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녀에게 보내려던 편지엔 알고 있는 것 모두를 썼다. 처음엔 믿지 않으려고 했다. 한참 예전부터,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맹세하던 그였으므로 믿을 수 없었다는 게 더 맞았다. 찬우는 그녀의 오랜 호위무사가 조선의 태양을 저물게 한 무리에 섞여있다는 걸 알게 됐다. 세자빈에게 곧장 그 내용을 써 전갈을 보냈지만 하필이면 그것은 그녀에게로 닿지 못한 채 불 속에서 재가 되었다. 그 재는 영원토록 찬우의 가슴에서 파묻히고 매장 당하게 됐다. 그 전갈이 온전히 도착할 수만 있었더라면, 조금은 다른 결말을 맞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찬우는 내내 곱씹었다. 그리고 그 곱씹음은 어느 틈엔가 칼이 되어서 찬우의 목을 짓누르고 있었다.
자신을 쳐다보지 않으려는 그녀를 받아들이는 게 슬퍼서 찬우는 그 뒷모습을 포기했다. 잡고 싶은 그녀는 점점 멀어지고, 정작 곁에는 윤이 남아 무어라고 중얼대고 있었다.
속으로 모란을 생각했다. 몇 겹의 꽃잎을 떠올리며 그것들을 떼어낼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꽃잎은 아주 천천히 바닥으로 낙하했다. 좋아하지 않는다. 한 겹. 좋아한다. 한 겹. 좋아하지 않는다. 또 한 겹. 좋아한다. 한 겹. ……좋아했다. 한 겹. 찬우는 들끓는 감정을 애써서 지운 뒤에 남은 꽃잎들 모두를 털어냈다. 오랜 시간을 속으로 감춰두고만 있던 꽃들은 시든 향을 풍기면서 그렇게 짓밟혔다.
"…어제, 아버지께 여쭸습니다."
"무엇을요?"
"…정녕……. 그런 막된 짓을 하신 게 맞는지."
찬우는 옆에 있는 윤을 바라보지 않으며 말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처절하게 얼굴을 감쌌다. 그는 자신의 손 안에서 입을 움직였다.
"몇 번을 죽어도 용서 받지 못할 일을 하신 줄, 이제 알았습니다."
"……."
"나는 이제 그녀를……. 세자빈을 볼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걸 자백하고 죽기라도 하실 겁니까?"
윤이 생각 없이 쏘아붙이자 그는 문득 숨을 한 번 삼켜내었다. 숨을 쉬는 게 아팠다. 이제 더는 그녀를 위해 숨 쉴 수 없을 것 같아서 아팠다.
"예, 죽을 겁니다."
"…도련님!"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겁니다."
"……."
"그대에게 더 이상 이용 당해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담담하게 흐르던 그의 목소리가 끝났다. 윤은 앞으로 그를 사용해 세자빈에게 상처 줄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후덥지근해지는 걸 느꼈다. 찬우는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윤이 그 팔뚝을 붙잡았다. 가지 말라는 신호였다. 찬우는 가뿐하게 그 손을 떨쳤다. 윤은 속으로 그의 덜떨어짐을 욕하고 있었다. 자신의 말만 듣는다면 앞으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 굳이 사실을 말하고 벌을 받으려는 그가 우스웠다. 우스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찬우는 느리게 윤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부드러운 피부를 느끼는 것 없이 바라보고만 있다가 이내 짧게 입술을 맞대었다. 혀가 섞이지 않고, 입술을 느끼지 않은 그 입 맞춤은 윤이 그의 가슴팍을 밀쳐내서 금방 종결됐다. 찬우는 사랑하지 않는 여인의 입술을 탐한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소매로 입술 끝을 닦아냈다.
"죄인의 피를 가진 자의 입 맞춤을 받으셨습니다. 제가 가진 죄를 그대도 방금 넘겨받으신 겁니다."
"……."
"…잘 됐습니다. 우리 사이에 혼담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변에게 알린 것이 참 다행입니다."
"……."
"내가 죽으리라고 고백할 때……."
"……."
"제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대를 옥에 가두라고 말할 겁니다."
막대한 죄를 지은 자의 모든 식구는 말살당한다. 가벼운 연줄이 있는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그것은 이제 윤에게도 포함 가능한 것이 되었다. 죄를 가진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것 자체가 죄악이었다. 거짓으로 포장한 것이어도 그건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였다. 윤은 분해서 그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찬우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설마 죽겠다고 말할 줄은 몰랐었다. 찬우는 그런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자백을 하러 걸음을 틀었다.
"…혹시나 세자빈을 만나게 되시면 사과하셔야 합니다."
귀한 얼굴에 상처를 내어 죄송하다고. 찬우는 중얼거린 뒤에 죽기 위해 움직였다.
