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정확히 언제였고,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상 그것은 필요치 않은 사항일지도. 그저 태양이 이글거리는 여름이었다는 것, 그리고 바닷가였다는 것. 이정도면 그날의 이야기를 하기에 충분하다. 나에겐 무척이나 특별했던 그날을.
시작은 그날이 짜증나게 더웠다는 것으로 끊는다. 타오르는 태양은 제 죽음을 저렇게 잔인하게도 알리는가 싶었다. 출발할 적에 느껴지는 한기 때문에 챙겨 입었던 남방을 벗어 아무렇게나 움켜쥐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햇볕은 내겐 피해야 마땅했다. 까만 피부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더 까맣게 타는 것은 사양이다. 구겨 쥐었던 남방을 머리 위로 올려 감쌌다. 그새 검은 머리칼은 햇볕을 머금어 지글지글 잘도 데워져 있었다.
어린 아이처럼 물놀이를 하기 위해 갔던 바닷가는 아니었다. 그것은 같이 가자던 친구 놈들이 전날부터 연락두절이 된 것부터 기정사실 되었던 것이다. 그날의 새벽이 밝고 나는 빈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며 가방에 챙겨 두었던 여벌의 옷을 방바닥에 흩뿌렸다. 개새끼들. 그땐 그 놈들이 진짜 개새끼들인 줄 알았다. 여하튼, 나는 무슨 안타까운 사연이나 있는 사람처럼 홀로 바닷가 여행을 떠났다는 거다. 나 혼자 가서도 재밌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아는 동생 카메라까지 빌려 매달고 말이다. 아, 그거 며칠 전에 돌려줬는데 아주 날 죽일 기세더라. 무서운 놈.
일부러 살결을 태우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땡볕에 가만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마침 딱 좋은 그늘이 있었고, 그저 바닷바람 소리만 듣고 갈 요량으로 작은 돗자리를 펼쳤다. 등을 돗자리 위에 눕히고, 남방을 얼굴에 덮고. 바람만 맞고 가려던 난 그렇게 잠이 들었던 듯하다.
바닷바람과 함께한 잠은 꿈으로 이어졌다. 본래 꿈을 꾸고 일어나면 잊어버리는데, 이 꿈을 쉬 잊히지도 않는다. 꿈속의 나는 벼랑 위에 서 있었는데, 곧 휘청거리다 바다를 끌어안았다. 괴롭다거나, 다리가 떨린다거나, 그런 느낌이 없었다. 그 때 내 눈을 덮은 것은 옥빛과 푸른빛이 뒤덮인 바닷물이었고 한 소년을 만났다. 바다 속에서 말이다. 무슨 책을 들고 있었는데, 글쎄 그것을 거꾸로 들고 있어 퍽 의심쩍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책 표면에는 어린아이가 제 물건에 자랑스레 적은 것과 같은 필요이상의 크기의 이름까지. 책이 반대로 들렸는데 이름이 똑바로 적혀있다는 점에서 그 사내가 정말로 책의 내용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불렀다. 그 아이를.
사내와 같이 바다를 구경했다. 파랗고, 검고. 햇볕을 받는 육지와 가까운 곳은 오색으로 찬란히도 빛났다. 그리고 곧, 꿈의 끝이라도 알리듯 난 육지로 발을 굴렸다. 바다 속에 여전히 그 사내를 남겨둔 채로. 꿈에서 헤어 나올 적에 어렴풋이 들렸던 말이 있는데 내가 제대로 들었다면 그 말은,
‘나를 울게 하소서.’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바짝 드는 느낌으로 일어났다. 얼굴을 덮었던 남방이 허벅지께로 내려앉고 이마에 잔뜩 맺힌 식은땀을 손으로 훔쳐냈다. 그 순간 들려온 카메라 셔터음에 놀랐다는 건 이제 내 이야기가 본격적인 시작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땀으로 인해 엉망이 된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는데 바로 옆에서 찰칵- 하는 경쾌한 음이 들렸다는 거다. 돌아보니 그곳엔 카메라로 나를 응시하는 한 사내가 있었다.
