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서 얼마나 엎드려 잤을까,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부스스하게 잠에서 깼어. 엎드려잤더니 허리가 아파 허리를 두드리는데 백현이가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 식탁위에 뚜껑덮인 고등어조림을 보고 미안한 표정을 짓는거야. "어, 왜이렇게 늦었어..내일은 몇시 출," "미안, 저녁 하지말라고 전화하려 했는데.." "뭘..일하다 늦은건데. 자자, 나 졸려." 백현이가 그럴까? 하고 내 볼을 스윽 쓸어만져. 차가운 손에 움찔했더니 다시 손을 자기 바지부근데 슥슥 문질러. 자자..내가 화장도 안지우고 침대로 쏙 들어갔어. 그제야 백현이는 외투를 벗고 안경을 벗어 탁자위에 올려뒀어. 잠이 방금 깨서 그런지 나는 금방 잠에 골아떨어졌지. 아침에 알람소리에 일어났더니 백현이는 옆에 없었어. 벌써 출근했나, 나도 서둘러 출근준비를 해서 집을 나섰지. 밥도 못먹고 설거지는 하고 나가야할 것 같아서 주방으로 갔는데 싱크대가 깨끗한거야. 거기다가, 어제 한 고등어조림은 깨끗하게 없어져있어. 백현이가 먹었나..3마리나 했는데 그걸 다 먹었나? 고개를 갸웃하곤 종종걸음으로 걸어서 병원으로 갔어. 날이 점점 추워져서 백현이 겨울 옷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어.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인데. 병원에 도착해서 스테이션에 들렀더니 백현이가 구석탱이에 찌그러져서 볼펜을 쥐고 있는거야. 언제 나갔냐고 물어보려고 옆에 가서 어깨를 톡톡 두드렸어. "몇 시에 나갔어?" "...." "야, 백현아." "....." "자?" 진짜 자네. 볼펜을 꼭 쥐고 목도 꼿꼿하게 세운 채로 눈을 감고 있는 변백현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어. 많이 피곤했나보네, 손에 쥐고 있는 볼펜을 빼서 내려놓고 안경도 벗겨서 주머니에 넣어줬어. 안경을 얼마나 오래 쓰고 있었는지 안경 자국이 선명했어. 그렇게 내가 본 백현이 모습은 그게 마지막이었고 그 뒤로 병동에서 코빼기도 볼 수 없었어. 나도 오늘은 조금 바빠서 백현이 생각할 새도 없이 일을 하다보니 퇴근 시간이 다가왔지. 오늘도 백현이가 받을까싶어 내심 기대를 하며 수화기를 들었지만 딱딱한 의사쌤의 목소리만 들렸어. 그렇게 잔뜩 긴장한 채 수화기를 내려놓고 산더미같은 차트를 한 쪽 구석에 쌓아놓은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어. "오늘은 백현쌤이랑 안가나?" "네? 네, 일 늦어지는 것같아서 먼저 가려구요, 수고하세요-." "그래, 쉬어요~" 씁쓸한 대답을 하고, 옷깃을 여미면서 집으로 가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는거야. 아, 주머니에서 손빼기 싫은데. 휴대폰을 확인했더니 김종대야. 진짜 오랜만에 연락하네. "어, 왜?" -..어디야? "나 이제 퇴근하..너 목소리 왜그래? 아파?" -그럼..우리 집 좀, 와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아닌 축 쳐진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전화를 끊고 무작정 택시를 잡아탔어. 김종대 아픈 건 처음보는데. 놀라서 어디가 아픈 건지도 모르고 손톱만 물어뜯으면서 김종대 집으로 향했어. 