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눈을 뜨니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한 새벽이었다.
베개에 고개를 묻은 채로 잠에서 깨어보니 아저씨가 감싸안듯 얹은 팔이 어쩐지 무겁다.
이상한 꿈을 꿨다.
어두운 터널을 불빛 하나 없이 꽤 오래 걸어 빠져나왔는데, 아저씨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아저씨에게 달려가 입을 맞췄는데, 눈을 뜨니 웃고 있는 건 지호였다.
창문을 등지고 내 쪽을 향해 누운 아저씨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멍하니 있다가 몇 정거장인가를 지나쳐버렸다.
내려서 다른 노선으로 환승해 돌아갈까, 하다가 그만둔다.
순환점을 돌아오느라 한 시간이나 더 걸렸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하다.
"이제 오냐?"
놀아주는 사람이 없어 게임이나 하고 있었는지 폰을 잡고 있던 박경이 뒤돌아 말을 걸어온다.
"어제는 왜 말도 없이 사라졌냐?"
"속 안 좋아서."
머리 속이 복잡해서 모르고 있었는데 말하고 보니까 정말 속이 안 좋은 것 같기도 하다.
생각지도 못했다. 우지호가,
그렇게나 수줍은 키스라니.
차마 들어오지는 못하고 입술만 살짝 넘어와 간질이고 있는 혀가.
갑자기 들이댄 주제에 얌전하게 감고 있는 두 눈이. 또,
내 목을 감아당긴 네 팔이 그렇게 떨고 있으면,
장난 치지 말라고 웃어넘길 수가 없잖아, 우지호 이 병신아.
"너나 지호나 멀쩡해보이는 구만. 새끼들, 나만 표뚱땡 찔찔 짜는 데 버려두고는 내빼고. 너넨 친구도 아냐."
이제보니 삐진 모양이다.
지호라는 말에 창가 쪽을 보니 가방은 있는데 자리는 비어있다.
결국은 오고만다.
내가 먼저 피해야 하는지, 아니면 어떻게든 없던 것처럼 만들어 다시 이 빌어먹을 병신 놈을 다시 병신이라 부를 수 있는 자리로 돌려놔야 하는지,
아침부터 계속된 고민은 단순한데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미술실.
외진 별관 구석까지 찾아오고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문 앞에 멈춰선다.
거기에 녀석이 있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차분한 미술실에 혼자,
적막한 겨울 풍경이 보이는 창가에 이젤을 펴고 앉아있다.
자기 말로는 천재라는데,
그러고 보니 미대에 간다는 놈이 제대로 그림 연습하는 꼴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교복 셔츠에 안 어울릴 듯 또 어울리는 회갈색 앞치마를 하고 앉아, 이 쪽에선 보이지 않는 캔버스에 붓을 놀린다.
시작한 지 꽤 됐는지, 손에 들린 팔레트에는 몇 가지 색이 섞여 어지럽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보아오던 웃음기 머금은 표정이나 찌푸린 인상 없이 무언가에 순수하게 몰두하고 있는 얼굴이 어쩐지 낯설어,
나도 모르게 한참을 보고 있다.
그런 얼굴로 그리는 그림도 궁금하지만, 어쩐지
미술실 문에 난 창 너머 낯선 녀석의 모습이 더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니가 무슨 일이냐. 나랑 둘만 보자니."
"그냥요."
"좆까지 말고, 그냥 말해."
역시 태일이 형은 세다.
저 애기같은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욕을 내뱉는 모습은, 익숙해진 지금도 한 번씩 멍해진다.
안주도 나오지 않았건만 첫잔을 비우자 마자 본론으로 들어간다.
"형은 지훈이 가면 어떻게 해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비운 잔을 채우기가 무섭게 털어넣는 이 시대의 터프남.
술잔을 든 모습이 안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어떻게 보면 제법 어른 같기도 하다.
"그럼 만약에, 지훈이 가 있는 동안에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면?"
"끌리면 만나고, 별로면 안 만나는 거지. 인생 뭐라고 복잡하게 살아."
안주로 나온 누룽지탕에 수저를 들이밀며 하는 대답이 너무 간단해서, 순간 그런가, 하고 술잔을 비운다.
소주는 맑은 게 어울리지 않게도 쓰다.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쓴맛이 지나간 자리에,
입맞춤이 끝나고 말없이 일어서던 날 그냥 올려다만 보고 있던 지호의 눈이 생각난다.
"너 뭐하냐."
"네?"
"표지훈이 너보고 나 떠보라고 시켰냐?"
"네?"
"이 개새끼. 어제는 나보고 무슨 순결서약서니 뭐니, 쓰라고 하더니. 이런 미친."
"아, 아닌데..."
"유권아."
"네..."
"처신 똑바로 해라. 이번은 봐주는데 다음에는 너에게 신체적 결함이 생길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를 잘 판단해봐."
...후덜덜.
"아저씨, 나 와써여! 나아바!"
문 앞에서부터 벌써 부산을 떨며 우당탕탕 들어간 집에는,
"아저! ...씨..."
아무도 없다.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인데,
불은 꺼져 있고, 조용하다.
혹시나 먼저 잠들었나 침실을 열어보지만 아저씨는 없다.
사들고온 치킨을 식탁에 내려두고, 불도 켜지 않은 채로 그냥 서 있는다.
집 안은 조용하다.
어디에요.
- 먼저 자라니까. 안 잤어?
- 오늘 회식 때문에 늦는다고 아침에 그랬는데 울 돼지 조느라고 못 들었니 ㅠ
- 돼지야, 사랑해. 먼저 자.
- 사랑해.
머릿속이 복잡해 찬물로 샤워를 하고,
제대로 닦아내기도 전에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쪽.
조심스러운 손길이 앞머리를 쓸어넘기더니,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진다.
누군가 싶어 눈을 떴는데...
눈을 떴다고 생각했는데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고, 그저 몽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