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마마 납시옵니다."
다행히도 내가 막 공주의 별궁으로 돌아왔을 때, 공주 또한 별궁으로 돌아오는 듯 했다.
고개 숙여 예를 표한다.
"공주마마.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너는. 잘 지내었느냐. 어서 안으로 들자꾸나."
먼저, 자신의 별궁 안으로 드는 공주를 조용히 뒤따라 간다.
공주가 자리에 앉자 큰 절을 올리고, 나 또한 자리에 앉는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예를 표하고 있는 내 귀에 별안간 큭큭, 대는 소리가 들린다.
"어때? 여기 생활은 할 만해?"
너무도 낯익은 목소리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한 내가.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만다.
"김옥빈?"
"그래. 나야."
"네가. 아. 아니 공주마마가 어찌."
"단 둘이 있을 때는 그냥 편하게 불러. 어짜피 니 꿈이니까."
"하..."
"..."
"언니."
"왜. 동생아."
"한 가지만 묻자. 세자며. 왕자며. 저 사람들은 다 누군데. 왜 처음 보는 것 같은 사람들이 다 내 꿈에 나오는 건데?"
"글쎄. 과연 너랑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일까?"
"뭐?"
"말했잖아. 이건 니 꿈이라고. 오로지 너만이 통제하고 조정할 수 있는 너의 꿈."
"..씨발. 좀 쉽게 설명해 봐!!!!!"
"싫은데? 그럼 재미없잖아."
"..."
"그래서? 넌 니 꿈에서 널 뒤흔드는, 저 남자들 중에 누가 가장 좋은데?"
말문이 막힌다.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럼 더 즐겨봐."
"...뭐?.."
"이런 상황. 너무 재밌지 않아? 어짜피 꿈은 깨면 끝인데."
"...하긴............... 그렇네."
"나는 앞으로도 쭉, 니가 너의 꿈을 최대한 즐길 수 있도록 도울거야. 이 꿈에서 깰 지 말 지는 니가 정해."
"그걸 어떻게 정하는 데?"
"그 것도 니가 찾아보면 되는거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봐라. 안상궁. 밖에 있느냐." 하고는 내 입을 막아버리는 김옥빈. 아니. 공주마마다.
안상궁이 안으로 들자, 나를 보고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나의 벗께서 퇴궁하신다는구나. 궁녀를 시켜 궐 밖까지 뫼셔 드려라."
잔잔한 저 바다 밑 같은 남색 푸른빛의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달려온 사내가, 대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다.
바닥을 쓸고 있던 배복(陪僕, 남의 집에 매여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사내를 주목한다. 게중 한 배복은 연거푸 눈을 비비며, 제 눈을 의심한다.
평소 행동거지에 흐트러짐 하나 없던 제 상전이다. 제 상전을 뫼시고 저자거리에라도 나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계집들의 탄성 소리에
저절로 으쓱해질만큼. 선비 중에 선비셨던 분이었다. 허나, 방금 대문을 들이닥친 저 사내는 '내가 뫼시던 도련님이 맞나.' 싶을 정도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잔뜩 흐트러진 모양새다.
선비의 마음가짐은 정갈한 옷차림에서부터 시작한다 믿는 제 상전이 저리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딱 한 가지다.
제 상전의 하나 뿐인 누이.
아마 세간을 떠들썩하게 달군 그 소문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고자 이리 달려온 것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내젓는 배복이다.
"아버님. 아버님은 어디 계시느냐."
"ㅇㅇ 아가씨와 좀 전에 입궐하시고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하.."
거친 숨을 몰아쉬던 준면이 비틀거리며 마루에 걸터앉는다.
늘 주변에 저와 비슷한 또래가 없어, 홀로 서책을 읽거나, 글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저를 잡고 조곤조곤 얘기를 해오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던 제 동생이,
공주마마의 말 벗으로 궁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내심 기뻤던 준면이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제 누이를 벗으로 대해주시는 공주마마께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허나, 오늘만큼은 공주마마가 밉다.
저를 불충이라. 진정한 선비가 아니라. 그리 욕하여도. 미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제 하나뿐인 누이를 지키기 위해, 보호하기 위해. 수 년을 부단히 애쓴 제 노력을.
공주마마께서.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셨다.
"오라버니?"
저를 부르는 음성에 고개를 돌린다.
시선의 끝에 나의 누이가 서있다.
"연아(娟雅)야."
연아(娟雅). 준면이 처음 글공부를 시작하면서 제 스승에게 이 무수한 글자들 중, 가장 아름다운 글자가 무엇입니까. 그리 물었던 적이 있다.
