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량 조절 대ㅋ실ㅋ패ㅋ
"아 좀, 빨리 쳐 봐!"
"시끄러워, 꺼져."
원래는 집에 가서 아저씨랑 차분히 볼 생각이었는데,
학교에서부터 징징대며 따라붙는 경을 칠 새끼 때문에 억지로 피시방에 끌려왔다.
어차피 넌 떨어졌을 거라며, 괜히 마음 졸이지 말고 빨리 확인하고 속이나 풀러 가자는 말에 욕을 한 바가지 해줬지만,
상향 지원한 것도 사실이라 불안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아저씨랑 같이 확인하려 그랬던 건데...
담배 연기 가득한 피씨방에서, 비웃음을 장전한 채 이미 눈은 웃고 있는 박경과 표뚱땡을 뒤에 세워두고,
홍삼대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아, 미친.
징징 댄다고 끌려온 나도 참 멍청하다.
"어? 형 홍삼대 썼어요? 헐... 패기 갑이네요."
"닥쳐."
우리집은 여전히 가난하다. 대학교도 애저녁에 포기한 걸
한 번 사는 인생, 뭘 하면서 살고 싶은지 도전은 해봐야하지 않겠냐는 형 말에 한 번은 해보기로 했다.
대신 정말 하고 싶은 곳에 정말 한 번만, 써보는 걸로.
재수는 없다. 점수 맞춰 가는 일도 없다.
"접속자 수가 많나봐, 느리네."
"어, 그러고 보니까 지호 형도 여긴데."
우지호.
지난 번의 입맞춤 이후로 보름도 넘은 것 같은데 한 마디도 나누질 못했다.
기억 안 난 척 넘어가야 하나,
장난이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야 하나,
진지하게 대화를 해야 하나.
미대 수시에 지원한 지호는 수능 점수가 나온 시점에서 이미 합격이 결정됐다.
학교에 오면 곧바로 미술실로 가 틀어박히는 녀석을 유리창 너머로 몇 번 훔쳐본 적은 있지만...
이제는 볼 일이 없을 거란 투로 달려든 그 입맞춤이 마지막 인사였던 것만 같단 인상이 남아서,
내가 먼저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때... 나도 같은 학교 썼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만약 여기 붙어버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호는,
꼭 그래야 했던 걸까.
뒤늦게 뜬 페이지에 번호를 입력하고 조회를 눌렀는데,
접속자가 아직도 많은 건지 시간이 좀 걸리다가 화면이 바뀐다.
- 결과 : 불합격
- 본인의 등수 : 29
삑삑삑삐삐삑-, 철컥,
문을 열고 들어선다.
인기척이 느껴지고, 현관에까지 맛있는 냄새가 들이차있다.
"아저씨?"
오늘이 결과발표일이란 건 아저씨도 알고 있다.
설마 일찍 와서 축하 음식이라도 만들고 있는 걸까?
나 떨어졌는데...
"왔니?"
신발을 벗으려다가 신발장에 놓인 여자구두를 보고
집을 잘못 찾아왔나, 헷갈려할 때쯤 부엌에서 삼십대 후반 쯤은 되어 보이는 아줌마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내 앞치마를 입은 채로.
"누구...세요?"
"어머... 학생이야 말로 누구...?"
"저 여기 사는데요..."
"여기 산다구요? 이상하다. 민혁이 집이 맞는데."
네? 어떻게 아저씨 이름을...?
앞치마를 입은 차림새지만,
화장과 머리손질까지 하고 적당히 멋도 낸 것 같은 차림새를 보면 보통 아줌마 같진 않은데.
아저씨네 엄마라고 하기엔 너무 젊고...
삑삑삑삑삐삑, 철컥,
복도에 마주한 채 아줌마와 내가 서로 답이 나오지 않는 상대의 정체에 대해 고민에 빠질 때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몸을 돌린다.
"아저씨!"
"민혁아!"
"유권이라고 하는구나. 아줌마가 말 편히 해도 되죠?"
"아... 그러세요."
"그래, 친구 동생 돌봐주고 있다고?"
"뭐...,"
음식이 가득 들어찬 식탁에 셋이 앉아 어색한 저녁이 시작됐다.
