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중궁궐 05
w. Cecilia
1
"미치겠다. 잘 한 선택일까."
태형은 양 손으로 기다란 치마자락을 돌돌 동여매어 붙잡고는 뒤뚱뒤뚱 걸었다. 아직 치마를 입은 채로 걷는 것이 어색하였다. 기방에서 일하고 있는 어린 꼬마 아이가 쪼르르 나오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빤히 태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댁은 누구십니까?"
"오늘부터 이 곳에서 지내기로 한 기생 운화입니다."
"기생..이요?"
어린 꼬마 아이는 까치발을 들어 태형의 얼굴에 좀 더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었다. 그리고는 왼쪽 오른쪽을 훑어보더니 신기한 듯 멍하니 태형을 구경하였다. 태형은 벌써 들켜버린 것인가 싶어 최대한 자신이 지을 수 있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두 눈을 쫘악 찢어 웃고 입을 벌려 잇몸 웃음을 지어 보였다.
"키가 매우 크십니다. 여인이 이렇게 키가 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늘 알았습니다."
"예.. 제가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덕에 성장이 뭇 다른 여인들보다 남달랐습니다."
"그리고..."
태형은 빨리 기방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러나 눈 앞의 이 꼬마아이는 좀처럼 길을 비켜주지 않고 계속 신기한 듯 두 눈을 꿈벅이며 태형을 구경하였다. 태형은 헛기침을 두어번 하더니 양 손으로 치마자락을 살짝 올리어 두 무릎을 굽히었다.
"이 곳으로 오기까지 매우 고단하였사온데, 어서 들어가서 저는 쉬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꼬마 아이를 오른손으로 밀어내고는 저벅저벅 기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중에도 그 꼬마는 태형이 씩씩하게 걸어가는 뒷 모습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분명 저 운화라는 자는 예사 여인이 아닌 듯 하옵니다..."
2
기방의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태형은 새로 온 기생이 묶는 방 제일 안 쪽에서 지내게 되었다. 방 안에는 온통 화려한 장신구, 거울로 가득하였고 향긋한 꽃내음이 태형의 코를 자극하였다. 태형은 고단한듯 거칠게 저고리의 매듭을 풀어 제끼었다. 태형을 죄던 끈을 풀고나니 그제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이런 옷을 항상 입고다니는 여인들이 참 대단하구나."
태형은 앞에 놓여진 작은 거울 앞에 서서 이리 저리 얼굴을 돌려보았다.
"아무리봐도 꽃다운 여인의 얼굴을 하였는데 어찌 저 꼬마는 날 그리도 노려본게지."
태형은 거울 앞에서 최대한 이쁜 미소를 지어보려 이 표정 저 표정을 지어보았다. 그러다가 그러고있는 자신의 모습이 살짝 께름칙했는지 거울을 벽쪽으로 돌려 놓았다.
"아무리 궐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거니와 이런 꼴을 어머니가 보시게 되면 까무러치시겠지. 그리고 정국님도.."
갑자기 태형이 여인의 모습으로 정국 앞에 나타난다면 정국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분명 엄청나게 자신을 비웃을 것이 뻔하다. 그리고 평생 이 일로 놀려댈 것이다. 아니면, 이런 태형의 모습을 보고 징그럽다며 도망갈 지도 모르지. 아니지. 오히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면 날 더 반겨주실지도 몰라.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지금쯤 정국님은 무얼 하고 계실까... 이제는 더 이상 시장 안을 돌아다니며 맛있는 경단을 먹을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쉽기도 했다. 궐 안에 들어가게 되면 정국님을 볼 수는 있을까. 기생으로 분장한 지라 자유로운 외출이 허락될 리가 만무했다.
뒤뚱뒤뚱대며 반나절을 걸어온 탓인지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벗어둔 저고리를 둘둘 말아 바닥에 대고 태형은 그 위에 자신의 머리를 갖다대었다. 꽃 내음에 취한 듯 그대로 태형은 깊은 잠에 들었다.
3
"오늘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시간에 이 방을 뿌릴 것이야."
진은 정국에게 한 장의 종이를 건네었다. 정국은 그 종이에 쓰여진 내용을 한참 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괜찮겠어?"
"뭐가?"
"이 방이 뿌려지게 되면 먼저 의심받게 되는 사람은 형일거야. 반역을 도모한다고."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난 항상 그런 눈초리를 받는걸. 괜찮아."
정국은 속상한 듯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을 응시했다. 진은 그런 정국의 눈초리가 느껴진 듯 정국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타일렀다.
"나를 이렇게 생각해주는 사람은 이 조선에서 너 하나밖에 없을거야. 걱정마라. 이미 나는 네가 내 동생인 것만으로도 그리고 니가 나를 도와주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벅차오르니까. 내 운명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이 정해준 것이니 어쩌하겠니. 이를 탓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한번 살다 가는 세상에 그 운명에 속박된 채 자신을 그 안에 가둔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어?"
"형 조금만 기다려. 내가 어서 더 커서 조선의 왕이 되면 형을 꼭 이 곳으로 부를거야."
