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정각 12시의 달빛.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경수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어두운 복도를 울렸다. 이불을 뒤집어쓴 경수가 몸을 더욱 움츠렸다. 경수야, 보고 싶어. 천천히 걸어오며 느긋한 목소리로 경수를 찾는 백현의 안면에는 그의 목소리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자리 잡았다. 끼익하는 듣기 싫은 문소리가 들려왔다. 경수가 이불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경수야, 거기서 뭐 해? 이불안은 덥지 않아? 다정하게 저를 챙겨오는 백현의 목소리에도 경수는 이불을 걷지 않았다. 분명 백현이가 화났을 거야. 경수가 생각했다. 천천히 걷어지는 이불에 경수가 손에 힘을 풀었다. 어두운 방, 12시 정각을 울리는 종소리. 그리고 그날은 유독 달이 밝은 날이었다. 큰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달빛에 백현의 얼굴이 비쳤다. 백현이 경수의 이불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경수와 눈을 마주했다. 우리, 경수 왜 여기 있어.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백현의 손이 경수에 얼굴에 닿았다. 미치도록 차가운 백현의 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덜덜 떨기만 하는 경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백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경수야, 내가 무서워?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는 백현의 목소리가 경수의 귓가를 울렸다. 입을 꾹 다문 경수가 천천히 입을 때었다. 백현아. 백현만큼이나 나지막하게 울려오는 경수의 목소리에 백현이 경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백현아, 백현아.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경수의 머리칼을 쓸어넘겨준 백현의 손이 경수의 손과 겹쳐졌다. 겹쳐진 손을 바라보던 백현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지금, 뭐 해 경수야. 굳어지는 얼굴과는 반대로 백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경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점점 달빛이 흐려지는 듯했다. 백현아. 달빛이 흐려지 듯 경수의 목소리도 점차 흐릿해져갔다. 백현이 차가운 얼굴로 경수를 바라보았다. 그 차가운 시선이 마치 경수를 원망하듯 경수의 목을 조였다. “나, 무서워. 백현아, 난 네가 무서워.” “내가 너를 위해서 어떤 짓을 했는데,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해.” “백현아, 무서워. 네가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닥쳐, 도경수.” 흐려지는 경수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백현이 일어섰다. 다시 듣기 싫은 문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백현이 어두운 복도를 걸어나갔다. 백현의 발걸음 소리만이 적막한 공간을 채워 나갔다. 그날은 유독 달이 밝은 날이었다. 달빛은 창문의 틈새로 백현이 아닌 경수를 비추었다. 12시 정각을 울리는 종소리. 그리고…… 미친듯한 백현의 고함과 흐느낌 그 뒤로 백현의 발소리보다도 경수를 궁지로 몰아넣는 총성이 이 적막한 공간을 채웠다. 백현아, 제발 그냥 나를 좀 죽여줘…. 미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 경수의 입에서 맴돌았다. 달빛의 주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12년, 그 시간 동안 12시만을 가리키는 종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12년 동안 죽은 백현의 손길을, 백현의 눈빛을, 백현의 사랑을 받고 싶지 않았다. 백현아…. 넌, 날 정말 사랑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