아저씨의 가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던 내가,
아저씨에게 누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삼년이나 걸린 걸 반성을 하고 있는 사이에
역시 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던 아저씨의 누나에게 나는,
잠시 같이 지내고 있는 아저씨 친구의 동생이 되었다.
"누나, 어떻게 들어왔어?"
"경비 아저씨한테 마스터키 부탁했지-"
그런 식으로 둘러대는 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기분은 별로다.
노려보는 나를 다독일 틈도 없이 빠르게 화제를 돌리며 아저씨가 식탁 밑으로 손을 꼭 잡아온다.
그래, 일단 나중에 이야기 해요.
"연락 없이 맘대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뭐 어때, 가족끼리. 유권 학생, 식기 전에 식사부터 어서 해요."
"...네."
아저씨에게 잡힌 손을 풀고, 어쨌거나 손을 움직인다.
"그건 그렇고, 선은 잘 보고 왔어?"
"누나!"
멈칫.
호박전을 집으려고 내뻗던 손이 나도 모르게 멈춘다.
황급히 말을 막듯 소리를 높인 아저씨가 내 쪽을 슬쩍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아니, 오늘 낮에 맞선 봐놓고선, 너도, 그 쪽에서도, 연락이 없으니"
"그거,"
"아저씨,"
셋의 말이 섞인다.
하지만 말과 함께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발언권을 갖는다.
"저 오늘은 집으로 갈게요. 쉬세요. 안녕히 가세요."
"권아!"
아저씨랑 아저씨의 누나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곧장 걸어 현관문을 열고 나온다.
곧장 엘레베이터로 가 버튼을 누르고 몇 층에서 오는 건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드는데,
눈 앞이 부옇게 흐려 잘 보이지가 않는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
"권아,"
곧바로 따라 나온 아저씨가 뒤에서 끌어안는데,
눈물이 툭, 떨어진다.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면서도 화가 차올라 팔을 풀려고 버둥거린다.
잡힌 두 팔을 휘두르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그대로 정강이를 까버린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체중을 실어오는 아저씨에게 밀려 그대로 들어와버린다.
"권아! 권아, 아니야... 아니야, 권아..."
"뭐가, 뭐가 아닌데!"
몸을 바로 돌려 안으려는 아저씨를 밀쳐내다가, 아저씨의 큰 손이 머리를 감싸 안자 못 이긴척 안긴다.
아저씨 어깨에 얼굴이 닿자 다시 또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권아, 오늘 맞선 보러 안 갔어. 안 가고 평소처럼 회사 갔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가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소리에 조금은 안정이 된다.
"왜 얘기 안 했어."
"필요없으니까."
아저씨의 가족. 당연히 있을 텐데,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런 사이라고까지 이야기하진 못 했지만, 아저씨는 우리 엄마랑 형한테도 항상 신경 써주는데...
아저씨의 나이. 그저 마냥 어른이라고만 생각했다.
확실히 나랑은 다른 어른이구나, 라고만 생각했지, 아저씨의 나이에 따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진정이 되고나니,
아저씨보다는 스스로가 미워지기 시작한다.
고등학생으로 3년. 뒤늦게 시작해서 공부에 매달린 시간이라곤 해도,
아저씨에 대해 뭐하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사랑한다고 생각해왔던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만 같아서.
"나, 친구 동생이에요?"
"그건..."
그래도 하나는 걸린다.
거짓말하기 싫어하는 아저씨가 거짓말을 했다. 내가,
거짓말을 하게 만들었다. 내가,
거짓 같은 존재다.
"갈래요."
"권아, 누나 금방 돌아갈 거야. 집에 가서 이야기 하자. 아저씨랑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자. 응?"
아저씨의 목소리에 많은 게 담겨있다.
걱정, 과 미안함. 안타까움과 죄책감. 애달픈 것. 사랑.
내 마음도 같다.
그리고 알 것도 같다, 이 상황.
화는 이미 사그라든 지 오래다. 그치만,
뭔가 그보다 무서운 것이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걸 느낀다.
"아저씨 친구 동생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아요. 자고... 내일 봐요."
"미안해, 권아... 데려다 줄게. 같이 가자."