"말 만으로도 고맙다! 네가 왕이 되어도 그렇게 조선 정치가 호락호락하지는 않을거야. 난 다 이해하니까 네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날 걱정하지는 말고. 난 절대로 널 원망하는 일은 없으니까. 알았지?"
환하게 웃으며 조곤조곤하게 자신에게 말을 해주는 진의 모습에 정국은 마음 속으로 울컥하고 눈물이 치밀어올랐다. 이렇게 좋은 형인데.. 왜 궁 안 사람들로부터 온갖 의심을 받아야하고 지은 죄도 없는데 조용히 숨어 살아야하는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으로 뜻을 펼쳐나가는 진 형의 모습이 너무나도 멋져보였다. 자신의 힘이 좀만 더 커지면, 진 형에게 받은 사랑과 관심을 되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일의 시작은 바로 오늘 밤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아버지의 말을 착하게 들었던 정국이기에 무술이면 무술, 학문이면 학문 어느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날렵한 몸매 덕택에 한 번도 일대일 대결에서 져본 적이 없었다. 이런 정국의 투입은 진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진은 몇 년 전, 크게 가슴팍과 복부를 다치는 바람에 더이상 직접 몸으로 뛰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저 뒤에서 보조하는 역할만을 해왔기 때문이다.
"명심해 정국아. 그 무엇보다도 심지어 나보다도 너의 몸이 제일 소중하다. 혹여나 그 몸에 칼집 하나라도 내는 순간 나는 너를 더 이상 이 곳에 두지 않을 것이야. 알았지? 이 일을 하면서 분명 동지들이 잡혀가거나 다치는 경우가 허다하게 생길 것이다. 그럴 때에도 너는 절대로 끼어들지 말고.. 그런 모습이 나에게 띄는 순간 나도 내 방식대로 널 지킬 수 밖에 없다."
"형 그런게 어딨어? 도리어 그건 내가 용납을 못할거야."
"형 말 들어."
진은 정국의 오른쪽 볼따구를 주욱 잡아당겼다. 어린시절 진이 정국에게 자주 치던 장난이었다. 그러자 정국은 긴장이 풀리는지 환하게 웃었다. 그래, 지금부터 걱정할 일은 아니다.
4
도대체 몇시간을 잔 것일까. 어둑해진 느낌에 태형은 두 눈을 떴다. 방 밖은 차림상을 준비하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태형은 주섬주섬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그러다가 저고리를 입고 있지 않은 것을 깨달았는지 재빨리 문을 닫고 고리를 걸었다.
"미쳤어..."
구석에 놓여져 있던 초를 켜고 태형은 베고 있던 저고리를 툭툭 털더니 다시 몸에 걸쳤다.베고 잔 터라 저고리가 구깃구깃했지만 태형이 그것을 신경쓸 리는 만무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태형은 방 밖을 나섰다.
"당신이 운화입니까?"
방 문 밖에는 태형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옆 방 기생이 나와있었다.
"아..예.. 안녕하십니까."
태형은 지난밤 내내 연습했던 나름의 여인의 인사를 꾸벅 했다.
"저도 오늘 이 곳에 처음 들어온 기생 나비라고 하옵니다. 아까 인사를 드리려했으나 잠을 청하고 계신듯하여 이렇게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나비라는 기생은 굉장히 뽀얀 피부에 까만 눈을 가진 여인이었다. 하늘을 향해 솟은 올곧은 속눈썹에 앵두같은 입술이 정말 사내들이라면 혹할만한 외모였다. 태형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쓰윽 더듬었다. 거칠거칠한 피부, 바싹 마른 입술... 아까 그 꼬마의 따가운 시선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웃긴듯 태형은 피식하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에 귀하신 손님이 오신다고 하옵니다. 하여, 함께 그 준비를 도우라는 부탁이 있으셨습니다."
"귀하신 손님이라? 어디 양반댁 자제분들께서 잔치라고 여신답니까?"
태형은 살짝 비꼬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나비는 그런 태형의 물음에 살짝 당황한 듯 하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아니요. 저도 그분들이 어떤 분들인지는 모르옵니다. 그러나 꽤 오래전부터 이 곳의 단골 손님인듯 하옵니다. 손님 모두가 검은 도포를 두르고 오신다고 하여 이 곳 기방에서는 그분들을 흑운(黑雲)'검은 구름'이라고 부른답니다. 오시기 며칠 전부터 기생들은 그분들을 볼 수 있다며 난리도 아닙니다. 소문을 듣자하니 굉장한 미남들이랍니다. 운화님께서도 어여 꽃단장을 하고 준비하시와요."
태형은 속으로 지금이 꽃단장을 한 상태인데 더 이상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되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고달프구나 기생이라는 것은. 흑운이라는 자라. 분명 양반집 자제들이 무리지어 자기들끼리 하는 정치놀음인가 싶었다. 태형은 기지개를 주욱 피고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꽃단장이라...
5(다음화 예고)
검은 천에 가리었지만 분명 그 두 눈망울과 오똑 솟은 코는 정국님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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