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우현과 성규는 그 사건 이후로 급격하게 친해졌다. 원래 남자들의 친화력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은 뭔가 달랐다. 서로의 무언가에 끌리는 듯, 마치 오래전부터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는 듯 다른 새 친구를 사귈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그저 무의식중에 그렇게 느낄 뿐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어느덧 5월 중순이 되었고 완전한 봄 날씨가 되었다. 유난히 따뜻한 바람이 불던 날, 우현과 성규는 점심을 먹고 운동장에 나왔다. 우현은 성규를 졸라 아이스크림 하나를 얻어냈다. 두 사람은 운동장을 돌다가 운동장 한켠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았다. 성규는 앉을 때마다 다리를 벌리고 앉는 게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던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우현은 학생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넌 왜 축구를 싫어하냐?”
잠시 고민하던 성규는 대답했다.
“쓸데없이 뛰어다니잖아. 다 부질없는 짓이야.”
“병신..”
우현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성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성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우현에게 말했다.
“넌 왜 싫어하냐?”
“난 안 싫어하는데.”
“근데 왜 안 해?”
“못해서.”
“병신.”
성규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우현을 바라보았다. 우현은 그런 성규를 보지 않고 축구를 하는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성규는 그런 우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우현은 그런 성규를 의식하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하였다.
“야.”
“왜.”
“넌 여자친구 안 사귀냐?”
“닥쳐.”
우현이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먹고는 성규를 노려보았다. 성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 못 사귀는 거지.”
“꺼져, 시발. 안 사귀는 거거든?”
“왜?”
“공부에 방해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거겠지.”
“아, 개새끼 진짜.”
우현이 한 대 때릴 듯 한 기세로 성규를 노려보았다. 성규는 그런 우현을 무시하고 시선을 돌리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우현도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 다시 고개를 운동장으로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아무 대화도 오고가지 않았다. 그때, 우현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성규에게 말했다.
“근데 너 오늘 공연 아니었냐?”
“무슨 공연?”
“너 밴드부 그거 오늘 체육관에서 공연한다며.”
“아, 그거 취소됐어.”
“왜?”
“드럼 치는 형이 아파서 결석했어.”
“아.”
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규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씨익 웃으며 우현에게 말했다.
“왜? 보고 싶어서?”
“닥쳐. 제발.”
“보고 싶구나?”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거든?”
“그래, 보고 싶어서 궁금해 졌겠지.”
“........너 아이스크림 막대기로 맞아봤냐?”
두 사람이 그렇게 유치한 말장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까부터 계속 두 사람을 지켜보던 한 여학생이 우물쭈물하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성규가 먼저 그 여학생을 발견했고 성규의 시선을 따라 우현도 그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두 사람 앞에 선 그 여학생은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더니 부끄러운 얼굴로 성규에게 말했다.
“선배...저기.”
성규는 입을 꾹 다물고 여학생을 올려다봤다. 여학생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캔커피를 성규에게 건넸다. 그런데 그 캔커피에는 또박또박 정성들여 쓴 글씨가 적혀있는 쪽지가 붙어있었다. 성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여학생을 올려다보았다. 여학생은 부끄러운지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학생은 성규가 그것을 받아들지 않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드세요.”
“왜?”
성규는 그렇게 말했다. 우현은 눈치가 없는 성규를 못마땅한 듯이 쳐다보았다. 여학생은 당황한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그냥요..드세요.”
여학생은 이상한 대답을 한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성규는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지 않았다. 우현은 그런 성규의 뒷통수를 한 대 치고는 성규 대신 여학생으로부터 캔커피를 받아 들었다. 여학생이 고개를 들자 우현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이 새끼가 눈치가 없어서. 미안. 고맙다고 해. 김성규.”
성규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는 우현을 바라보았다. 여학생은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이고는 저 멀리 도망가 버렸다. 우현은 캔커피를 성규에게 건네며 말했다.
“진짜 모른거냐? 아님 모르는 척 한 거냐? 여자애가 당황해 하잖아.”
하지만 성규는 그 것을 또 받아들지 않고 우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우현은 표정을 확 찌푸리며 말했다.
“받아, 빨리.”
“넌.”
성규는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우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성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성규는 낮게 깐 목소리로 말했다.
“넌 진짜 모르는 거냐? 아님 모르는 척 하는 거냐?”
“뭐?”
쌩뚱맞은 성규의 질문에 당황한 우현이 그렇게 말하자, 성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멍하게 쳐다보는 우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거 니가 다 쳐 먹어.”
“왜이래.”
우현은 성규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피식 웃었다. 하지만 성규는 그런 우현을 한 번 쳐다보고는 운동장으로 걸어가 버렸다. 우현은 그런 성규의 뒷통수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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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편ㄱ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