얘도 혼자 살아서 챙겨줄 사람 없을텐데. 택시에서 급하게 내려 뛰다시피 계단을 올라가서 김종대 집 문을 퍽퍽 두드렸어. 기척이 없길래 그냥 번호키를 열어서 눌렀지. 얘 집 비밀번호 자기 생일이거든. "김종대?" "으아아..나 아퍼어.." "왜, 왜 어디가 아픈데? 응?" "몰라아..." 김종대는 침대에 축 늘어져서 아프다고 징징거렸어. 얼굴이 빨갛길래 이마를 짚었더니 뜨끈뜨끈하고, 감기몸살인가 싶었어. 난 맹장이라도 터진 줄 알았잖아. 침대에서 이불을 감싸매고 낑낑거리는 김종대를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을 하다가 일단 물수건으로 열부터 내려줬어. "차가차가, 차가워.." "그럼 차갑지 뜨거워? 좀 기다려. 백현이 퇴근하려면 두시간 남았어." "변백혀언..얼른 오라해..나 죽어.." 어이구, 애도 아니고. 차갑다면서 이불 속으로 자꾸만 숨는 김종대를 바락바락 끄집어서 밖으로 꺼내 열을 내리느라 진땀을 뺐지. 백현이 퇴근하려면, 한참 남았는데..응급실 갈 정도는 아니고 이따 백현이보고 주사나 한대 놔달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눈 앞에서 낑낑거리는 김종대를 보니 마음이 불편했어. "내가 공부 좀 더해서 의대갈 걸 그랬다, 야. 그치?" "어..근데 넌 졸업 못했을거야.." "이게 진짜," "변백혀어언.." "내가 병원갔다 올까? 변백현 늦을 것 같은데." "아 싫어어.." 전화를 해도 백현이는 받지를 않고, 김종대는 자기 혼자 두고 가지 말라며 징징대고. 꼼짝없이 옆에 붙어서 변백현 번호만 눌러댔지. 열이 잘 안떨어져서 고생하는데.. 끈질긴 전화 끝에 드디어 변백현이 전화를 받았고 나는 수화기 너머의 백현이 상황이 어떤지도 모른 채 다급하게 말을 이어나갔어. "백현아, 변백현! 김종대 아파, 퇴근 언제해?" -김종대? 병원을 가야지, 그럼. "안 간대. 퇴근하고 해열제라도 좀 챙겨서 오면 안돼? 열이 안떨어져. 약국도 안 열었구.." -..나 퇴근 언제할지 몰라. 그 때까지 어쩌려고. 많이 아파? 몸살이야? "그런가봐. 일단 열 내리고 있을게, 끝나는 대로 와줘. 알았지?" 백현이 목소리가 유난히 피곤해보이긴 했는데, 거기에 신경 쓸 겨를 없이 전화를 끊고 김종대 머리 위에 올려뒀던 수건을 다시 찬물에 빨아서 올렸어. 그러다가 침대 옆에 얁아서 꾸벅꾸벅 졸았지. 퇴근하고 바로왔더니 진짜 피곤해.. "열은..내렸네." 내 옆으로 훅 끼쳐오는 한기에 찌뿌둥하게 몸을 일으켰어. 백현이가 지금 막 온건지 체온계로 김종대 열을 재보곤 굽혔던 허리를 펴. 그리곤 내 머리를 슥슥, "잘했어. 예뻐." "...열 안나?" "거의 다 내렸는데, 밤에 오를지도 모르니까.. 일단 해열제 줘야겠다." 백현이가 가방에 체온계를 넣고 주섬주섬 뭘 꺼내. 그제야 백현이 눈을 처다봤는데, 안경 너머로 두 눈이 빨갛다 못해 흰 부분이 아예 보이지 않는거야. 깜짝 놀라서 안경을 벗겼더니 백현이가 두 눈을 꼭 감아. "눈 또 왜 그래? 밤 샜어?" "아니이.." "눈이 이게 뭐야..안 아파?" "아프진 않아. 오늘 좀 자면 괜찮을거야." 그러면서 피곤한 듯 눈을 벅벅 문지르길래 얼른 두 손을 잡아내렸어. 눈 더 빨개질라, 예쁜 백현이 눈. "피곤해 죽겠어..." "병원이 잘못했네!" "백현이 죽겠다아.." 그러면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내 앞으로 얼굴을 주욱 들이미는데, 어..여기는 우리집도 아니고.. "백현이, 피곤해서 죽겠다.." "..뭐, 뭐.." "이러다 죽으면 어떡하지.." "뭐..어떡,하라고..여기 김종대네 집.." "얼른. 