의금부로 향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그녀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러지 못해서 조금 아쉬웠다. 지금 보고 있는 하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란 생각에 찬우는 미련을 가지지 말자고 다짐했다. 사실 죽는다는 건 괜찮았다. 목이 잘리어도 좋았다. 숨 쉬지 못할 고통이 찾아와도 상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으로부터 느끼게 될 어떤 배신감들이 그는 안타까워서 눈을 감기가 두려워졌다. 그녀에게 변명을 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변명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걸 버리지 않으리라고 굳게 약속했다. 변명을 하는 것 대신에 묻고 싶었다.
우리가 함께 뛰놀던 그 동산을 기억하는지. 시집 오겠다며 새끼 손가락을 걸어오던 그 날을 기억하는지. 나처럼 이렇게 너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는지. 앞으로도 나를 기억할 건지. 내가 너를. 이 하찮고 어설픈 마음이 너를 얼마나,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너는 알고 있었는지.
죽어서라도 묻고 싶었다. 입술을 씹다가 그는 마지막으로 고른 숨을 내쉬었다. 몸 속 안의 모든 것들이 으깨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한 사랑을 점치던 꽃잎이 으깨진 것들 위에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앞으로는 그 위로 물 줄 수 없다. 줄기가 자라나고, 잎을 틔워서 마침내 꽃잎을 산들거리게 하도록 물을 줄 수가 없었다. 모란은, 다시 만개하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윤형은 성급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만나서, 진상을 알아야만 한다. 세자빈에게 오해 받은 것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알게 된 것 모두가 사실이 맞는지 물어야 했다. 그는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고 함부로 궁 밖을 나서고 있었다. 윤형은 자신이 예감하고 있는 어떤 것이 현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었지만, 염원은 자꾸만 희박해졌다.
궁으로 온 뒤 단 한 번도 찾아온 적 없는 혜민서는 낯설게만 보였다. 윤형은 굳은 표정으로 그 안을 들어갔다. 쓴 약재의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두 눈은 오로지 하나뿐인 혈육을 찾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 뒷모습을 발견한 그는 성큼성큼 다리를 움직였다. 말을 붙이지도 않았는데 아버지는 작게 몸을 떨고 있었다. 윤형은 잠시 입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알게 될 사실들이 두렵다. 아직 찾아온 건 아무 것도 없는데 벌써부터 죽고 싶은 충동이 적나라하게 몰려오고 있었다.
"아버지."
"……."
"…내의원의 의원들 사이에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아들아."
"……."
"…미안하구나."
암묵적으로 모든 걸 인정한 그는 자식에게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 둘 말고는 모두가 생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가 바쁘게, 누군가를 치료하기 위해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오로지 그 둘의 시간만 멈춰진 것처럼 더디게 흐르고 있었다. 그 둘만 죽은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도 말이 없었다.
"그 애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 줄 알게 되어 거절할 수가 없었다."
"…모든 걸 알게 되어 죽고만 싶은 제가 불쌍하진 않으십니까?"
"……."
"아버지, 해선 안 될 것을 하신 겁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그가 얼마나 불쌍하고 고달픈 존재인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알 필요가 없었다. 윤형은 착잡한 심정을 그대로 숨겨내지 못하고 뼈 저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화가 나고 슬프고 죽고 싶고 억울하고 보고 싶었다. 질서 없게 겹쳐진 여러 감정들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그 애한테서 꼭 너를 보는 것 같았다. 너를 보는 기분이었다."
"……."
"너한테는 내가 있지만 그 애한텐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
"어미가 없어도 꿋꿋한 너와 어미가 없어서 꿋꿋한 그 애가…."
"아버지."
"……."
"…죄에 대한 벌을 받기 전에 묻겠습니다."
"……무엇이냐."
"제가 모르는 것이 남았습니까?"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눈이 언뜻 슬픈 감정에 젖어 있었다. 끝났다. 끝내고 싶지 않았지만 끝을 맞게 되었다. 끝을 향하고 있는 건 자신뿐만이 아닌 모든 것이었다. 천천히 입을 열리는 걸 바라보면서 윤형은 깨질 것 같은 두 눈으로 무언가를 응시했다.
목숨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를 도와 잔인한 짓을 할 궁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목숨을 잃게 될 것이었다. 앞으로 얼만큼 더 숨을 쉴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윤형은 그녀의 목소리를 아직 잊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화를 담고 있던 것이어도 그녀가 가진 음성이라서 다행이었다. 감춰진 것들을 털어내는 아버지의 눈이 쓰라려 보였다. 윤형은 처음 그녀를 만났던 날을 무심코 떠올려냈다. 그 때는 이토록 가슴 저미게 사랑하게 될 줄 몰랐었다. 그녀에게 미안해서 삶을 버리게 될 줄, 조금도 가늠하지 못했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첫 눈에 그걸 알았더라면 분명 사랑하는 게 두려워 이런 행복한 아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저주한다. 저주하고 또 저주한다. 저주할 수 없을 때까지, 저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저주한다. 사랑니는 그녀 생각을 방울로 모아 만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밤마다 욱신거릴 필요가 없어졌다. 윤형은 그녀가 살아있음이 문득 눈물겨웠다. 그녀를 살게 하는 건, 솜씨 좋은 의술이 아닌 아침이 되면 떠오르는 조선의 태양이었다. 그걸 산맥에 묶어둘 용기가 없었다. 많은 목숨이 거쳐간 그의 손이 어느 태양 아래에서 그렇게 침윤되고 있었다.
