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라이트
01
야, 김준면. 소란스럽다. 큰 손의 누군가가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밝은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찬열이었다. 왜... 등을 갈겨. 손을 뻗어 옆의 가방과 펜, 노트를 챙겨들었다. 교수님마저 나가시고 빈 강의실이 컸다. 야, 다음 공강이야. 어디 가서 아이스크림이라도 빨자. 똥백 까페라도 갈래? 찬열의 말에 대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시는 점점 더워져만 갔다. 6월이 되자 슬슬 매미들도 하나둘씩 나와서 울기 시작했다. 아, 시끄러워.. 찬열이 머리를 털었다. 캠퍼스에 있는 나무들이 모두 녹색으로 색이 짙어져만 갔다. 잎이 시원하게 펴서 그늘이 졌다. 스쳐가듯 나무들을 눈으로 훑고 지나가는데, 아. 나는 멈춰섰다.
..도경수.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여전한 그 공허한 눈동자. 녀석은 날 보자마자 잠시 머뭇거리다가 옆의 가방을 챙기고 자리를 떠났다. 뭐지? 같은 학교야? 앞서 걷던 찬열이 돌아와서 뭐해, 하고 물었다. 잠시 녀석이 앉아있던 벤치를 쳐다보던 나는 걸음을 뗐다.
“야, 나 도경수 봤어.”
아메리카노를 내려놓던 백현이 뭐? 하면서 되물었다. 도경수, 왜 고등학교 때 걔. 찬열이 빨대를 꾹꾹 눌러씹었다. 같은 학교더라? 휘핑크림을 저으니 백현이 손을 때렸다. 이쁘게 만드니까 망가뜨리고 난리야, 난리는. 주방으로 들어간 백현이 접시를 닦기 시작했다. 몇분 간 정적이었다. 수도꼭지에서 틀어져나오는 물소리와 뽀득뽀득거리는 설거지 소리만 들렸다.
“네가 경수보고 더럽다고 욕했잖아. 다시는 보지 말자면서. 근데 너한테 말해야해?”
찬열이 키위주스를 쭉 들이켰다. 아이고, 시원하다. 담담하게 말을 해 더욱 이상했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윙윙거리며 났다.
“야, 당연한거 아니야? 누가 강간범보고 그딴말을 안해. 너네 이상하다, 너희는 존나 여친강간한 새끼를 더럽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
“아, 시발. 이런 미친새끼. 넌 시발 눈치도 없냐?!”
“니네 둘다 조용히 안해?!”
주방안에서 들려오는 뎅, 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찬열은 계속 빨대끝을 짓이겼다. 이빨자국이 진하게 남은 빨대는 곧 쓰레기통에 쳐박혔다. 말을 말자, 말을... 에휴.
과제는 오질나게 많았다. 까페 구석에서 자리나 잡고 와플이나 먹으면서 자판 두드릴까? 하고 생각해 넷북을 챙겨들고 근처 까페로 향했다. 미닫이 문을 여니 위에 달려있는 종이 울렸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빵하나를 시키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자판을 두들기는데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지? 키보드 위에서 손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는데, 밤톨같은 뒤통수가 눈에 딱 들어왔다. 앞에는 딸기스무디를 쪽쪽 빨아들이는 김종인이 있었다. 도경수? 하늘색 반팔 후드티는 녀석의 살을 더욱 하얗게 만들어주었다. 종인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도경수 덕에 녀석의 입모양을 확실히 알수가 있었다. ‘좆까’ 저 씨발새끼가? 일어서서 종인의 뒷통수를 한 대 갈길까 생각하던 나는 뒤이어 튀어나온 종인의 질문에 잠시 가만히 있었다.
“야, 씨발. 니는 아직도 김준면 그 새끼 못 잊었냐?”
“시작도 안해본 거 너는 잊으라고 그러냐..”
“생각을 좀 해봐, 너는 안 억울해? 너 혼자 마음 주고 몸 주고, 어? 나라면 억울해서 이미 총각귀신 다 됬겠다.”
“응. 이제 진짜 다 정리했으니까 괜찮아.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고 그래, 김종인.”
토해내는 목소리는 여전히 청아했다. 드러난 목덜미가, 여전히 아름다웠다. 나는 지금, 또다시 이 녀석한테 무슨 감정을 품는걸까. 그때처럼 가슴이 몽실몽실했다. 아, 김준면, 진짜 단단히 미쳤고 돌았지. 손을 뻗어 솜털가득한 뒷덜미를 만지고 싶었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감촉은 아직도 기억하는 그 입술에 혀를 가져다대고 싶다.
“씨발! 야, 나 진짜 지금 생각해도 억울해 미치겠는데! 와! 도경수 존나 스님이네!”
“까페잖아, 욕좀 그만해.”
“씹, 그 개년이 지 오빠한테 사주해가지고 니 전교에 걸레라고 소문난거잖아! 걸레고 남창이고, 너 평생 못들어봤을 욕까지 다 얻어먹었잖아. 도경수, 이래놓고 안 억울하다고?”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탁탁대던 타자소리가 멈췄다. 이게 무슨 듣도보도 못한 소리야. 전교에 걸레라고 소문난게, 구라라고? 도경수의 머리 너머로 김종인의 눈이 보였다. 마주한 그 눈에는 말도 못할 만큼 커다란 증오가 서려있었다. 나는 와플을 들고 있던 휴지를 내려놓았다. 넷북을 가방에 집어넣고, 계산하고, 그렇게 나왔다. 씨발, 이게 지금 무슨 개같은 상황이야.
[야 도경수랑 나 사이에서 내가 모르는 거 있었냐]
[모르는게 아니라 안본거지]
[됐고 빨리 말해]
[고등학교때 동아리에서 널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는데]
[아니 똑바로 말하라고]
[씨발 그건 니가 알아내야지 이제야 안거냐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건데]
[몰라 일단 변백이랑 같이 우리집으로 와 씨발]
휴대폰 홀드버튼을 꾹 눌렀다. 화면이 깜깜하게 변했다.
2부 일편이 왔슴둥 2부가 경수시점이라고 거짓말쳐서 미안해요 짜집다보니 이렇게 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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