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헉.
빨라지는 호흡에 가빠오는 숨을 진정시키며, 선우가 손을 뻗어 벽을 짚었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인식도 못한 사이에 등으로 한 줄기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씨발, 낮게 욕을 중얼거리며 선우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느려진, 고의적인 발걸음이었다. 아마 저 멀리 보이는 정환의 얼굴을 보고 굳어졌을 표정은 풀지 못한채로, 선우는 무겁게 걷고 있었다.
뭐야.
정환의 한 마디에 선우는 허, 하고 코웃음을 내뱉었다. 청승맞게 밤중에 혼자 자리를 잡고 앉아 소주를 들이키는 모습이 우스웠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술에 취해 사람을 불러내놓고서는 한다는 소리가 뭐야. 고작 이 한마디라니. 지금까지 애써서 달려온 것이 다 헛걸음이었던 것만 같아 선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미쳤어.
…뭐가?
왜 전화했어.
…내가 전화했어??
했잖아, 전화. 선우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인 정환이 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최근기록을 발견하고는 작게 욕을 읊조렸다. 내가 병신이네. 폰을 없애던가 해야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혼자 중얼거리는 정환의 맞은편에 선우가 앉았다.
앉지 마.
정환이 다그쳤다. 니가 불렀잖아. 술주정하냐? 선우의 대답에 정환은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어 한 모금 더 들이키며 반복했다. 앉지 말라고. 그냥 가라.
미친, 지금 너 나 놀리냐.
…….
급하게 부르길래 혹시나, 하고 와본 내가 병신이지, 씨발. 니가 병신이 아니라.
……미안.
앞으로 쓸데없이 부르지 마. 존나 짜증나니까. 하나만 해, 제발.
말을 마친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섰다. 시린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느낌에 안 그래도 비어있는 것 같았던 가슴 한 구석이 더 쓰린 느낌이었다. 그 때였다. 소주를 잘만 홀짝이고 있던 정환이 갑자기 테이블 위로 픽, 하고 쓰러져버린 것은.
…야, 이정환.
…….
미친 놈이 술도 못하면서 앉아있는 것부터가 이상했어.
…….
같이 마셔줄 사람도 없으면서 술은 왜 마시냐.
선우가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 앉았다. 땅을 긁는 둔탁한 소리가 영 거슬리지만은 않았다. 정환의 잔에 남아있던 소주를 가득 따라 채운 후 입에 털어넣었다. 맛도 더럽게 없네.
야.
…….
너 존나 잘 잔다. 난 누구 덕분에 요즘 며칠째 못 자는데.
…….
…그래도 아까 전화한 거. 무의식중에라도 내 번호 떠올린거라고 멋대로 생각할게.
…….
서로 잊자고 했을 때 아예 연을 끊었어야 했는데, 그치.
…….
이렇게 힘들거면 그냥 버텨볼걸 그랬다.
선우가 다시 술병을 집어들고 술을 따랐다. 빈 속에 홀로 들이키는 술에 속이 쓰려왔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힘겹게 정환을 업고 길가로 나왔다. 익숙한 체취가 물씬 코끝을 맴도는 느낌에 선우가 아무 말 없이 씁쓸한 웃음만 흘렸다.
내가 안 왔으면 집은 어떻게 가려고 했냐.
…….
너 술 취했을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직 나밖에 없는거지?
…….
입이 있으면 대답을 좀 해봐. 개새끼야.
잠든 사람 곁에서 뭐라고 하는 건지. 스스로의 모습이 웃기면서도 이상하게 계속 말을 걸고 싶어졌다. 나도 취했나. 선우가 속으로 생각했다. 저 멀리서 택시 하나가 오는 것이 보였다. 선우는 잠자코 있었다. 결국 둘 앞을 휙, 지나가버린 택시의 뒷꽁무니를 눈끝으로 쫓으면서, 선우가 눈을 감았다. 익숙한 체온, 그토록 그리웠던 이정환이 지금 옆에 있다는 것이 그저 좋았다. 원치 않는 만남이었다고 해도 괜찮을 정도로.
그로부터 거의 삼십분 즈음이 지났을때, 비로소 선우는 정환을 보내줄 수 있었다. 오랫동안 같은 체격의 남자를 업고 있어서 그런지 뻐근한 등의 느낌이 낯설었다. 아직까지 잊지 못하고 있던 정환의 집주소를 불러주며 생각했다.
익숙함 투성이다, 정말로.
더 이상 가까워지지 마, 이정환.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투박한 등에서 푹신한 자동차 쿠션 위로 몸이 옮겨졌는데도 이상하게 더 추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심코 눌러보았던 번호가 너무나도 익숙해서, 지워버렸는데도 결국 본능처럼 입력된 것이 신기해서, 실수인지 고의인지 통화버튼을 눌러봤을뿐인데, 한걸음에 달려왔다.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 이렇게라도 난 네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했던 것이 분명하다. 술을 핑계로, 내가 술마시는 것에 대해 그가 민감하다는 사실을 이용했던 것이다. 취하지 않았다. 취하지 않았어.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술 마실 때 불러낼 사람. 너 밖에 없더라. 정말로.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목구멍 안으로 애써 삼켜내면서,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버린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선우가 보이는 것만 같아 다시 눈을 감아버린다.
너무 멀어지지 마, 차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