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중궁궐 02
w.Cecilia
1
정국이 급히 떠나고 태형은 혼자 길에 남았다. 아직도 아까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시장 바닥을 가로지른다.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붙잡고 오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재잘재잘 말하고 싶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혼자 자랐던 터라, 늘 외로웠던 태형이다. 아버지는 생전에 굉장히 유명한 무인으로서 조선 팔도에 이름을 떨쳤다고 어머니는 늘 말씀해주셨다. 그러나, 한번도 아버지의 이름 세글자를 들어보지 못했다. 태형이 매일 하는 일이라곤 어머니가 다듬은 나물들을 시장에 나가 파는 일이었다.
"아차."
정국과 돌아다니느라 남은 나물들을 파는 것을 까먹은 모양이다. 태형은 성급히 천가방에서 나물들을 꺼내본다. 역시나 시들시들한 것이 팔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어머니에게 받을 꾸지람이 조금 두렵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 굉장한 사람을 만났다. 또래 아이들은 태형과 놀아주지 않는다. 항상 허름한 옷에 꾀죄죄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탓에, 가까이하기를 꺼렸고, 태형에게 가까이가면 병이 옮는다는 이상한 소문만 퍼뜨리며 괴롭혔다. 그래서인지 태형은 또래 아이들보다 의젓했고, 혼자 있는 것에 익숙했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태형이 왔니? 점심은 잘 챙겨먹었고?"
"예. 어머니는 오늘 나물 많이 캐셨어요?"
"가뭄이 가뭄인지라 산에 식물들이 씨가 다 말라버렸더구나. 그래도 걱정은 마라. 이 애미가 너 하나 굶길 것 같으냐."
"이젠 좀 쉬세요. 저도 이제 다 컸는데, 제가 일이라도 찾아볼게요."
"일은 무슨..태형이 너는 일할 생각은 하지 말고 출세할 생각을 해라. 본래 우리 가문이 어느 가문이었는지 아느냐."
"어머니께서 항상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한번도 제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성함은 무엇인지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다 생각이 있어 알려주지 않는 것이니 너무 섭하게 생각은 하지 말거라. 자, 오늘 하루 고단했을터인데 저녁상이나 들자."
2
"정국 마마"
지민은 매우 심각한 표정이다.
"또 왜 그러느냐?"
"혹 궐 밖에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도 만나신겁니까?"
정국은 뜬금없는 지민의 물음에 어이없다는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무슨 얼토당토않는 소리냐. 내 항상 여인보기를 돌같이 하거늘.."
"하긴.. 요새 마마께서 외출하실 때에 차림을 보면 여인을 만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항상 제 옷을 빌려 입고 나가시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건 내 옷을 입으면 너무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이기 때문이다."
"내일도 나가십니까?"
"어디를?"
"궐 밖 말입니다. 내일은 저녁에 연회가 있사옵니다. 저번처럼 늦게 들어오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걱정말래도. 꼭 시간은 지켜서 돌아오겠다."
3
아침 해가 밝았다. 정국은 이른 아침부터 세안을 하고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허름한 면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었다. 거울 앞에 비춰진 모습이 흡족한듯 정국은 헤실헤실 웃어댄다. 수많은 눈이 자신을 향해 있는 곳. 한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는 곳. 이런 답답한 곳을 벗어나 궐 밖을 나설 때면 그 어느때보다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궐 밖에는 태형이 기다리고 있다.
4
"오래 기다렸느냐?"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는걸요. 오늘은..어찌.."
태형은 평소보다 허름한 정국의 차림을 보고 의아해하였다.
"아.. 이건 내가 평소에 입는 차림이다. 한동안 내가 다른 일이 있어 그런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다녔던 것이야."
"그렇군요!"
태형은 마냥 해맑다. 정국의 말이라면 뭐든 바로 믿어버린다.
"오늘은 내가 볼 일이 있어 오래 있지는 못할 것 같다."
"괜찮습니다. 저도 할 일이 생겼거든요."
