ”

‘ 오후 시간 잘 지내요. 너무 우울해보여. 하긴… 늘 숲속 집에 혼자 있으니, 흡사 새의 마음 같을거야. ’



 그는 생각한 것보다 꽤 친절한 사람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지고 눈앞이 환해졌다.



“ 고마워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

“ 아주 심심하면 그림을 그려보는것도 좋을 텐데, 편지를 쓰거나 수신인은 마을의 우체국장으로 하고 ”



 마침내 나는 조그맣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는 그제서야 만족한 듯 전화를 끊겠다고 말했다.



“ 잘 다녀와요. ”



 전화를 끊고 일어서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인간의 불행은 자명한 사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 이상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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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신알신울려서 보는데 진짜 정말재밌어요ㅠㅠㅠㅠㅠㅠ작가님 글 정말 재밌습니다ㅠㅠㅠㅠㅠㅠ
11년 전
독자2
늘 잘 읽고있습니다! 이번편도 잘읽고가요~
11년 전
독자2
지금은 겨울인데 글 속의 배경은 여름이라 그런가, 더 불안해 보이기도 해요. 게임이 시작되었네요. 주인공들의 대사가 가슴을 콕콕 찌르는것 같아요. 문장들을 읽어 나갈때마다 감탄하게됩니다. 어딘지 긴장감이 흐르는 글. 다음편도 기대해요 작가님. 꾸준히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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