빨리, 응?" 아, 안되는데. 안되는 걸 알면서도 나는 백현이의 요구대로 백현이 눈에 쪽쪽 입을 맞췄고 변백현은 주체할 수 없는 입꼬리를 억지로 잡아 내리느라 애썼어. 그래, 너도 양심이 있는데 여기서 대놓고 좋아할 수는 없겠지. 양쪽 눈에 입 맞춰주고 마지막으로 입술에 쪽하고 소리나게 입술을 갖다대었다가 떨어지는데 변백현이 다시 내 뒷통수를 슬쩍 잡더니 계속 입을 맞대는거야. 내가 미쳤냐면서 얼굴을 뒤로 빼려고해도 슬금슬금 웃기만 하고 손에서 힘을 풀지를 않아. "야, 김종대 깨면 어떡.." "안 깨, 뽀뽀 한 번 하자." "그래도.." "나 죽어어.." 그래, 죽으면 안되니까..그런거니까..백현이 요구대로 막 입을 맞추려고 하는데, "..후, 이 새끼들이 진짜.." 김종대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나는 변백현을 홱 밀쳐버렸고 변백현은 아쉽다는 듯이 김종대를 노려봤어. "어, 어. 괜찮아? 머리는? 배는 안아프고? 어지럽고 그러진 않지? 열은 내렸는데! 백현이가 주사 놔준대!!" "뭔 주사야, 됐어. 너네 둘 다 나가. 나 슬퍼졌어." "어,어..그게 아니라.." 김종대는 토라졌다면서 등을 홱 돌리고 눕더니 머리를 쥐어잡았고 거기에 또 놀란 내가 머리 아프냐고 김종대 이마를 짚었더니 변백현이 내 뒷덜미를 잡고 침대에서 떨어뜨려버렸어. "어디 외간남자 침대에 막 올라가, 나와봐." "그러니까 내가 하지 말자고..!" "김종대, 돌아누워봐. 이러고 자면 머리 더 아파." 징징댈 힘도 없는지 입술만 삐죽이면서 팔만 쏙 내민 김종대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상태였어. 귀여운 자식, 얼른 좋은 여자 만나야 할텐데. 변백현이 익숙하게 바늘 캡을 뜯어서 김종대 팔을 톡톡 쳤어. 그리고 나한테 수액팩을 내밀길래 습관적으로 바늘이랑 호스랑 연결을, 해야되는데..어, "뭘 그렇게 또 봐, 세트 연결 좀 해줘." "어, 어.." "김종대 혈관 왜이렇게 숨었지, 거기 옆에 안경 좀.." 아, 변백현 진짜 섹시하다. 변백현이 내 손에 쥐어주고 연결하라고 했던 세트도 그대로 쥐고. 백현이가 안경 달라고 손 내미는 것도 그저 쳐다보고 있었어. 얼마만에 보는 백현이 손에 들린 바늘인지..인턴 때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많이 하니까 백현이도 수액 찌르는 일 많이 했었고 응급실이니까 더더욱 많이 했었는데 병동으로 올라오고 레지던트 되면서 바늘을 손에 쥐는 일이 거의 없었거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습이 집중하는 백현이었는데 이걸 못봤으니 섭하지. "또 넋이 나갔어, 앞으로 매일 바늘 들어야될까봐." 결국 백현이가 손을 뻗어서 안경을 집어와 쓰고는 내 볼을 톡톡 치면서 말했어. 매일 바늘 들어야 될까봐..매일 바늘 들면 정말 좋겠다. 안경까지 쓰고 다시 집중한 백현이는 단번에 바늘을 찔러넣었고 익숙하게 수액세트를 만졌어. 김종대는 추운지 다시 이불 속으로 꿈틀거리며 들어가 너네 둘 다 나가아,하고 있고. 나는 소독솜 정리하는 변백현 모습을 또 넋이 나간 채 쳐다봤어. 나는 왜 피곤한 백현이의 얼굴에서 섹시함을 느끼는 걸까, 내가 쓰레기인건가.. "아주 푹 빠지셨어요, 깨소금 냄새 폴폴 나네요." "부러우면 너도 얼른 장가가. 노총각으로 썩지말고." "아, 네-, 네에-, 얼른 가겠습니다아-." "이불 하나 더 있어?" "남의 침구류 사정은 왜 물으시는지요?" "왜 묻겠냐, 자고 가려고 그러지. 없으면 너랑 껴안고 자고." 