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법칙 1편을 보고 읽어주세요!)
첫사랑의 법칙
5
뭐? 이민? 말도 없이? 흥분한 진이의 말이 한문장으로 끝맺지 못하고 자꾸만 이어졌다. 아니 정윤오가,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 말도 없이, 가? 자꾸만 닦달하며 내팔을 붙잡은 진이의 손을 떼어놨다. 나도 안 믿겨. 신경질 적으로 머리를 헝클며 메신저를 다시 확인했다. 읽어 내릴수록 거짓말이 아니라는 초초함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정윤오가 일주일 전부터 할 말이 있다며 만나자고 연락했다. 원래는 바쁘다고 하면 알겠다 고개를 끄덕이기 마련인데 유독 이번 주는 내내 쫓아다니며 십분만 내달라고 가방을 잡아끌었다.
얼마 전 모진 말을 내뱉고 의도된 건 아니지만 피하긴 했었다. 또 일부러 피한 건 아니고, 어쨌든 같이 있는 횟수를 줄이려고 했다. 사람들 말처럼 윤오는 내 따까리도, 멍청한 놈도 아닌데, 어쨌든 윤오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나인 것 같아서. 조금 더 매정하게, 조금 더 못됐게 굴었다. 이렇게 하면 정윤오가 나한테 안 오겠지.
귀찮다는 핑계로 또 논다는 핑계로 이리저리 미루다 결국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걸어가며 잡은 약속 날짜에 나가지 못했다. 까먹고 술을 먹으러가는 바람에, 그날 저녁 수십 통의 전화도 몇십 통의 문자도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 여주야 너 주려고 편지 들고 왔는데 못주고 가네. 미안해. ]
마지막 말까지 미안하다는 정윤오 때문에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차라리 욕을 하든가 아니면 원망을 하던가. 이게 뭐야. 너는 매일 왜 나한테 미안한대! 빽 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놀란 진이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야, 미쳤어 여기 카페야. 사람들의 시선과 웅성거림이 뒤쫓았지만 크게 부끄럽지 않았다. 미안해. 이 세글자가 거슬리고 짜증났다.
끝까지 내가 나쁜년 같잖아.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책상에 엎드렸다. 진동벨을 반납하고 케이크를 들고 온 진이가 누워있는 나를 살살 흔들었다. 기분을 풀어준답시고 좋아하는 초코케이크를 사온 건 고맙지만, 지금 입에 넣어도 들어간 게 초코인지 딸기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내미는 포크를 거절하고 지근거리는 머리를 책상에 비볐다. 나 왜 이렇게 화가 나지. 차라리 주변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잠깐이지만 그런 마음을 먹기도 했는데. 막상 사라지니깐 말도 없이 가버리니깐 왜 이렇게 허전하지. 어제 온 문자를 천천히 읽었다.
[ 여주야 어디야? ]
[ 비 오는데 우산은 있어? ]
[ 비 맞고 오는 거 아니지? 너 어딘지 알려주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 ]
[ 여주야 나 비와서 바로 옆 카페에 들어와 있어 뛰어오지 말고 천천히 와. ]
[ 여주야 어디 아파? ]
[ 여주야 폰이 꺼졌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카페 문 닫아서 나 카페 앞에 서있을게 ]
짜증나 짜증나. 진짜 짜증나 정윤오. 너무 싫어. 그런데 또 내가 연락하는데 네 번호는 왜 없는 번호라고 뜨는 건데. 진이 앞에서 울기 싫어 고개를 아예 테이블 밑으로 박았다. 먹지마라 내가 다 먹고 좋지 뭐. 장난스러운 목소리 뒤로 카페 노래가 잔잔히 울렸다. 평소에 정윤오가 좋아한다고 그렇게 들어라보라고 말했던 노래였다. 한 번도 내가 들어본 적은 없으나 흥얼거리는 걸 몇 번 듣고 자연스레 외워졌다. 뭐 십센치의 노래였는데 제목이 기억이 안나네.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진이가 따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이거 제목이 뭐야?”