"무슨 할 일?"
"저 결심했습니다. 궐 안으로 들어갈거에요."
정국은 갑작스런 태형의 말에 사레가 들린 듯 헛기침을 하였다.
"갑자기 왜..?"
"요새 가뭄에 어머니도 많이 편찮으십니다. 집에 장정이라고는 저 하나 뿐인데 제가 어머니를 부양해야 합니다. 헌데, 어머니께서는 제가 일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니 돈을 많이 버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궐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태형의 다부진 말에 정국은 말없이 입을 다물고 조용히 듣고 있었다. 태형의 두 눈이 반짝였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태형이 궐 안에 들어온다는 것을 무척이나 반길 일이었다. 하지만 태형이 자신이 조선 임금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되면 일은 달라질 것이다. 지금처럼 태형은 자신을 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때의 섭섭함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뭐 너는 다 잘 하니까 꼭 궐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구나."
"정국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응.."
"그렇게 응원해주신다니 저도 더 힘을 내야겠습니다."
"근데 어찌 들어오려하느냐?"
"곧 무과 시험이 있을 것이라 합니다. 제가 이래뵈도 조선 팔도를 휘청였던 자의 아들입니다. 저에게도 그 피가 흐르고 있지 않겠습니까?"
태형은 나뭇가지를 쥐더니 휘휘 칼을 내젓는 시늉을 보였다. 그리고 정국을 보더니 환하게 웃는다.
5
[네가 궐 안에 들어온다면 궐 안의 내 삶이 더 행복할 것 같다. 너를 항상 볼 수 있을테니.
하지만 태형이 너는 어떨지 모르겠구나. 답답한 궐 안에서 너는 지금과 같은 웃음을 지을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6
"정국님."
"응?"
"감사합니다. 그냥 모두 다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최근 몇주가 너무나도 행복했어요.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고, 그 장소에 다가가는 기분이 처음이었거든요. 그리고 어머니 외에 저를 이렇게 따뜻하게 맞이해준 사람이 정국님이 처음입니다. 그냥 갑자기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
또 천진난만하다.
정국은 태형이 말 하나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그의 입술을 예의주시했다. 그 작은 입에서 또랑또랑하고도 낮은 목소리로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너무나도 오랫만에 들어보는 진심어린 말이다. 정국은 태형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을 펼친다.
"자, 무과에 꼭 합격해서 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부적이다."
태형의 손 위에는 작은 돌맹이 두 알이 놓여졌다.
"이건 그냥 돌맹이 아닙니까?"
"그냥 돌맹이라니. 이래뵈도 행운의 돌이다. 항상 간직하고 다니면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태형은 큰 선물이라도 받은 양 돌맹이를 손에 꼬옥 쥐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하며 정국의 주위를 돌았다. 이제는 그런 태형의 모습이 싫지 않은지 정국도 가만히 있는다. 그렇게 그 두 소년의 머리 위로 밝은 초승달이 날아간다.
7
"분명 오늘이 무과 시험이렸다?"
"네. 근데 갑자기 왜 시험은 구경하시겠다고 이른 새벽부터 이 곳으로 행차하신겁니까?"
지민은 졸린 눈을 비비며 퉁명스럽게 정국에게 말한다.
"후에 나를 보필하게 될 무사들 아니냐. 내가 직접 봐야지 안심이 될 것 같단말이다."
정국은 시험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하나 하나 얼굴을 확인했다. 이 사람들 중 어딘가에 태형이 있을 것이다. 지금쯤 긴장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을 태형에게 응원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한 명, 두 명.. 그렇게 수십 명의 사람들을 지나쳤다. 그러나 태형은 그 날 시험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8
그 날 이후로, 정국은 태형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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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아입니다. :D
미리 준비해두었던 2회의 분량을 하루에 써내려갔네요.
암호닉 신청은 항상 받고 있습니다. 차후에 완결이 나고 책으로 제작하여 암호닉을 신청해주신 분들 중 몇분에게 선물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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