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을까
어디 아늑한 추억들이 안개 깔리듯 조용히 깔리고
말을 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사는 곳은 없을까.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해서 사는, 그리하여 괴로운 깨어
남이 없는 영원한 숙취의 세계는 없을까. 녹슬고 곪
고 상처받은 가슴들을 서로 따스하게 다독거려주는
그런 사랑의 세계는 없을까. 겨울 저편, 빛나는 햇살
한 올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비로소 사랑의 칼날에 아
름답게 살해되는 그런 안녕의 시계는 없을까 없을까
없을까.
살아 있다는 것
바람 불어 흔들리는 게 아니라
들꽃은 저 혼자 흔들린다.
누구 하나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지만
제자리를 지키려고 인간힘을 쓰다보니
다리가 후들거려서 떨리는 게다.
그래도…… 들꽃은 행복했다.
왠지 모르게 행복했다.
인사 없이
그대 진정 나를 사랑했거든
떠난다는 말 없이 떠나라.
잠깐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거니.
그래도 오지 않으면
조금 늦는가보다, 생각하고 있을테니.
그대 진정 나를 사랑했거든
떠난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떠나라.
밤새 내린 비
간밤에 비가 내렸나 봅니다.
내 온몸이 폭삭 젖은 걸 보니
그대여, 멀리서 으르렁대는 구름이 되지 말고
가까이서 나를 적시는 비가 되십시오.
아름다운 추락
저 나뭇잎 떨어지고야 말리라.
기어이 떨어지고야 말리라.
뒤에 올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리를 비켜주는 저 나뭇잎은
슬프지 않네. 남아 있는 이를 위해
미련 없이 자신의 한 몸 떨구는.
떨어지는 순간에도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저 나뭇잎의 아름다운 추락을 보면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만 매달려온
내가 부끄러웠다.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려온 나의 집착
억지만 부려 그대 마음 아프게 한
내가 부끄러웠다.
찔레에게
아무 기별하지 말자.
그리움만으로 한 세상 살아가면서도
저렇게 표독스런 꽃 피울 수 있는 것을.
비 내린다 찔레여, 비가 내린다.
난 무엇으로 네 삶 속에 스밀 수 있을까.
할 말이 없다.
내 너를 만나도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