“이거? 아 뭐더라.”
“...”
“그, 그.”
“아 됐어.”
“기억났다!”
“뭐?”
“짝사랑.”
“.. 아, 그래? 뭐야. 별로다.”
제목부터 별로네. 정윤오 이런 노래 좋아하고 실망이야. 사소한 거 하나하나 꼬투리 잡으면서 장난치고 싶은데. 초코 케이크 시켜놓고 두 개 다 내가 먹고 싶은데, 노래방 가서 점수 대결 하면서 놀고 싶은데, 학교 마치고 같이 집 걸어가고 싶은데. 이제 못하게 됐네.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는 나를 진이는 짐짓 놀란 듯 쳐다보더니 곧 휴지를 가져와 건넸다. 나 슬퍼서 우는 거 아니야. 끝까지 자존심은 지키려는 내말에 피식거리며 웃더니 안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울음을 참기위해 한참을 훌쩍거리며 휴지에 코를 풀었다. 정윤오 돌아오면 얼굴도 안 볼 거야. 다짐하듯 중얼거렸는데 사실 안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커, 엉엉 소리를 내며 울어버렸다.
몇 년 지기 친구가 갑자기 사라진 느낌은 상상한 것 보다 많이 허전했다. 무엇보다 가끔씩 눈물이 났는데 어떤 연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보고 싶을 때, 특히 못해 준 것만 생각날 때 유독 슬픈 날들이었다.
6
여주씨 이것도 부탁해요. 아이고 여주양 이 오타가 몇 개 보이는데 내가 바빠서, 대신 고쳐줄 수 있지? 네~ 넵! 네ㅎㅎ 넹! 앗 네!. 직장의 네, 병에 걸린 지도 어연 일 년. 그럼에도 막내를 못 벗어나고 있는 처지에 애꿎은 나만 죽어났다. 무슨 회사가 막내를 구하기만 하면 그만두는지. 이게 다 부장님의 징크스라고 하는데, 그런 말이 꼭 한동안 막내를 뽑지 않겠다는말로 들려 근무 내내 몸을 떨었다.
좋은 회사에 취업해 축하를 받으면 뭐해, 그만큼 주말에도 죽어라 일하는데. 오늘도 월급날 디데이만 체크하며 일에 열의를 불태웠다.
오랜만에 쉬는 날이라며 오이를 붙이던 진이는 어느새 오이를 하나씩 입에 넣고 있었다. 원래 너 단칼에 거절하는 성격이잖아. 진이의 말에도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만 저어댔다.
“직장 상사들이잖아.”
“그러면 동료들 부탁은 왜 거절 못하는데? 지금 네가 만든 자료 들고 승진은 따놓은 단상인 놈도 있고 부서 이동해서 탄탄대로 밟아가고 있는 얘도 있잖아.”
혀를 끌며 잔소리 하는 진이의 목소리가 듣기 귀찮아 귀를 막았다. 아오 시끄러워 진짜. 지금 전달해야할 파일이 몇 개인데. 구시렁 거리며 이어폰을 꽂고 노트북 타자만 두드렸다. 다리 한쪽이 내려앉은 책상은 노트북을 두드릴 때마다 삐걱거려, 올린진 물건들을 흔들었다. 묵직한 건 괜찮았으나 얇은 액자들이 문제였다. 조금 과격하게 두드린다 싶으면 곧 얼마 버티지 못하고 세워둔 액자들이 도미노처럼 차례차례 쓰러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쓰러진 액자들을 세우다 멈칫하고 가운데 액자는 다시 덮어두었다. 정윤오와 졸업 때 찍은 사진이었다.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가지고 있는데, 볼 자신이 없었다. 윤오의 얼굴도 함께 웃는 나도. 갑자기 나의 조용함을 알아차린 진이가 내 옆으로 왔다. 손이 윤오의 액자에 닿아있는 것을 보더니 내손을 찰싹 소리나게 쳤다.
