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점심시간에 변백현 담당쌤을 찾았어. 백현이가 병원오려면 불편하니까, 내가 받아가려고. "쌤, 외과에 변백현이라고 레지.." "아이구, 그 꼴통?" "네, 처방해주시면 제가 챙겨갈까해서요. 제가 운전을 못해서 병원 오기가 조금 불편해요." "그래요, 그래요. 그럼 약물 주사하는 걸로 처방을..그게 제일 빠르니까요. 아이구, 어제 밤에 진통제 맞고 안맞았네." 처방을 확인하시던 백현이 담당쌤이 무릎을 탁치시고 머리를 짚으셔. 진통제? "아이구, 어쩌나..통증 심할텐데. 어제 입원환자로 분류해버려서 아침에 진통제 넣어놔버렸네. 병원에 있지도 않은 사람을..전화 안왔어요?" "네, 자고있는 줄 알았는데.." "잠, 못잘텐데 그래.." "통증 많이 심해요?" "그치, 어제도 아프다고 눈 부여잡고 실려온건데. 진통제 주사하는 걸로 처방했으니까 퇴근하면 달려가요. 남편 죽어가겠어요." 타자기로 탁탁 처방을 내려주신 쌤에게 작게 고개인사를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변백현한테 전화를 걸었어. "여보세요? 백현아?" -..응, 자기야. "눈 괜찮아? 많이 안아파?" -응, 괜찮아요. 벌써 목소리에 힘이 없고 내 질문에대한 대답만 짧게하는거 보니 지금 혼자 낑낑대고 있겠구나 짐작이 갔어. "안되겠다, 지금 갈게. 조금만 기다," -응, 아니야. 나 잘래요. 잘게. 일 끝나고 와. "아냐, 나 퇴근하려면 한참..잠시만 백현아," 왜 하필이면 이때, 주머니의 수신기가 요란하게 삐삐삐거리면서 울렸어. 내가 잠시만,하고 수신기를 꺼내드는 사이 백현이는 사태파악이 완료됐지. -나 쉬고 있을테니까, 일 잘하고 퇴근하고 봐. 백현이 말에 대답도 채 못했는데 전화는 끊기고, 나는 걱정할 새도 없이 바로 병동으로 달려가야했어. 일을 어떻게 한지도 모르겠고 머리속에 변백현밖에 없어서 이것저것 떨군 것도 여러번,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뛰어갔어. 이럴 줄 알았으면 면허라도 따 놓을걸. 계단을 빠르게 뛰어올라 번호키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섰는데 티비소리가 요란하게 나는거야. 뭐지, 싶어서 신발을 벗었는데 웬 못보던 신발이 하나가 더 있어. "어, 왔어?" 거실에서 빼꼼 얼굴을 내보이며 인사하는 사람은, 김종대야. "아아악!!" "뭐해, 미친놈아.." "이거, 이거 빼봐!!" "어우, 씨. 피 묻었어. 새거 없어?" 변백현 환자님은 안대를 벗어던지고 쇼파에 널부러져 티비를 시청하고 계셨어. 그리곤 순식간에 들이닥친 내 덕에 안대를 급하게 끼다 플라스틱 부분을 눈에 찔려버렸지. 온갖 엄살을 부리면서 김종대를 퍽퍽 치고 김종대는 그걸 또 아무렇지않게 빼서는 피묻었다고 궁시렁궁시렁.. 그 광경을 아무말 없이 지켜보고 있는 나를 그제야 본 건지, "으응..우리 자기 왔네.." 갑자기 아픈 척하면서 드러눕는 변백현을 한심하게 쳐다봤더니 김종대는 내 표정을 한번 확인하곤 채널을 무심하게 넘겨. "변백현이 아프다고 난리쳐서 왔어." "처방은 누가하고?" "지가 하던데. 내가 너네 병원가서 약받아왔어." "그래서 지금은 좀 괜찮고?" "보다시피." 그제야 나는 한숨을 폭 내쉬고 이것저것 챙겨온 봉투를 쇼파 옆에 내려놨어. 아니, 그렇다고 아픈 애를.. "괜찮아?" "멀쩡하게 티비 보잖.." "야, 김종대. 괜찮아? 저게 괜찮아? 변백현, 너도 내가..!!!" 끓어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참는 내 목소리에 둘이 동시에 내 쪽을 향했어. 변백현은 안대쓰고있는 주제에 발딱 일어나서 사태파악을 하고 있어. "너는, 변백현이, 티비를 보는데?! 어?! 그걸 냅둬?!!" "아, 씨!! 왜 날 때려!!" "변백현!! 너도!! 너 내가 이랬으면, 어? 정색할거면서!!!" "아, 자기야!! 나 환자!!" 속터지는 새끼들아!!! 나이 먹어도 변하는 게 없어!!! 니네가 애야?! 변백현 너는, 새끼야!! 의사라는 게!! 김종대!!넌!! 변백현은 환자 아니야??!! 난리를 치며 등짝을 퍽퍽 후려치는 손길에 변백현은 몸을 웅크렸고 김종대는 내 손을 쳐내기 바빴어. 