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Tiger, Scissors Rabbit
w.문달
게시판에 교육청 주관 중고등학생 미술 실기 대회가 열린다는 공고문이 붙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마침 평일에 아주 정당한 핑계로 학교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됐다. 무려 체육이 든 날이었다! 무조건 나가야지.
주먹을 불끈 쥐고는 명단을 적는 반장에게 나가겠다고 말했다.
"체육 빠지고 싶어서 나가는 거지."
자리에 앉자마자 나온 이동혁의 말에 놀래서 몸을 들썩였다.
"아어,아,아니거든? 나 원래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서.."
주눅이 들었다. 목소리가 뒤로 갈 수록 소심해졌다.
"상. 타 와."
입상이라도 못하면 물어버릴 기세였다.
몰래 입을 씰룩거렸다. 뭔 상관이야. 밖으로 꺼냈다면 접힌 귀가 벌써 축 처졌을 것이다.
어쨌거나 당장에 다음주만을 기다렸다. 배구 수행평가 날인데 괜찮아~어차피 최하점이야~
그런데.
"뭐야? 너가 왜 여기있어?"
"뭐야?"
"아니..아니. 그..놀래서."
"나도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서."
이동혁이,
미술 실기 대회 장소인 ㄷ예술 고등학교 강당 안에 있었다.
같은 학교 교복에 내적 반가움을 느꼈다가 바로 절망했다.
하필 동질감을 이동혁에게서 찾다니.
믿기지 않아하며 서 있으니 나를 한 번 흘겨보더니 자리를 깔고 앉는다.
큰 종이백을 거꾸로 들어 바닥에 탈탈 물건들을 쏟더니 하나씩 들어 요리조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손 떼라곤 보이지 않는 새 것들이었다. 어디 화방에서 싹쓸이라도 했냐.
아무렴 나와는 상관없지 하며 이동혁과 창문 하나 사이 거릴 두고 앉았다. 깜빡하고 닦아놓지 않아 굳은 물감으로 더러운 팔레트에 물통을 들고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뒤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몸을 살짝 틀어보니 이동혁이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물통이라도 손에 들고 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너무 대놓고 날 따라 나온 모양새였다.
내가 화장실 쪽으로 가는 걸 확인해서야 따라오던 걸음이 느려졌다. 지금은 말을 꺼내도 되겠지 싶어 근질거리던 등을 홱 돌렸다. 바로 시선을 딴 데 두고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건들거리는 이동혁은 내가 말 없이 멈춰 서서 저만 쳐다보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뭘 쳐다 봐?"
"왜 나 따라와?"
"내가 널 왜 따라가. 나도 화장실 가려고 나온건데."
그러더니 바로 남자 화장실로 들어간다. 머리를 갸웃거리며 나도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설마 설마 하고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정신이 팔려서 하마터면 물만 받고 팔레트는 잊을뻔 했다.
"저기..다 그렸어?"
"아니."
"그. 그래."
"이동혁..다 그렸어?"
"왜 자꾸 물어 봐?"
"아니..그냥.."
호랑이새끼..진짜 목적이 뭘까. 대회 시작부터 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흘깃거리며 보는 이동혁 때문에 도무지 붓을 든 손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눈치를 본다기 보단 포식자를 관찰하는 맹수였다. 금방이라도 숨기고 있던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낼 것 같은.
약간의 신경질이 들어간 말투로 왜 자꾸 묻냐 하는데 그러는 너는 대체 왜 자꾸 내 쪽을 쳐다보냐 되묻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대차게 구는 건 내면의 김도화에서만 그친다. 나 이렇게 약해서 어떻게 살지? 울컥하네.
최선은 그냥.. 이라 말하며 어기적 몸을 더 틀어 차라리 피하는 거다.
"야."
"으응? 나?"
"어.가만히 있어."
"어?"
뭐,이젠 내가 뒤척이는 것도 거슬려?