“이건 버리던가! 아니면 세워두던가!”
모른 체 하며 다시 노브북을 두드렸다. 아예 자리를 잡았는지 책상 옆 내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하고 있는 진이었다. 옆에서 입을 삐죽거리는데 무시할 수 없는 잔소리였다. 네, 네.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폰을 다시 꽂았다. 얼마 쯤 일했을까 조용해진 진이가 옆에서 말을 꺼냈다. 아까와는 다른 장난기 뺀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정윤오 일 아직까지 그런 거야?”
걱정된다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야 무슨 그런 거 아니야. 진이는 답답하다는 듯 속을 두드리며 대뜸 고함을 질렀다. 몇 번을 말해 네 잘못은 없다고. 네가 정윤오한테 차갑게 굴긴 했지만 이민 가라고 한 거 아니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소심하게 구냐고. 내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자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니깐 여주야 응? 그냥 너 하고 싶은대로 해.”
“.. 워.”
내 웅얼거림을 못들은 진이는 응? 하고 되물었다.
“무서워. 나를 좋아해주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돌아서는 게.”
“아니야 안 그래.”
“내가 거절도 하고, 차갑게 이야기도 하고, 또 화도 내면 다들 그럴 거야. 싫어하고 떠날 거야.”
누가 그래. 진이는 등을 토닥거리며 내 머리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 가끔 이랬다.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에 감정이 곤두서버린 탓에 자책을 하는 나날이 늘어났다. 그때의 나는 어렸고, 어리다는 말도 변명이였고, 이런 식으로 죄책감을 덜어냈다.
윤오가 그렇게 가버리고 성격이 변한 건 부정할 수 없다. 조금은 조심스러워 지고 당당하다고 박수 받았던 성격이 위축돼 남들 눈치를 보기 바빠졌다. 내가 그동안 실수한 건 없었나? 이 사람은 나를 싫어하려나? 이런저런 걱정에 휩싸여 매일 밤 울기도 했다.
누군가 그랬다. 정윤오가 말도 없이 사라진 건 내가 못돼서라고. 그렇기 때문에 팔년지기 친구를 저렇게 잃는 거라고.
맞는 말이었다.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윤오한테 했던 뼈있는 말들이 그대로 돌아오고 온전히 느껴졌다. 행동들, 말들, 눈빛들. 하나하나 가볍게 받아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윤오는 몇 년을 버티고 살아온 것일까. 미안한데 사과할 방법이 없다는 게 제일 힘들었다.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아이였지만, 나한테 말 한마디도 없이 사라지고 번호까지 바꿨다는 건, 얘한테 나는 그런 존재였다는 거. 그렇게 느껴졌고 판단됐다. 인정하기까지에 긴 시간이 걸렸다.
지금쯤 너는 어디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가 네 안부를 궁금해 하는 게 실수는 아닐까.
윤오야 나는 네가 잘 지냈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빌고 있어 네 행복을.
7
안녕하세요 새로온 부회장 정재현이라고 합니다. 직원들 한명한명에게 악수를 건네는 남자를 쳐다보며 할 말을 잃었다. 누가 봐도 정윤오였다. 웃을 때 들어가는 보조개며, 하얀 피부며. 키와 덩치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지가 좀 더 어른스러워 진 것 빼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내 차례가 온지도 모르고 멍하니 입만 벌리고 상황정리를 하기 바빴다. 옆에 있는 주희씨가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후들거리는 다리마저 숨기지 못했다.
“김여주씨..? 인사 안 받으실 건가요?”
“아……. 아, 아! 네.”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잡았다. 몇 년 만이지. 칠년 만인가. 스무 살에 갑자기 사라지고 지금 만났으니깐 아 팔년 만이네. 손을 뗀 정재현은 마지막 인턴에게 인사를 건네고 부회장실로 들어갔다. 부회장이라는 사람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가운데로 모여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 외국에 있어서 몇 년 동안 누군지도 몰랐는데 이렇게 갑자기 등장해?”