"혼자 갈래... 혼자 가요."
집에 돌아가서 엄마한테 대학교 떨어졌다는 한마디 하고는, 바로 정신을 잃듯 잠이 들었다.
아침에 학교 가야지, 라며 깨운 엄마는 제대로 밥 한 끼 못 먹이고 보낸다고 미안해 하며 일하러 갔다.
파주에서 버스를 타고 온 곳은, 학교가 아닌 아저씨의 오피스텔.
아침 10시 반. 버스에서 내려 다들 일터나 학교로 가고 인적이 드물어진 길을 걸어가다가
예전에 알바를 한 적이 있는 편의점을 지나친다.
유리벽 너머로, 카운터에 멍청히 앉아 있는 남자 알바생이 보인다.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보고 있으니, 매일같이 담배를 사러 들르던 아저씨의 모습이 떠오른다.
정작 그렇게 골초는 아니었다고. 매일 사가던 담배가 오피스텔에 새 것 그대로 쌓여있던 걸 보고 뭉클했던 기억도 있다.
비밀번호는 920409.
어쩐지 낯설게 느껴져 문을 열고서도 바로 발이 움직이지가 않는다.
부엌에는 낯선 손길의 흔적이 남아있고, 내 앞치마는 식탁 의자에 걸려 있다.
밤이면 저 식탁에 둘이 마주 앉아 나는 공부를, 아저씨는 회사일을 하곤 했는데.
그 자리에 앉는다.
3년 동안 정말 열심히 한 것 같았는데 나는,
대학에도 붙지 못했고...
아저씨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다시 돌아와~ 말하려 하다~ 곰곰히 더 생각해보면 오반가, 오 마이 갓 속탄다, 자ㄲ'
문득 울리는 벨소리에 정신이 들어 액정을 보니 부재중통화 목록에 이름이 박경이다.
- 사랑해, 권아
- 기분 좀 풀렸어?
- 일 끝나고 데리러 갈게
- 권아
- 김유권
- 보고 싶다...
아저씨가 남긴 톡들을 이제서야 본다.
사실 밤중에, 아니 아침에라도 아저씨가 찾아와 기다리는 상상도 하고 있었는데,
아저씨는 오늘도 어제처럼 회사로 나간 모양이다.
물론,
어른의 사정이야 있겠지만... 이런 날 하루 쯤은 나한테 와주면 좋았을 텐데.
부르르르.
- 보고 싶어
톡의 확인 표시가 사라지는 걸 확인 했는지,
보고 싶다는 말이 새로 뜬다.
고개를 들어 오피스텔을 둘러보면,
우리 모습이 보인다.
공부하는 내 머리에 입을 맞추고 씻으러 들어가는 아저씨.
소파에 앉은 아저씨 무릎을 베고 누워 티비를 보는 나.
일어나자마자 주스를 마시는 내게 입을 맞춰오는 아저씨.
어설픈 오해로 처음 몸을 섞는 우리.
내가 아는 아저씨의 모습은 모두 여기에 있다.
내가 모르는 바깥 세상에서 아저씨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고민을 안고 살고 있는지 나는
단 한 번도 궁금해 한 적이 없다.
처음 만났을 때 아저씨는 담배를 피며 인생의 씁쓸함을 잠시 잊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말조차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저씨가 어떤 씁쓸함을 느끼며 살아왔는지, 혹은 살고 있는지,
고민해본 기억이 없다.