제 할 말만 딱 하고선 열심히 혀까지 내밀며 거침없이 손을 놀리길래 나도 이만 얼른 해야지 하고 물통에 붓을 담갔다.
"너는 뭐 그렸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내 눈치만 보다가 꺼낸 말이었다. 우리 반에선 나와 이동혁만 출전한 데다가 다른 반 애들이라 해봤자 친한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나마 안면 있는 이동혁이랑 친한 체 정도 하고 싶은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아무거나 그렸어."
"..그,그래? 되게 종류 많았는데 아무거나..?"
이동혁이 귀찮아하는 표정을 하고선 팔을 앞으로 뻗어 기지개를 켰다.
뒤로 고개를 젖혀 기대고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인물."
결과는 언제 나오나 하고 기다린 게 삼 주 정도 됐나. 담임 선생님이 실기 대회에 나간 우리 반 학생 둘이 상을 받게 됐다며 일으켜세우셨다.
나란히 일어난 이동혁과 나는-나만-어리둥절해하며 눈을 크게 뜨고 칠판 앞으로 나갔다. 이동혁은 거만하게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짝다리를 짚고 섰다.
"동혁이는 특선, 도화는 장려상. 축하한다. 짝꿍끼리 받았네."
애들이 오오- 거리며 박수를 쳤다. 쑥스러움에 고개도 못 들고 빠르게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정재현이 머리를 쏙 내밀고 이동혁의 어깨를 흔들었다. 뭐 그렸냐.
이동혁이 몰라, 아무거나. 하며 대답을 회피하다가 내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작게 말했다.
"그냥.
김도화."
못 들은 척 움직임의 끊김 없이 친구 자리로 달려갔다.
**
"그래서 김동영은 나랑 이민형 말고는 밥 먹을 친구가 없대?"
내 말에 김동영이 요플레를 떠먹다 말고 발끈했다. 삐뚤어질거라더니 내 요플레를 뺏어 먹으려길래 손으로 막고 피하고 하는 작은 전투를 벌이는 걸 그 옆에서 이민형이 콧잔등에 주름이 접힐 정도로 웃으며 지켜봤다.
"밥은 꼭 반 친구들이랑 먹어야 된다는 법 있냐?"
"아니, 그건 아닌데 새삼 너가 지겨워져서."
물론 나도 중학교 다닐 때 같이 밥먹는 친구들이 하나같이 다 다른반이기도 했다. 아무렴. 김동영 말대로 꼭 같은 반 친구들이랑 먹으라는 법은 없었다. 그런데 이러는 이유는 김동영을 꼭 이렇게 골려주고 싶을 때가 심심찮게 생겨서이다. 재밌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김동영이 나보다 먼저 태어난게 불만스럽다. 어딜봐서 쟤가 나보다 먼저 나와?
"와- 민형아. 들었지?우리가 지겹대. 이제 우리 둘끼리만 밥 먹자. 김도화는 같은 반 친구들이랑 먹어~"
잔뜩 토라져서는 이민형에게 팔짱을 끼는데 장난이니 그만 화 풀라며 몇 번을 사과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봤자 집에서도 만날거면서. 김동영에게 울며 겨자 먹기로 요플레를 쥐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잔반을 버리고 식수대에서 물컵을 꺼내 마시려는데 만난 정재현이 옆에서 물을 마시다가 내 어깨를 손등으로 툭툭 쳤다.
"이거 먹을래?"
"헐,고마워."
정재현은 그렇게 나에게 요플레를 주고 내 마음 속 요거트 요정이 되었다. 예로부터 먹을거 주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랬다.
내가 정재현으로부터 요플레를 받는 걸 보고 이민형과 김동영이 어깨동물 하며 다가와 이열~ 거리며 팔꿈치로 허릴 찔렀다.
"야,김도화. 너 살쪘지?"
"뭐?"
"살쪘어 살쪘어. 그래,어쩐지 얼굴이 요즘 동글동글해진다 했어 내가. "
"민형아, 김동영이 뭐래? 죽고싶대?"