박팀장님의 말의 시작으로 삼삼오오 자기들이 들고 있는 정보를 조합해 갑자기 등장한 부회장의 실체를 잡아갔다. 소문은 무성했다고 한다. 얼굴이 아주 큰 화상이 있어서 숨어서 일을 했다, 사실 회장님의 바깥 자식이라 공개하지 못한다 등등. 결국 이렇게 등장 한방으로 터무니 없는 것임이 되었지만.
“아 이건 아니겠다. 아까 보니깐 회장님 판박이셨어. 특히 보조개가.”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정윤오 부모님이 기업 회장님이었나. 그리고 보니 윤오의 주변에 대해 깊게 아는 게 없었다. 김여주 몇 년을 친구였는데 아무것도 모르네. 다시 생각난 정윤오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졌다. 닮은 사람인건가 이름도 틀린데. 갑자기 부회장이 윤오라고 단정 짓는 내가 웃겼다. 다시 만난 걸 기대한 사람처럼.
의문이 생기긴 했다. 이미지는 달라졌지만 느낌이 비슷한 건 무시할 수가 없었다. 당장 부회장실에 뛰어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맞다고 해도 일부러 모른 척 했을지도 몰라, 섣불리 아는 체 할 수 없었다. 그래. 쟤랑 나랑은 어떤 사이인데. 통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고선 도영이 메신저를 걸어왔다.
[머리아파? 약 사와다 줄까?]
무의식적으로 지근거리는 머리를 계속해서 눌렀나보다.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니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도영이다. 내가 동기는 잘 만났지. 아까보단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지금은 일에 집중해야할 타이밍이니.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시간 쯤 지났을까, 부회장실 문이 열리고 부회장은 프로젝트 문제로 박팀장님을 찾으러 왔다. 박팀장님이 필요한 문서를 챙겨 옆에 섰으나 부회장은 계속해서 사무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덕분에 사람들 모두가 경직된 채 눈알만 굴렸다. 저, 부회장님. 작은 박팀장님의 목소리에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발걸음을 움직였다. 넥타이를 가다듬으며 걸어가는 부회장과 얼떨결에 눈이 정통으로 마주쳐버렸다.
어떻게 시선을 피할 생각도 없이 그대로 몸을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아니 김여주 네가 왜? 정신차려. 속으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쉽사리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아직 안지나가서 또 마주치면 어떡해. 울상이 된 얼굴을 애써 숨기며 한참 뒤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다. 후. 적막한 사무실에 크게 울릴 정도의 큰 한숨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를 쳐다보는 몇몇의 눈빛들에게 입모양으로 사과를 했다. 오늘 왜 이러냐 진짜.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는 내 앞으로 다시 메신저가 울렸다.
[너 상태 진짜 이상해. 조퇴해.]
아무래도 나 그래야할 것 같아 도영아.
8
일주일간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마주치기도 하고 업무상으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으나 우리 사이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진짜 정윤오와 닮은 사람인건가, 아니 알아보는데 싫어서 모르는 척 하는 건가. 잘 웃으며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붙이는 친화성과, 일적인 부분에는 선을 긋고 진지하게 행동하는 부분에 부회장을 좋아하는 직원까지 여럿 생겼다고 한다.
이것만 봐서 정윤오가 아님을 확신했다. 팔년 내내 사귄 친구가 손에 꼽을 정도로 작은 정윤오가? 낯을 가리다 못해 자진해서 혼자 다니려는 정윤오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자신에게 늘 점심시간마다 찾아와선 말을 붙이던 소영씨가 사라졌다고 섭섭해 하는 도영이를 위로해주느라 일주일이 바빴다. 정말 도영의 말대론 부회장이 지나가자 대놓고 쳐다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럼 뭐해 부회장은 약혼자가 있다는 소문이 무성한대.
