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 01]
바람은 항상 흙색으로 불었다. 모래알이 입술을 스치고 혀 위에서 노닌다. 까슬까슬한 것을 탁, 하고 바닥에 뱉어내면 그 위에 주저앉은 몇몇 사람들이 가는 눈초리로 쳐다본다. 그 서슬서린 날카로움이,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열어둔 창문에서 불어오는 창공을 가리운 흙바람에 학연은 두 눈을 찌푸렸다. 뼈마디가 굳어 펴진 듯 유하게 움직이지를 못하는 허리와, 뻣뻣해진 사지가 꼭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본디 이 시간의 학연은 침입해 오는 햇빛을 피해 잠을 청하고 있어야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기척이 없으면 그만둘 법도 한데 굴하지 않고 초인종을 수차례 눌러대는 손가락은 그의 감긴 눈을 괴롭히며 잠을 깨웠다. 학연은 이리저리 뻗친 머리를 더욱 헝클어뜨리며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애써 담담하게, 그의 머리칼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밀려올라오는 화를 학연은 꾹꾹 내리 참고 있었다. 목에 아무렇게나 걸쳐진 안대는 잠에 취한 눈을 설명했다. 학연은 손으로 햇빛을 어설피 가리며 대낮에 찾아온 불청객을 마주했다. 큰 키에, 얼굴을 제대로 살피기엔 눈이 부시나 적당히 화려하며 단정한 옷차림이다. 밝은 하늘 아래 이곳에서 마주하기 힘든, 그런.
“어제, 기억 안나나 봐요?”
이건 또 뭐라는 거야. 학연은 양 쪽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입술이 자연스레 벌어지며 허연 이가 드러났다. 경계, 단순히 그것을 나타내고 싶었다. 이에 남자는 슬금 웃으며 퍽 여유로운 자태로 맞선다. 문에 기대어 혹 닫을까봐서 문고리까지 쥐어 잡은 그의 존재를 온 몸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지 않은지 담담하게 반응하는 남자의 모습에, 학연은 당황했다. 어제의 난, 어제…….
미친. 숨을 쉬는 균형마저 잃은 채로 짧은 호흡과 함께 뱉은 말과 함께 학연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뇌리를 스친 어젯밤의 기억이 뻣뻣한 팔다리를 타고 내려가 찌릿함을 형성했다. 전류와 같은 것인가 싶은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살짝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둥글게 뜬 눈으로 앞에 선 남자를 마주했다. 미쳤어, 진짜로. 남자의 단정한 옷깃이 스쳐지나간 기억을 붙잡는다. 당혹감에 물든 눈이 급히 문고리를 찾았지만, 남자는 더욱 단단히 문고리를 부여잡았다.
“우리 할 말 많잖아요. 들어가도 되죠?”
학연은 아무 말도 못하고 두어 걸음 뒷걸음쳤다. 남자는 문고리 잡은 손을 천천히 안으로 끌어당기며 좁은 현관에 들어섰다. 스프레이로 고정시킨 듯 위로 들어 올린 남자의 앞머리가 꼭 천장에 닿을 것만 같았다. 천천히, 집안 깊이 들어오는 발걸음에 학연은 나름 정리랍시고 이불이며 벗어둔 옷가지들을 발로 차냈다. 바삐 움직이는 발을 가만 쳐다보고 있는 남자를 확인한 학연은 멋쩍은 웃음을 토해냈다. 커피 좋아해요? 차 마시는 시늉까지 보인 학연은 둘둘 말려진 어색함에 모습 없는 잔을 든 손가락을 파르르 떨며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무표정한 눈빛이 학연의 얼굴을 보고, 떨리는 손가락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구겨진 이불자락을 정리하려 드는 발을 내려 보더니 큼, 하는 다소 눌러 낸 웃음이 터졌다.
“설탕은 넣지 마요.”
어느새 싱크대로 달려가 진득하게 녹아 눌러 붙은 설탕조각이 여기저기 붙은 봉지를 뜯던 손이 남자의 목소리에 방황했다. 단 거 싫어해요? 여기저기 튀어 오르는 감정을 붙잡지 못한 학연의 음성이 남자의 귓전을 때렸다. 어느새 담배를 꺼내 물었는지 매캐한 향이 좁은 집안을 채운다.
해가 하늘을 비출 때면 눈으로 침범해오는 햇빛을 피해 피곤에 찌든 육신을 달랬고 밤이면 달빛을 피해 거리를 노닐었다. 대충 세어보면 오년 째. 학연은 이런 생활에 익숙해 있었다. 불빛이 멎어가는 가로등이 비추는 거리 위는 허름한 술집과 옷의 의미를 상실한 여자들이 앙탈 섞인 목소리로 지나가는 이를 붙잡는 가게가 밥그릇 포갠 듯 즐비했다. 학연의 사는 곳은 어디를 가나 이런 유흥가뿐이었다. 살기 위한 잉여인간들의 발악. 저 또한 마찬가지였다. 허나 제 자신을 ‘잉여인간’이라고 치부하는 그의 목적지는 그런 허접한 밥그릇이 아니었다. 가끔 술집에 드나들긴 했으나 금방 유유히 빠져나오는 학연이었다.
어젯밤 또한 큰 다름없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무엇으로 헤집은 듯 탁하게 뭉그러진 하늘을 새삼스레 쳐다보았다가, 뻐근해지는 뒷목에 우악스레 고개를 내려접었다. 엄지손가락으로 툭 튀어나온 뼈마디를 꾹꾹 누르는 학연의 옆으로 한껏 광낸 차가 유연하게 지나간다. 길게 내뺀 휘파람을 불었다. 왜, 꼭 그런 것이었다. 욕심나는 것에 점찍기라도 하듯이. 차에서는 나이 들고 살집 오른 남성이 어린 계집 둘을 양 옆에 끼고선 기름진 웃음을 흘리며 내렸다. 길 위에 닿은 신발마저 번쩍인다. 틀림없는 숲 너머 그곳의 상류층 인간. 학연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내, 밥그릇.
학연은 나이 든 남자에게로 다가섰다. 그의 뒷주머니에 꽂힌 통통한 지갑이 탐스러웠다. 양 쪽에 끼인 계집들의 손이 지갑 주위에서 배회한다. 얼씨구? 미안하지만 이건 내 거야, 아가들아. 손가락으로 가볍게 빼낸 지갑을 왼손으로 가볍게 말아 쥐고 살짝 빠른 걸음으로 방향을 틀어 걸었다. 이 양반 미련하게 전부 현금이네. 둥글게 호선을 띤 미소가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시작은 좋았다, 좋았는데. 적당히 벌어먹었으면 그만 둘 줄을 알았어야 했다. 헌데 탐욕에 젖으면 그것마저 모른다. 미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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