김동영은 아직까지도 토라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에게 넌 그거 먹을 시간에 운동장이나 돌아야한다며 나를 질질 끌고 운동장으로 갔다.
" 제발 나의 소중한 점심 시간을 망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널 위한 거란다,사랑하는 동생."
이럴 때만 사랑하는 동생이란다. 몇초 먼저 태어난 거 가지고 뺀질거리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주먹이 쥐어졌다. 이민형은 그저 우리 가운데 꽉 끼어서는 사람 좋게 웃을 뿐이었다.
"도영~도영아~~김도영~~~"
누군가가 김동영을 찾아다니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방금까지 내 앞에서 깐족거리던 김동영이 바짝 얼어붙어 꼬리를 빼는걸 보니 엄청 무서운 존재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것보다 나도 저게 보통 목소리로는 안들리는데 가령 산기슭에서 몸을 납작하게 엎드린 채 목표를 노리는 짐승의 ..
"이태용...탱글탱글 탱탱볼 팅팅탱탱 튕겨버릴 사자새끼.."
"저건 무슨 욕이야..?"
"동~영~아~김동영! 우리 토끼!"
김동영이 고개를 팍 숙이고 팅팅 소릴 내며 종알대는데 그의 뒤에서 나는 똑똑히 보았다. 생글생글 웃으며 놀라운 속도로 김동영 뒤를 덮쳐오는 큰 사자를.
"아이고,다른 친구들이랑 같이 있었네~? 우리 도영이는 내가 좀 데려갈게. 자 ,우리 동영이 친구들이랑 작별 인사해야지?안녕 빠이빠이~"
그 유명한 이태용이었다. 새학기 첫날부터 김동영이 제 앞에 앉자마자 토끼임을 알아봤다던. 김동영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등 뒤에서 저를 껴안고 손을 움직여 짤짤 흔드는 이태용에게 자기의 모든걸 맡긴 채 그렇게 사라졌다.
"김동영 불쌍해서 어떡해..그나저나 이태용도 도영이라고 부르네."
"동영동영 발음이 혀에 쥐나긴 하지. 괜찮아. 이태용이 김동영 무지 좋아해서 저러는 거랬어."
이민형이 정말 남의 일이라 남의 일 같이 괜찮다고 말하고는 내 어깨를 붙잡고 우리 갈 길이나 가자며 앞으로 걸었다. 김동영한테 아까 정재현에게 받은 요플레나 쥐어 줄 걸 그랬다. 나는 이민형에게 너 먹지 말고 불쌍한 김동영에게 꼭 전달해주라고 신신당부 하고는 이민형 손에 직접 안겨주고 교실로 돌아왔다.
한번 앉기 시작하더니 내 주변 자리가 비면 무조건 자리를 깔고 앉아있는 친구들에게로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뭐하다 이렇게 늦게왔어 도화! 점심 시간 15분 밖에 안남음."
"아오. 일이 좀 있었엉..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한 명은 얼굴이 벌겋고,나머지는 웃겨 죽을라 하길래 뭔 재미난 얘기를 했나 싶어 물으니 대뜸 한 아이가 나를 가리키며 반장에게 물었다.
"아니 그렇게 치면 도화는?"
"응? 나 뭐?"
"앗. 그러고보니? 여주도 성이 김씨니까 못생김도화."
"아 뭐야.. 또 그런다 또."
최대한 기분 나쁜 티 내지 않으려고 타이르는 어투로 말했지만 반장과 다른 애들은 깔깔 거리며 웃었고, 나를 가리켰던 친구는 나에게 반장이 자기 성이 김씨라고 못생김미주라 했다며 찡찡거렸다.
"아 삐지지마 못생김미주~귀여워서 그래 귀여워서~아구 우리 못난이!"
"됐고, 비켜."