점심을 먹기 위해 도영과 지갑을 챙겨 일어섰다. 나의 뒤로 2팀의 민주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회장님 혹시 점심 드시러 가세요? 그럼 저희랑 먹어요! 저희 마침 초밥 먹으러 갈 예정이었거든요.”
아 언제 초밥이었냐. 분명히 오늘은 짜장면인데. 내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본 도영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뜻이었다. 점심을 먹는 인원이 정해져있는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1,2,3팀 묶인 우리는 각 팀의 막내들끼리 먹었다. 뭐 휴식 시간만큼은 각자 상사들과 떨어져 일 이야기를 하지 말고 편하게 쉬라는 회사 측의 배려였다. 날 것 못 먹는데. 유일하게 그것을 아는 사람은 도영이 뿐이었다. 입사 초 왜? 냐는 도영이의 물음에 부끄러움을 숨기며 대답했다.
“어릴 때 아빠가 억지로 멍게를 먹였다가 며칠 내내 토만했어. 그 뒤로 날걸 못 먹어. 그렇게 좋아했던 회도. 이상하지.”
보통 내이야기를 들으면 그게 무슨 관련이 있냐며 남들은 비웃었다. 편식하는 거 돌려서 이야기 지어낸 거 아니냐는 말도 들어봤다. 그래서 말하기를 꺼려했다. 대학교 첫 오티 때도 오티를 하필 부산으로 가서 술안주가 회였다. 어쩔 수 없이 선배들이 주는 걸 억지로 먹는데 윤오가 옆에서 자기가 먹겠다며 우리 조 회를 다 먹었다. 그게 세 접시였는데 그 뒤로 정윤오 별명이 부산회였다. 혹시나 다른 조 회를 가져올까봐 다른 조에 있는 회까지 꾸역꾸역 먹은 게 뭐 여섯접시가 넘는다나 뭐라나.
과거 생각만 하면 불쑥 나타나는 정윤오의 생각에 이런 이야기는 더더욱 묻어두기로 했다.
“아, 초밥이요?”
“여기 회사 앞에 진짜 맛집이 있거든요. 부회장님, 저희 얼른 가요. 이러다 점심시간 늦어요.”
민주씨의 손에 이끌려 부회장은 엘리베이터까지 탔다. 설마 따라오려나 싶었는데 이런저런 말을 하며 결국 초밥 집까지 도착한 뒤였다. 하필 내 앞에 앉은 부회장도 문제였지만 회가 더 골치가 아팠다. 저는 에이세트요. 저는 비요. 사람들이 각각 메뉴를 말하고 내 눈치를 보던 도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비세트요. 아 그리고 여주씨가 체한 것 같다고 해서 여주씨는 안 드실 것 같아요.”
초밥을 못 먹는 나를 위해 거짓말 쳐 준 도영이 고맙지만 불과 삼십분 전에 단톡방에서 아침을 굶고 오니 허기져서 손이 떨린다고 말해버린 나였다. 뭐? 아까 삽십분 전에 배고프다고 안했어요? 민주씨의 물음에 아 제가 착각했네요. 억지미소를 지으며 도영이 말을 바꿨다.
나는 비세트로 똑같이 주문했다. 그래도 계란초밥이랑 찐 새우, 거기다 유부초밥이 나오는 메뉴가 낫지. 물을 홀짝거리며 고개를 돌리는데 빤히 나를 주시하는 부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켁켁거리며 사례가 들린 나를 놀란 도영이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괘, 괜찮아 이제. 어색하게 도영의 손을 밀어내며 블라우스에 튄 물기를 닦았다. 부회장님은 초밥 좋아하세요? 누군가의 물음에 부회장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제야 나도 겨우 긴장한 몸을 풀었다. 상사와 밥 먹는다는 건 진짜 죽을 맛이구나.
