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중궁궐 03
w. Cecilia
1
정국은 제자리에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지민은 그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더니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는 정국을 불러 자기 앞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왜"
"지금은 마마의 호위무사가 아닌 오랜 벗으로서 말씀 드리는겁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저한테요? 그럴리가요. 제가 보기엔 마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보이는걸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제 무과 시험장에 찾아가신 후 계속 불안해보이십니다. 혹,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것입니까."
십몇년을 정국 옆에서 함께 울고 웃던 지민이기에, 정국의 심난한 마음 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게 말이다. 항상 옆에 있을 줄만 알았던 것이 갑자기 예고도 없이 사라지면 이리도 불안한 것이냐."
지민은 정국의 물음에 입을 꾸욱 닫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는 해줄 말이 생각난듯 두 손바닥을 쳤다.
"그저 그 자리에서 기다리며 항상 옆에 있던 것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나서보심이 어떠하십니까. 항상 옆에 있을 줄만 알았다는 것은 마마께서 그만큼 너무나 당연하게 그 것과의 관계를 생각하신 것이라 사료됩니다. 어떤 것이든 당연한 일은 없습니다. 직접 하나 하나 매듭을 풀어가시면 그 해결의 끈이 보이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정국은 지민의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 지민아, 내가 외출했다는 말은 비밀로 해야할 것이야."
정국은 놀라서 어버버하는 지민을 뒤로 한 채 문을 열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2
언제나처럼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 곳에서 정국은 태형을 만났다.
고개를 이리 저리 돌려가며 정국은 태형을 찾았다. 찰나가 지났을까, 정국의 바로 앞에 태형이 서 있었다.
3
갑작스런 태형의 등장에 정국은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뻔 하였다. 너무 급하게 궐 밖을 나오는 바람에 도포 매듭도 제대로 매지 못한 정국의 모습은 태형이 보기에 굉장히 우스꽝스러웠다. 태형은 그런 정국의 모습을 보더니 작게 키득대며 웃었다. 그리고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정국의 팔목을 잡더니 복잡한 시장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그 둘은 시장 이리 저리를 정처없이 걸었다. 이 정적을 깨는 것은 태형의 한마디였다.
"어찌 그렇게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계십니까? 도깨비라도 보셨습니까?"
자신의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와 같은 태형의 말투에 정국은 안심이 되기도 또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하였다.
"뭐.. 근데 한동안 어디를 갔다가 온 것이냐."
"말씀을 드리자면 참 깁니다. 근데 참 신기하기도하지요."
"뭐가 말이냐?"
"왠지 오늘 시장에 나오면 정국님을 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 곳에 왔는데, 바로 제 앞에 정국님이 계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태형은 천진난만하게 정말 정국을 우연히 만난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는듯 헤실헤실 웃으며 잡고 있던 정국의 손목을 위 아래로 흔들었다. 정국은 그런 태형의 모습에 지금까지의 걱정과 화는 다 잊은듯 어느새 함께 웃고 있었다.
"정국님 혹시 경단 좋아하세요?"
"경단 말이냐?"
"이 곳에 평양에서 제일가는 경단을 파는 곳이 있습니다! 어제 밤부터 그 경단이 너무 먹고 싶어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눈을 뜨면 정국님이랑 그 경단을 꼭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늘 경단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태형이 데려간 곳은 굉장히 작은 가게였다. 손님은 한 명도 없었고 늙은 남자 한 명이 밖에서 경단을 밀가루 위에 휘휘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아저씨 저 왔어요!"
"어, 태형이구나! 오늘은 손님이랑 같이 왔네. 저기 앉아라. 곧 가져다주마."
태형이 자주 가는 가게인 듯 했다. 정국은 생전 처음보는 가게의 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구경을 했다. 꾀죄죄한 차림의 남자가 손으로 경단을 이리 저리 굴리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걱정이 되었다. 항상 궁 안에 최고의 궁녀가 내리는 상만을 받아서 먹었기 때문에 저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경단이 접시에 담겨 나오자 태형은 지체않고 손으로 경단을 집어 입 안으로 쏘옥 넣었다. 입 주위에 어지럽게 밀가루가 묻었다. 태형은 입 안 가득 경단을 물고는 정국에게 말을 건네었다.
"정국님도 어서 드십시요. 따뜻할 때 먹어야 더 맛있습니다."