다른 화제로 넘어가려고 대강 장단 맞춰 웃어 주며 느슨한 틈을 노리고 있는데, 살짝 흥분에 차 목소리 톤이 격양된 반장 옆으로 이동혁이 서 있었다.
그 옆에는 허니버터칩을 들고 와그작 거리는 정재현도 같이였다. 이동혁의 말에 애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반장 자리로 갔다. 나는 반장 쪽으로 몸을 틀고 내 위에 앉으려고 목에 팔을 감아오는 친구를 안았다. 반장은 자기 바로 옆에 있는 애들을 건드리며 귓속말로 수군댔다. 검지 손가락을 살짝 들어 내 쪽을 가리키는 걸 보니 이동혁 얘길 하는 모양이었다. 내 위에 앉아있던 친구가 자기도 알려달라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반장이 허리를 숙여 우리 가까이로 다가와 속닥거렸다.
"이동혁 잘생긴거 보라고. 아,나 이동혁한테 관심 있는 것 같음."
관심 있어도 아니고 있는 것 같은거 뭐야. 입을 다물면 원래처럼 올라가 있는 입꼬리가 수줍게 미소지었다. 요즘 난 반장이 골고루 비위에 거슬린다. 이동혁 얘기를 꺼내던 날부터 그랬다. 점심 시간이 얼마 안남았다. 아이들은 슬슬 각자 위치로 가서 5교시를 준비하기에 바빴다. 나는 친구가 빠져나가고 허해진 몸을 바로 돌려 앉았다. 이동혁이 기다렸다는 듯 바로 내 책상 위에 요플레를 놓았다.
"뭐야?"
"나 이런거 안먹어."
"..고마워."
아까처럼 좋아하기라도 했을텐데 지금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찜찜했다. 왜 기분을 잡쳤다고 느낄까 하나하나 따져보았다.
교실에 오자마자 못생김도화라고 불려서? 못생김도화는 상관 없는데 마치 수긍하는 듯한 애들의 행동 때문에? 아님 이동혁? 반장이 이동혁을 좋아한다고 말해서? 예쁜 반장이 좋아하는 이동혁이 나에게 요플레를 줘서? 운동장을 걸으며 충분히 소화도 다 시켰는데 체한 것처럼 울렁거렸다. 숨 쉬는게 불편해졌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지금 이동혁이 나를 보고 있다는게 느껴졌다.
"김도화."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반장의 속삭임이 들린다. 이동혁한테 관심 있는 것 관심 있는 것
"쟤 말 신경쓰지 마. 난,"
눈자위가 뜨거워졌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속에서 뜨거운 용암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동혁이 그 다음을 한참을 바로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난, 너 예쁘다고 생각해."
무슨 의도에선지 이동혁이 그런 말을 해왔다. 어디서부터 우리 얘기를 들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급한건 그게 아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학습되지 않은 감정이었다.
누가 조금만 잘해줘도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을 잘했다. 그래서 상처 받은 적도 있었고, 친한 사이에 오해가 불거져 멀어진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혼현의 성정처럼 경계심도 많게 되었고, 얇고 넓은 것보다는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형성했다. 착각하기 전에 여러번 뒤로 물러섰다. 나는 이번에도 뒤로 몇걸음 물러설 차례였다. 그 중심엔 단연 이동혁이 있었다.
기억도, 걱정도, 상상도, 형체 없던 것들이 어느 순간 딱딱한 틀 안에 갇혀버려서 얼음처럼 굳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의미 없이 켜 둔 텔레비전은 열을 내며 혼자 수런거리고 있었다. 그대로 냅뒀다. 중간고사 바로 전 날까지 나는 내 정신을 갉작갉작 갉아먹는 벌레 때문에 단 한글자도 꼭꼭 씹어 삼킬 여력이 없었다. 보란듯이 시험은 망쳤고,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날인 체육대회에는 죽도록 나가기 싫었으나 계주와 단체 줄넘기에 명단이 적혀 넘어간지라 도살장 끌려가는 기분으로 김동영 손에 이끌려 학교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