초밥이 나오자 다들 이야기보단 먹기 바빴다. 그만큼 맛집인 것 같았다. 도영이 준 계란말이와 찐새우, 유부초밥까지 먹었지만 합쳐서 여섯 조각 밖에 못 먹은 나는 비록 배고파 죽을 맛이었지만. 괜히 심술이 나서 잘 먹고있는 도영의 허벅지를 마구 꼬집었다. 아 부러워. 나도 배부르고 싶어. 물 건너간 짜장면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실 때 내 접시 앞으로 무언가가 턱 올려졌다. 부회장이 준 계란 초밥이었다. 입을 벌리며 놀란 나보다 더 놀란 직원들이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옆에 있는 도영까지 나를 툭 치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 이걸... 저에게 왜.”
“두 개나 드시길래”
“가, 감사합니다.”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시켜 보려 웃으며 빠르게 초밥을 먹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거두어지지 않았다. 이거 점심시간 이후로 모두의 적이 되는 거 아닌지 몰라, 옆에 있는 도영이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데 말야. 계란초밥 하나가 이렇게 사람을 체하게 하다니. 일부러 사이다을 마시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얼른 일어났으면, 하는 그때 민주씨가 의아한 듯 물었다
“여주씨 왜 다른 건 안 먹어요?”
“아, 그 배가 불러서.”
“두 조각 빼고 다 남긴 거 아니에요?”
뭐라 대답할지 몰라 시선만 돌리며 변명을 찾고 있었다. 차라리 날걸 못 먹는다고 말할까. 아 누군가는 비웃겠지. 오팀장님은 분명히 편식한다고 놀리실 거야. 도영이 가지 못 먹는 거 가지고 그렇게 놀리시며 비웃으셨는데. 딱딱하게 굳어버린 표정으로 젓가락을 쥐고 있는 나를 보며 도영이 입을 열었다.
“아 민주씨 제가 초밥을 좋아해서 여주씨한테 달라고 말을 했,”
“못 먹는덴 이유가 있겠죠. 자 식사 끝나셨으면 일어날까요?”
도영이의 말을 끊고 부회장님 대뜸 말했다. 직원들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나는 내심 민주씨에게 미안했다. 초밥 맛집이라고 먹으러 가자며 몇 주 전부터 이야기 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입도 안 된 사람이 돼버렸네.
주섬주섬 최대한 천천히 일어나는 나에 맞춰 도영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점심은 제가 살게요. 먼저나간 부회장의 목소리가 들리고 아 그럼 후식은 제가 살게요. 다들 커피 괜찮으시죠? 민주씨의 목소리가 뒤따라 들렸다.
사람들이 다 가고, 도영이 신발을 신으며 나에게 물었다.
“여주야 너 회 못 먹는 거 부회장님한테 말한 적 있어?”
“어? 아니?”
“왜 아까 못 먹는데 이유가 있다고 하셨지? 다들 네가 안 먹은 걸로 생각하던데.”
“그러.. 게?”
도영이가 툭 던진 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쉽사리 생각이 정리 되지 않아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며 뒷골목으로 혼자 들어갔다. ‘왜 아까 못 먹는데 이유가 있다고 하셨지?’ 말이 웅웅 맴돌았다. 그러게 왜.
부회장이 윤오 일거라 잠깐 했었던 착각이 오늘로 인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정윤오가 맞다면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거구나, 하는 맥 빠지는 결과가 뒤따랐지만. 역시 예상은 했으나 직접적으로 겪으니 조금 더 혼란스러웠다.
“김여주 다했어?”
“어, 어. 지금 가!”
앞으론 다른 생각 없이 나도 계속 모르는 척 해야 하구나 싶었다. 모르는 척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겠네. 알아버린 이상 볼 때마다 눈물이 왈칵 차오를 것 같은데. 잠깐의 생각에도 주마등처럼 스치는 과거의 모습과, 감정들 때문에 눈시울이 촉촉해 졌다. 네가 그렇다면 나야 어쩔 수 없지. 쓰게 웃으며 신발을 고쳐 신었다. 모르는 척 하는 일, 그게 현재 나의 일이었다.
/
앞으로 두편? 더 남은 거 같네요.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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