정국은 주저하더니 살짝 엄지와 검지로 경단을 집었다. 그리고는 태형이 볼새라 고개를 돌려 입을 살짝 벌려 경단을 넣었다. 입 안 가득 따스한 기운이 퍼졌고 갓 끓인 팥이 정국의 입 안을 채웠다. 처음 먹어보는 맛에 정국은 마냥 재미있었다. 언제 걱정했었냐는 듯 재빠르게 눈 앞에 놓여진 경단을 모두 먹어치웠다.
"이게 경단이라는거구나. 매우 맛있어!"
"다행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부터 배고플 때마다 이 곳에 와서 아저씨가 주시는 경단을 공짜로 먹고는 했었습니다. 그 때에는 하나만 먹어도 그렇게 배가 불렀었는데, 어느새 한 접시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웁니다."
4
"근데 말이다."
"예?"
"무과 시험은..어찌 됬느냐? 시험은 보긴.. 한 것이냐?"
정국은 조심스레 태형에게 물었다.
"그러게요. 정국님이 잘 보라고 행운의 돌까지 주셨는데, 시험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던 것이냐?"
"글쎄요, 단 한가지 이유라면 제가 그냥 제 아버지의 아들이라서랍니다. 정작 저는 제 아버지가 누군지 이름은 무엇인지, 생전에 어떤 삶을 사셨는지조차 모르는데 말이죠."
태형은 품 안에 넣어뒀던 호패를 꺼내 정국에게 보였다.
"다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누구보다 자신 있었는데... 아무도 안 알려줍니다. 왜 아버지의 아들인 이유로 시험을 보지 못하는지. 궐 근처에 들어갈 수 조차 없는지. 이 나라의 임금도 무심하시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그렇게 방을 띄우셨으면서, 정작 능력은 커녕 가문의 그림자에 가려 기회조차 앗아가는 이 나라가 어찌 백성을 위한 나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아들이란 이유로 시험 응시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냐?"
"예. 저희 아버지가 반역이라도 저질렀던 것일까요? 기억의 한 칸도 차지하고 있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에 궁금증만 더 커졌습니다. 예전에는 그립기라도 했는데, 요새는 그저 아버지를 떠올리면 원망, 그 자체입니다. 이제 어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아무리 외쳐 불러봐도 아버지는 아무 답을 해주지 않으셨어요. 뭐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태형의 대답에 정국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조선의 왕자임을 밝히고 태형을 당장이라도 궐 안에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정국의 정체를 태형이 알게 된다면 분명 더 이상 정국을 만나려하지 않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지민의 말이 생각났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인'이 있으면 '과'가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느꼈는지 태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기지개를 핀다.
"괜히 제가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나 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든 되겠지요. 어머니가 싫어하시겠지만 우선은 일이라도 알아보려 합니다. 어?"
태형은 다시 쭈그려 앉아 정국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왜그러느냐?"
당황한 정국의 모습이 웃긴듯 태형은 두 팔을 푸득대며 웃었다.
"아니 가만히 계세요."
그러고는 검지로 정국의 윗입술을 닦아내었다. 아마 아까 경단을 먹다가 입술에 밀가루가 묻은 모양이다. 태형은 밀가루를 자기 옷에 스윽 닦더니 앉아 있는 정국을 일으켜 세웠다. 너무 오래 앉아있던 탓인지 한 쪽 무릎이 저려왔다. 겨우 몸을 가누고 일어나서는 정국도 기지개를 폈다.
"감사해요."
"뭐가 말이냐?"
"그 곳에 있어주셔서요. 정말 정국님이 나타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맛있는 경단도 같이 먹고 말이죠."
분명 머릿 속은 복잡한 걱정거리로 가득차있을 태형이었지만, 겉으로는 한없이 밝았다. 정국은 그런 태형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신분으로는 그 무엇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만간 또 뵐 날이 오겠죠?"
*
정국과 태형이 비단 장수로서, 그리고 나물을 파는 사내로서 만나는 날은 이 날이 마지막이었다.
이들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 다음의 둘의 만남이 어떠하였는지.
분명 당연한 우연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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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아입니다. :D
정성스럽게 댓글 달아주시는 독자분들 덕에 힘내서 연재하고 있답니다.
암호닉은 항상 받고 있습니다. 글 연재 이후에 책으로 구성해서 선물을 드릴 예정이니 많이 신청해주세요.
좋은 밤 되세요.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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