실컷 때리고 나서야 조금 속이 풀리는 것 같아서 외투를 집어던지고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어. 속상해. "아아, 자기야.." 그렇게 성을 내고 들어간 나를 쫓아 변백현이 벽을 더듬더듬 짚으며 방으로 들어오려했어. "...앞에, 문지방." 이러면 안되는데, 한번 화낼 때는 작정하고 내야되는데. 또 문지방 걸려 넘어질까 싶어 나지막히 얘기를 해주니 변백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어. 그렇게 무사히 내 침대 맡까지 온 변백현은 다시 손을 더듬거려 내 얼굴을 찾아냈어. 습관처럼 내 머리를 쓸어넘기며 입을 떼. "하루 종일 앞을 못 봤더니 답답해서. 그래서, 잠깐 뺐어. 미안해. 잘못했어." "..." "나을 때까지 절대 안뺄게. 눈도 꼭 감고, 약도 잘 챙겨먹을게." "..." "말 좀 해줘, 목소리 듣고싶어." 속상해, 속상해. 속상해. 변백현 미워 죽겠어. 나만 보이는 백현이 얼굴을 쳐다보면서 안대를 살짝 잡아 올렸어. 아까 살짝 봤을 때도 빨간 것 같았단 말이야. 역시나, 변백현이 꼭 감고 있는 눈두덩이는 살짝 부어올라있었어. "눈 떠봐." "어..그게," "얼른." 내 독촉에 못이겨 눈을 뜬 백현이눈은 뭐, 예상했던 대로였지. 눈 충혈된 건 하나도 호전되지 않았고 흰자위는 보이지도 않아.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내 눈치를 보는 눈동자는 구분하기도 힘들정도야. "..나을 때까지 말걸지마." 피곤한데 왜 변백현까지 신경쓰이게 하고 난리인지..홱 돌아누워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어. 아, 자기야아.. 자기야. 나 좀 봐? 응? 보채는 변백현을 뒤로하고 감은 눈에 힘을 주며 잠들려 노력했어. "야, 너한테 혼난다고 저녁까지는 안대 쓰고 있었어. 봐줘, 좀." "..김종대, 너도 꺼져. 둘 다 똑같아." "안 그래도 꺼지려고 했습니다아-. 간다. 화해하고." "..잘가. 그리구..고마워." 망할. 나쁜 김종대. 그래도 고마운건 고마운거니까. 찌질하게 웅얼거리듯 고맙다고 하는 내 목소리에 변백현이랑 김종대가 동시에 푸훕하고 웃었어. 이 새끼들이 진짜. "자기야, 김종대 나갔는데." "..." "..우리, 뽀뽀나 한버언.." 이게 진짜 뒤지..훔파 훔파.. 심호흡을 하고, 변백현은 환자다 생각하며 애써 무시했어. 그랬더니 슬금슬금 내 옆자리에 누워서는 내 목덜미에 여기저기 입을 맞추기 시작해. 미동도 하지 않으려했는데, 간지러운 느낌에 움찔거렸더니 다시 또 칭얼칭얼. "나 근데.. 눈 아파. 호 해주세요." 호는 무슨 얼어죽을. "아, 진짜 아프다! 아아아..백현이 죽는다.." 온 세상 귀여운 척은 혼자 다해요. 이럴 때 보면 누가 남자고 여잔지.. "..한번만 봐줘. 제발.." "나 피곤해. 자자.." 정말이야. 진짜 피곤했단말이야. 내 한마디에 변백현은 입을 꼭 다물고 내 어깨를 돌려서 자기 쪽을 보게했어. 정말로 몸이 축 늘어져서 다시 뻐튕길 기력도 없었어. 내가 눈을 감고있어서 지금 백현이 표정이 어떤지는 볼 수 없었지만 아마도 나를 내려다보고 있겠지. 그리곤 살짝 자기 몸을 당기더니 습관처럼 어깨를 끌어안고 제 품에 쏙 넣어. 이제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겠지. "피곤했구나. 그럼 코 자자." 내가 변백현한테서 못 헤어나오는 이유 중 하나야. 외과의사는 타이밍이라더니, 타이밍 하나는 기가막히게 잘 맞추는 변백현 성격이 항상 날 편하게 만들었으니. 장난을 치더라도 지켜야 할 선을 알고있었고, 때에 따라 내 컨디션까지 캐치했으며 거기에 따른 배려까지 완벽했지. 완벽해, 진짜.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이건 뭐..변백현은..작까가 가져가는 걸로... ㅡ 이렇게 해피하게 끝날거라 생각하신다면.....경기도 오산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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