변백현의 무덤덤한 말에 김종대는 갑자기 두 눈썹을 축 늘어뜨렸어. 백현이가 다시 코트를 집어입으며 내 손을 잡아 이끌었어. "너는 집가서 씻고 자, 가자." 그러면서 주머니에 차키를 확인한 후 내 손을 잡아 이끄는데, 가기 싫어... "나 왜.." "왜긴 뭐가 왜야, 내일 출근 해야지." "너는 여기서 잘거잖아.." "그래서 너도 여기서 잔다고?" 응..차츰 얼굴을 찌푸리는 변백현의 눈치를 슬쩍보며 다시금 시선을 내리고 붙들린 손목만 쳐다봤어. 변백현은 잠시 아무말이 없더니 다시 힘을 주어서 내 손을 끌어당기는거야. 아, 진짜 가기싫은데. "일주일 째 잖아.." "뭐가, 또. 여기서 자면 더 일찍 일어나야 되잖아, 너." "너 집에 늦게 들어오는 거, 일주일 째 그랬잖아.." 그래서 항상 기다리다가 난 지쳐서 잠들고 너는 나 깰까봐 조심조심 들어와서 자고, 나 일어나기도 전에 출근해버리고. 나는 병원에서 밖에 너 못봤잖아.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하는 말들을 눈물만 글썽이면서 속으로 되새기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눈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어. "지랄들을 하세요..아주.." 김종대는 완전히 우리를 등지고 누워서 머리를 벅벅 긁어대고 나는 김종대 수액줄이 꼬이는 걸 보고 그걸 푼다고 또 침대맡으로 다가갔지. "..이거 다, 꼬여..좀 가만히 있어.." "야, 변백현. 그냥 여기서 재워. 뭘 또 울리면서까지 집으로 보내냐." "흐응..김종대.." "이불 하나 더 있으니까 둘이 꼬옥 껴안고 자세요, 네?" 그제야 변백현이 내 손을 잡아서 일으키고 눈물을 닦아줬어. 나는 변백현이 그래도 집에 가라고 할까봐 노심초사하면서 일부러 눈 안마주치고 백현이 발끝만 쳐다봤어. "안 갈래..응?" "못살겠다, 진짜." "이불.. 깔까?" 내 말에 앉아있으라며 장롱에서 이불을 꺼낸 백현이가 침대 옆에 이불을 깔았어. 베개도 두개 놔주고, 누우라며 이불을 탁탁 쳤지. 얌전히 이불 속에 들어간 내가 백현이 발목을 붙잡았더니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쳐다봐. "너도, 누워.." "수액 조절 좀 하고 올게. 조금만," 변백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손에 힘을 푼 순간 한숨 속의 김종대 목소리가 들렸어. "아이고오-, 거 참 자알 들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조절했으니 걱정 붙드시고 잠이나 쳐 주무세요?" 헤헤..내가 멋쩍게 웃으면서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더니 백현이도 웃으면서 이불 속으로 쏙 들어와. 두팔을 벌리는 모습에 꿈틀거리면서 품안으로 기어들어갔더니 등을 토닥,토닥. "내일 꼭 안과 가." "응." "밥도 챙겨먹구." "응." "일 많이 시키면 힘든 티도 내구." "응." "뽀뽀오." "응." 여러번 하라곤 안했는데, 한번만 하라고 한건데..입술에 부지런히 닿는 백현이를 느끼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어. 한 쪽 귀로는 짜증을 내는 김종대 목소리가, 한 쪽 귀로는 잘자라고 속삭이는 백현이 목소리가. 생소한 조합이야.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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