이쯤에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꿈속에서 만난 인연이 현실에서 이어진다면? 비현실적인 꿈에서 만난 비현실적인 인물이, 현실에 존재해 당신 앞에 카메라를 들이민다면? 당황감에 달싹거리는 입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다. 손가락과 다리가 달달 떨릴 것이고 머릿속은 새하얗게 물들 것이다. 어떻게 확신 하냐고? 내가 그랬으니까. 절대 흔치 않은 일을 내가 경험하고 내가 그랬으니까. 난 내 카메라, 아니 내가 빌린 아는 동생의 카메라를 쥐고 나를 보는 그 사내, 그러니까 정택운을 보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그거 내 건데…….”
그제야 정택운은 카메라를 내게 건넸다. 카메라 없는 얼굴엔 어쩐지 물기가 서렸고, 금방이라도 주위에 기포가 생길 것만 같았다. 그건 아마 내 생각으로 인한 환상이겠지만 그만큼 걔는 바다와 어울렸다. 나도 걔를 보고, 걔도 나를 보고. 무의식에 얼굴을 살펴보다가 눈이 맞자 어색함을 깨달았다. 그 아이를 보던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는 눈빛이 너무나 강해서, 그 기에 눌려 난 애꿎은 카메라만 만지작거렸다. 카메라만 보고 있었다. 눈앞에 큰 손이 나타나더니 내 한쪽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 고개를 돌려냈다. 그리고 내 시선은 다시금 정택운으로 채워졌다.
“얼굴, 제대로 못 봤어.”
그리고는 다시 얼굴에 닿는 강한 시선. 방금 전보다는 익숙해진 듯 난 잠시 동안 그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아이 손으로 전해졌을 얼굴의 열기는 어쩔 수 없고. 내 볼을 짚었던 손이 떨어지고 긴 손가락이 흐트러진 앞머리로 향했다. 손가락 끝이 조심스럽게 젖은 앞머리를 정리했다.
“이렇게 하니까 좀 더 닮았네.”
말끝에 물기가 있었다. 이것도 또한 내 생각에 의한 착각일지도 몰랐다. 헌데 찰나의 반짝이는 눈빛과, 앞머리를 매만지는 손끝에서 소금냄새가 났던 것은 정말이라는 것을 강조해 말하고 싶다. 앞머리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정택운은 무릎을 접었던 자세를 고쳐 바닥에 편하게 주저앉았다. 두 개의 시선은 검은 바다를 향했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있었다.
“이것도 꿈이야?”
분위기가 나에게 입을 열기를 허락했다. 저런 앞뒤 다 잘라먹은 말마저도. 정택운은 무릎을 팔로 안은 자세로, 바다를 향한 시선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어두워진 바닷가엔 사람이 마르고 검은 물감으로 뒤엎은 바다만이 존재를 알리듯 조용히 철썩였다. 몇 번씩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한 여섯 번 쯤 고개를 돌렸을 때, 정택운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갈게. 지금은 내가 먼저.”
이 이야기가 당신에게 어떻게 들리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신기한 일이라며 잠시의 가십거리로, 술자리나 커피 한잔 놓고 하기에 적당한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으나 내게는 한여름의 낭만으로 존재한다. 그 아이의 이름이 정말로 정택운일지, 꿈으로 인해 형성된 신비스럽고 애잔한 분위기가 사실일지는 그 아이 빼고는 모른다.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멀어져가는 그 아이의 등을 보고 눈시울이 찌릿했다던가, 아직도 여름의 밤만 되면 그날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정해진 내 여름날의 틀이 되었다. 마음에 들게 나오지는 않았으나 잊지 않기 위해 여전히 가지고 있는 그 사진처럼.
꿈속에선 오색의 찬란한 빛을 따라 발을 굴렸고 그 빛을 따라 깨었더니 거짓말처럼 더 큰 아름다움을 안고 내게 와있던 그대는, 나를 잊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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