오늘 7시에 홍대에서 보자. |
"여기~" 어떻게 뚫었는지 홍대 외곽 쪽 술집에 들어가니, 이미 녀석들은 판을 벌이고 있었다. "왔냐?" 떠들고 있던 지호가 먼저 인사를 해온다. 목소리를 듣는 게 얼마만인지. "태일이 형, 안녕하세요." "그래, 앉아." "너는 유학 안 가냐?" "헐, 그 얘긴 또 왜 꺼내세요. 슬프게..." 태일이 형과, 형을 한 쪽 팔에 끼고 앉아 있는 표코몽에게 인사를 하니, 이 놈은 또 덩치에 안 어울리게 급 침울해진다. 새끼, 진짜 어딜 가긴 가나보네. "저 가면 우리 탤형은 어떡해요. 헝." "어떡하긴 뭘 어떡해."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살겠지." 태연한 태일이 형과 당연하단 말투로 뒷말을 잇는 지호의 연타에 표지훈은 한층 더 울상이 되고, "야, 무슨 남자야. 징그럽게, 어우." 박경은 벌써 4년 째 저렇게 붙어먹는 둘을 봐오면서 아직도 감이 안 오나보다. 세상에나, 눈치 없기도 저정도면 정말 노는 물이 다르다. "어떤 거 마실래?" 목이 따끔한 게 싫다고 맥주를 입에도 대지 않는 태일이 형 때문에 우리 테이블에는 항상 맥주와 소주가 둘 다 올라온다. 인사야 습관처럼 했다치고,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피해 다니던 지난 삼 주의 시간이 무색하게 지호가 평소처럼 말을 걸어온다. 피하지 않고 눈길을 마주쳐 온다. 얼핏 웃음기까지 서린 눈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모르겠다. "난 매화주." "헐," "뜬금없긴. 그냥 있는 거 마셔." "왜, 오늘 니가 사는 거라며." 태클을 걸어오는 박경을 향해 시위를 매긴다. "너 대학 다 떨어진 기념으로 모인 거니까." "그럴 듯하다." 지호가 지원사격으로 들어온다. "헐, 야 김유권 너도 다 떨어졌잖아." "나 아직 하나 발표 안 남." 물론 붙는다고 갈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요, 저번엔 제가 유학간다고 샀으니까 오늘은 대학 떨어진 경이 형이 사시면 되겠네요." "그래, 남자가 쿨하게 가자." "그래, 박경. 대학은 떨어졌어도, 남자인 건 포기하면 안 되지." "헐. 씨발, 김유권, 너 오늘 죽어봐라. 여기 매화주 다섯 병이요!" "아, 씨발. 후-," 숨을 돌리려 도망쳐 나온 화장실에서, 어지러운 정신을 다잡으며 찬물로 세수를 한다. 후-, 박경 이 새끼가 진짜 오늘 날 죽이기로 작정을 했나. 짝. 짝. 젖은 뺨을 가볍게 두 손으로 두드리고, 눈을 감고 머리를 털어본다. 어지러워. 천천히 눈을 뜨니 거울 속에 지호가 보인다. "넌 괜찮냐? 박경 저새끼 미쳤나봐, 막 달려." 몸을 돌려 말을 거는데도 지호는 여전히 입구 쪽이 가만히 서서 나를 보고 있다. "...야, 우지호. 괜찮냐?" 같잖은 드립에, 말도 안 되는 멜로디의 노래까지.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박경의 말도 안 되는 페이스에 맞춰서 같이 달리더니 취했나. "우지ㅎ" "김유권." 걱정이 되서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려는데, 그걸 막고 내 이름을 불러온다. 그리고, 아, 흡- 순식간에 다가와 입속으로 쳐들어온다. 차가운 혀가, 하읏, 얽혀온다. 어지러워 몸을 가누지 못하고 뒷걸음 친다. 세면대가 닿아 막히니 지호의 두 팔이 내 허벅지를 그대로 들어올려 앉힌다. "야, 우지ㅎ, 읍," 멱살을 잡아 당기며 다시 들어오는 그 시원한 느낌이 어지러운 머릿속을 휘젓는다. 하읏, 읍, 츄릅, 술이 더 퍼져가는지 몽롱한 가운데, 타액이 섞여 나는 야한 소리가 자꾸 귓가를 때려 정신이 없다. 하아, 하, 숨을 고르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뜨니 지호가 피식 웃더니 내 입가에 넘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을 엄지로 닦아주고는 나간다. "김유권, 뺑끼치지 말고 빨리 와 마셔." 멍하니 그대로 세면대에 걸터앉아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나오니, 술판은 여전하고, 술잔은 다시 채워지고, 지호는 또 시덥잖은 표코몽의 농담에 웃어주고 있다. 그러다가 다시 눈이 마주치면, 손가락으로 내 핸드폰을 가리킨다. 액정에 톡 알림이 떠있다. - 나 이제 안 망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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