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머문 지 꼭 나흘이 지났다. 어젯밤부터 방안이 서늘한 게 몸이 으슬으슬하다. 식은땀이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려와 옷깃을 적시는 것이 소름끼친다. 햇볕이 발끝까지 드리웠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방 밖에서 나를 부르는 상혁의 목소리에도 나는 일어나질 못했다. 일어났다, 깨어있다. 말을 하려고 수십 번을 목을 다듬어도 목소리는 목구멍을 열지 못했다. 꽉 막힌 듯 뭉쳐진 목소리는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괴기라도 고아 멕여야 쓰겄나?”
할머니의 손길이 이마를 덮는다. 유난히 차게 느껴진다.
“봄 감기는 조심해야혀. 이 늙은이도 펄펄한데…….”
방 밖에서 상혁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오간다. 할머니는 정신사납다며 그림자를 쫒아낸다. 허둥지둥 마당으로 뛰어나가는 그림자가 우스워 쉬어버린 웃음을 뱉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눈이라도 뜨고 쳐 웃으라며 사과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고 일어나셨다.
보통 사람의 숨소리가 한 줄기의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가는 것과 같다면 나는 지금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를 뻗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뭇가지는 방 안 전체를 채우고 내 목을 옭아맸다. 목이 아파 우는 소리가 났다. 그마저도 구멍이 뚫린 듯 듣기 흉한 소리다. 문이 갑작스레 열리고 상혁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서둘러 들어온 모양새와 다르게 상혁은 조용히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흐릿한 정신 때문인지 도무지 표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화난건가? 아니, 화날 이유는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상혁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얕은 한숨을 뱉고는 벽에 한쪽 머리를 기대었다.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위압감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 실웃음 나게 하던 녀석이, 이젠 낯설었다.
“짐, 마당에 뒀어요.”
무슨 소리냐며 입을 열다 한순간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침 한 방울에 기침이 났다. 따끔함에 눈을 질끈 감자 뜨끈한 것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만있던 상혁이 내 등을 받쳐 앉히고는 금세 식어버린 물길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내 팔을 잡아 나를 일으킨다.
“마을 밖까지만 데려다 줄게요.”
요 며칠간 해가 기분 좋게 밝더니 오늘은 구름에 가려진 것이 우리 둘의 사이를 그대로 하늘에 비친 것 같았다. 재잘재잘 이야기를 잘도 꺼내더니 오늘따라 말이 없다. 어색함에 헛기침을 두어 번 하니 반사적으로 나를 노려본다.
“할매한테 들었어요. 역마.”
한쪽 어깨에 내 짐을 멘 상혁이 제 발 끝에 닿는 모든 것들을 걷어 차내며 말했다. 지금 당장 할 말이 없는 나는 그저 그 발에 치이는 것들을 구경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그 발이 멈출 때까지 구경했다.
“잘 가요.”
녀석이 짐을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나는 짐을 받아 들었다. 든 것이 얼마 없는지 무겁지는 않았다. 그 점이 내게 허전함을 안겼다. 무언가를 두고 온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것이 그저 녀석과 헤어짐으로 인한 아쉬움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언젠가, 또 보자.”
매끄럽지 않은 목소리가 아쉬웠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 안타까웠다. 목을 가다듬고는 상혁을 보던 고개를 돌렸다. 이제 가야하는데……,
“……언제요?”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다음에는 안 그러면 되지, 하고 뱉은 말에 긍정했던 녀석의 말도 떠올랐다. 기대감과 비슷한 것이 차오르면서 성대를 두드렸다. 혹시 괜찮다면 같이 가지 않을래? 하지만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다. 다시 밀어 넣어 꾸역꾸역 말을 삼켜냈다.
“네 목에 막걸리가 다디달아질 때. 그 때 같이 막걸리 한 잔 하자.”
웃음을 바란 말이었다. 그리고 너는 내 바람과 같이 환하게 웃어주었고, 나는 뒤돌아 설 수 있었다. 기분 좋게 걸을 수 있었다. 역을 떠나 달리는 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쉬움이 크겠지. 헌데 후에 드는 생각으로 설렘이 있지 않겠는가. 혹시 아니더라도 나는 그런 설렘이 있지 않은가.
연약한 그대여 강길 따라 보내드리리
여릿한 그대여 흘러흘러 죽 아름다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상혁은 습관적으로 노랫말을 굴렸다. 그 쓰디 쓴 것이 어떻게 달아질 수가 있다는 건가.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신발부터 벗어던지고 밥그릇에 막걸리를 부었다. 한 모금, 목구멍으로 흘러 내려가는 놈이 필요 이상으로 텁텁하다. 상혁은 제 방 이불 밑에 놓아 둔 알사탕 하나를 막걸리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 모금. 아직도 제 목은 희뿌연 액체를 거부했다.
상혁은 밥그릇을 든 채로 마당을 바라보았다. 대문 밖으로 보이는 영감네 목련나무가 벌써 보잘것없어졌다. 하늘이 울고 나면 겨우 남은 저것들도 땅으로 곤두박질치며, 우는 하늘을 위로 할 테지.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끝까지 호흡하며 강하게. 여릿하지 않게. 내년 봄에도, 볼 수 있겠지. 내년 봄에는 만날 수 있을까? 이번에는 못했지만 다음에는 형이 가르쳐 준대로, 다시는 그러지 않아 볼게요. 내 옆에 두고 내가 예뻐할게요. 가야하는 형이라면 내가 따라가서라도 내 옆에 있게 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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