어린 준면의 물음에, 스승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새하얀 화선지 위에 저 두 글자를 새겨 주었다. 스승님. 이게 무슨 뜻이옵니까 하고 또 다시 제게 물어오는
준면을 무릎에 앉힌 스승이 한 글자, 한 글자 짚어주며 설명한다.
예쁜 연. 맑을 아.
맑아서 예쁘다는 뜻이다.
세상에 맑고 투영한 것 만큼 아름다운 것이 또 있겠느냐. 하는 스승의 말에,
어린 준면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게 딱 제 누이입니다."
그 길로 집에 돌아온 준면이, 아직 글 조차 읽지 못하는 제 누이에게. 스승이 적어준 글자를 펼친다.
너무도 맑아서 어여쁜 나의 누이야.
내 너를 이제부터 연아라 부를 것이다.
처음 제 누이에게 연아라 불렀을 때처럼.
이제 홀로 글도 읽을 줄 알며, 깨금발을 들고 서면 제 눈높이까지 얼추 맞추어올 정도로 훌쩍 커 버린 지금의 제 누이는.
여전히 맑고. 어여쁘다.
"연통이라도 넣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오래 기다리셨던 것입니까."
"아니. 아니다. 나도 이제 막 오는 길이다."
"그러셨습니까?"
다행입니다. 정말. 하고 제게 웃어보이는 누이를 바라보며, 성균관에서부터 집까지 오는 길 내내 묻고 싶었던 질문을 속으로 꾹 눌러 삼키는 준면이다.
내 너를. 세상 밖으로 내어놓을 준비가 되지 않았으나,
너의 뜻이 그러하다면. 내 어찌 그 뜻을 꺾을 수 있겠느냐.
대신. 이 오라비에게 하나만 약조해주겠느냐.
혹여 무슨 일이 생기거든. 이 오라비에게 제일 먼저 달려오겠다고.
약조해주겠느냐.
네. 오라버니.
고맙구나.
"재회(齋會, 조선 시대에, 성균관 재생(齋生)이 재중(齋中)의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자치적 모임)를 열 것이다."
"장의."
"모든 성균관 유생은, 곤시(坤時, 오후 두 시 반부터 세 시 반) 까지 명륜당으로 집합한다."
장의는 재회를 절대적으로 선도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
학령을 어긴 유생을 문책하여 출재(黜齋:퇴학)할 권한 또한 갖고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전하께서도. 친히 그에게 성균관을 잘 부탁한다, 하명하셨다고 한다.
적어도 성균관에서 만큼은 그의 말이 곧 법도.
모든 유생들은 이에 토를 달 수 없다.
"이 성균관에. 세자저하와 왕자마마, 공주마마. 그리고 사대부 집안 여식들 여럿이. 새로이 입학하게 될 것이다.
허나. 이 성균관.
적어도 이 곳에서만큼은. 제 아비의 신분이 무엇이든. 집이 몇 칸이든. 다 상관없다.
그저 다 똑같은. 유학을 숭배하고, 이 나라 조선을 옳은 길로 이끌어 갈. 신출내기. 성균관의 유생일 뿐."
"..."
"그러니. 성균관의 장의로서 명한다."
"..."
"새로이 입학하게 될 유생들을. 그 어떠한 차별없이 대하도록."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경건한. 장의의 낯 빛에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 유생들이다.
그 때, 한 쪽 끝에서 누군가 질문을 던진다.
"장의. 그럼, 신방례(新榜禮, 조선시대식 신입생 환영회) 는."
"신방례 또한. 그대로 진행될 것이다."
그 또한. 하해와 같은 선진들의 가르침이니까.
성균관에 입학하려거든.
그 정도 각오는 하지 않았겠나.
당당한 자태로 뒤돌아서는 경수의 낯 빛이 어둡다.
장의인 내가, 이 성균관을 잘 이끌어야 한다. 그리 다짐하며 소매 자락을 와드득, 소리가 나게 움켜쥔다.
우쮸쮸쮸입니다 :)
막상 글을 쓰고 나니.......
종인이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제가 언제 쓰고 안 쓴건지ㅠㅠㅠㅠㅠㅠ
종인아.. 누나가 미아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다음편엔 그 누구보다 멋있게... 등장시켜드리겠습니다...!!!!!!!!!!!!!!!!!!!!!!!!!!!!!!!!!!!!!!!!!!!!!!!!!!!!!!!!!!!!!!!!!!!!!!!!
조교썰을 기다려주시는 분들이 아마 많으실텐데요ㅠㅠ.. 조교썰은. 성균관 스캔들이 안정을 찾는 대로
써오도록 하겠습니다!!!!!!!!!!!!!!!!!!!!!!!
암호닉 신청은 늘 받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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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댓 달아주신 모든 분들께 고백할게요. 사랑합니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