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적하게도 손끝에 머물던 것을, 떼어낼 방법을 몰라 그저 두었더니 숨길을 막으려 들었다.
점착의 연가
붉은 피가 아른하게 호선을 그리며 춤추었다. 찰나의 날카로운 고통과 맞바꾼 피의 춤이 쓰라렸다. 베인 상처 위로 둥그렇게 피어오르는 피가 아파했다. 연고가 있으려나. 선반 위로 손을 뻗으니 작은 상자가 걸린다. 슬쩍 닿기만 해도 쉽사리 밀려나는 그 상자는 너무나 솔직하게도 속이 텅 비었다. 오래된 반창고, 그것 하나만 뺀다면.
혹 남들이 본다면 재환의 행동은 정상의 범위를 벗어나 보였다. 제 집을 샅샅이 뒤져가며 어지르고 닦아내는 꼴은, 하룻밤을 뜬 눈으로 보낸 그의 생각이 이뤄낸 결과였다. 옷장을 열어 멀쩡한 옷을 수거함에 넣고 남은 옷과 침구는 전부 일찍이 세탁소에 맡겼다. 가죽소파는 마른 걸레로 닦아내고 바닥과 벽은 물걸레질을 했다. 그러다 혼기 잃은 그의 눈이 화장실로 향하고 세면대 위에 놓인 면도기를 닦아내던 중, 짧은 핏방울을 피워낸 면도날에 그는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반창고를 바라보았다. 이것도 버릴까. 당장 그의 눈에 쓰라린 생채기는 보이지 않았다. 엄지 끝으로 한참을 매만진 반창고에서 끈적한 점착물이 새어나왔다. 재환은 손톱으로 점착물을 긁어냈다. 점착제는 그의 엄지와 손톱 끝을 이리저리 오가며 검질기게도 끈기를 옮겼다.
아. 화장실에서 나온 재환의 목에서 짧은 울림이 퍼졌다. 그의 시선 끝에 위치한 두꺼운 책 한권이 여태껏 그의 이상행동에 태클을 걸어왔다. 재환은 책을 집어 들었다. 상처가 아리다. 이제는 피가 멎은 상처에 반창고를 붙였다. 끈기가 온연히 손가락을 감쌌다. 손가락 한 마디에 감긴 반창고 하나가 그의 전신을 미묘함으로 감싸 오르게 했다.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에, 습기 머금은 장판에 어울리지도 않는 초인종이 울렸다. 억지로 표현하자면 우울? 그것과 비슷한 무언의 기류가 가득 찬 집안을 헤집는 맑은 소리였다. 소리는 그를 살풋 놀라게 했고 그의 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책의 낱장이 미약한 떨림을 보이게 했다. 재환은 현관으로 향하며 긴장을 들이마셨다. 누구인지 모를 낯선 이의 출입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숨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이라 문고리를 돌리는 것이 힘겨웠다.
“아, 재환아. 형이 책을 놓고 가서 말인데……, 형 책 뭔지 알지? 좀 가져다주면 안 될까?”
열리지도 않은 문에 대고 말하는 목소리마저도 어제 오늘의 재환과 달랐다. 재환은 문고리를 잡아 열고는 책부터 내밀었다. 그의 손에서 책이 떠나가자 그는 문을 다시 닫으려 들었다.
“어, 반창고.”
거의 닫힌 문을 붙잡는 알 수 없는 힘이 검지 마디를 감싼 반창고에 집중되었다. 재환은 더 이상 문을 닫지도, 그렇다고 더 열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렀다.
“딱 하나 남았던데. 약도 좀 사놔. 끄덕하면 다치는 녀석이.”
재환은 문고리를 잡아 든 손에 힘을 주고는 밀어냈다. 빗물이 그의 머리카락을 파헤치고 슬리퍼를 신은 발을 찝찝하게 했다. 어디가, 하는 학연의 물음에 그는 문 옆에 두었던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었다. 쓰레기 버리려고요. 최대한 짧게 끊어 말했다. 그의 이상행동에 대한 타당성, 그것만 전달하면 됐다.
“그거 다 버리는 거야?”
재환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몇 장 읽다만 책, 쓰지 않은 다이어리, 절반 쯤 남은 향수. 책은 두었다가 잠이 오지 않을 때 읽으면 되고 다이어리는 두면 언젠가 메모용으로 쓸 수 있었다. 향수는 퍽 그의 마음에 들었던 향이고. 그럼에도 그가 이것들을 한데 모아 버리는 이유는 그의 앞에 있었다.
“그럼, 형이 가져갈래요?”
학연은 재환이 불쑥 내민 봉투를 보았다. 책과 다이어리, 그리고 향수. 학연의 눈에도 확실히 보였을 것이었다. 학연은 시선을 올려 재환을 바라보았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 빗물에 젖었다.
“……아니, 버려줘서 고마워.”
학연에게로 뻗은 팔을 거두었다. 봉투가 툭 하고 내려앉더니 재환의 다리를 두어 번 스치며 쳐냈다. 재환은 그것에도 아픔을 느꼈다. 빗물이 더더욱 그를 파고들고 조각냈다. 뜨겁게 끓어오른 빗물이 내렸으면 좋겠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녹아 학연에게로 스며들고 싶었다. 그의 마음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어제와 한껏 다른 저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면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를 다르게 한 원인이 제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녹아 들어가 묻고 싶었다.
“태연하네요.”
그게 어울려요. 재환은 학연을 지나쳐 걸었다. 등 뒤로 ‘잘 가.’ 하는 학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에 들린 봉투가 유난히도 무거웠다.
집 안은 또 다시 한껏 우중충함이 한껏 채워진 상태가 되었다. 그 한가운데 시선 잃은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재환이 한 쪽 손에 시야를 맞추었다. 반창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육체에서 인위적인 것이라 눈에 띄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이 집안에 남은 유일한 학연의 흔적이라 그런 것인지. 재환은 후자라고 생각했다. 반대편 손을 뻗어 반창고를 뜯어냈다. 하얗게 찌그러진 살결이 한 손가락의 마디에서 경계를 만들어냈다. 문질러 봐도 경계가 흐려지지 않았다. 뜯어진 반창고를 뭉쳐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재환은 편하게 눈을 감았다.
내일이면,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전부 사라져 있을 테지. 더 이상 이 집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 차학연, 차학연의 옷, 차학연의 향수, 차학연의 다이어리, 차학연의 책. 그리고 차학연이 두고 간 반창고. 그 반창고가 감싸 숨 막힌 살결의 핏기도 다시 돌아올 것이었다. 이 집안은 한 가운데 벌렁 누워버린 제 자신만 없다면 정말 완벽히도 차학연을 잊어낸 공간이었다.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VIXX/켄엔] 점착의 연가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4/c/d/4cd285f7e2615a8c6e879f63fcf83e18.jpg)
아이돌 팬 뼈 때리는 열애설에 대한 명언.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