숨이 턱 바로 끝까지 차올라서 더 이상 달리기를 할 수 없었다. 잠시 다리를 멈춘 그가 달려온 길 위에 피로 모든 흔적을 남긴 것을 확인하고 짧은 숨을 토해냈다. 지원은 칼에 찔려서 무감각해진 팔을 쓰다듬다가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지는 것을 진정시킨 뒤에 비틀거리면서 걸음을 떼었다. 지나치게 많은 피를 쏟은 탓에 숨이 점점 거칠어지고 눈 앞은 흐려졌다. 지원은 눈에 힘을 주며 애쓰고 있었다. 언젠가 세자빈과 온 적이 있는 강 위에 놓여진 다리 위로 무성한 몸집들이 보였다.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감정을 어쩌지도 못한 채 지원은 조금씩 그 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밤이 되어 캄캄해진 그 곳엔 어떤 무엇보다 캄캄해 보이는 그들이 있었다. 지원은 잔뜩 떨리는 손으로 피가 흐르는 팔을 누르고 있다가 이내 호흡을 조금 가다듬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모두 같은 목적을 가지고 모여든 주비의 일원들이었다. 소년은 날 것을 마주한 것만 같은 표정으로 지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 시선을 밀어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오로지 향단이었다. 소년에게 팔을 잡힌 채 목 위로 그려지는 칼날을 덜덜 떨며 바라보고 있는 그녀.
"지원아."
"……놓아주시면 안 됩니까."
"이런 귀여운 짓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더냐, 네가."
묘목은 친근하게 그를 부르면서 낮게 웃었다. 그 소리가 기괴해서 울고 있는 건지 웃고 있는 건지 지원은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지원은 다리를 건너서 성큼성큼 그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슬픔을 흘리고 있는 향단의 눈이 지원을 향하고 있었다. 맡게 하고 싶지 않았던 비린내가 사방으로 풍기고 있었다. 지원은 피가 흐르고 있는 팔을 잠시 흔들었다.
"놓아주시면 안 됩니까."
"그럼 세자빈을 데리고 오거라."
"……."
"…바보 같은 놈, 정에 휩쓸려서 이런 어린 짓이나 하다니."
"…놓아주세요. 대장. 아무 것도 모르는 계집입니다."
"실망이구나."
더 이상 말이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지원은 눈으로 주비의 수를 셌다. 대충 헤아려도 열 여섯은 족히 넘었다. 다친 팔로는 그들에게서 향단을 뺏어올 수도, 섣불리 묘목에게 덤벼들 수도 없었다. 눈 앞이 잠시 암전됐다. 모두 제 잘못이었다. 누구라도 상상 가능한 비극이 지원한테도 천천히 실감되고 있었다.
"제가 대신 죽겠으니 저 계집을, 놓아주세요."
"죽이라고 보낸 것이 아니었느냐?"
"……."
"대답하거라."
단 하나의 눈이 날카롭게 지원을 버티고 섰다. 그 눈빛에 말을 잃어버린 지원은 어떤 것도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었다. 그녀를 살리고 싶다. 누구라도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뤄질 수 없는 그의 소원은 점점 처절해졌다. 그는 이내 무릎 꿇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애원할 생각이었다. 그 모습을 묘목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검은색 두건을 쓰고 있는 모두가 배신감에 뒤덮인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향단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묘목의 눈짓에 소년이 칼을 쥐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향단이 질끈 눈을 감았다. 두려움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지원은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지원아."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계집을 놓아주시면 백 번이라도 죽겠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건 네 하찮은 목숨 따위가 아니다."
"……."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 말에 지원의 얼굴이 울 것처럼 찌그러졌다. 지금 향단을 구할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묘목은 그가 원하는 것처럼 순순히 그 바램을 이뤄주지 않을 것이었다. 지원은 더운 바람이 부는 대교 위에서 한참 움직임이 없었다.
"준회는 대장을 따라가지 않을 겁니다."
"그래, 다들 죽고 싶은 것이로구나. 화상 자국을 따라 입을 찢어버릴 것이다."
"…제 평생의 후회를 단 하나 꼽을 수 있다면, 준회에게 대장의 존재를 알게 한 것입니다."
묘목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은 그 행동을 천천히 주시하고 있었다. 영영 쓰지 못할 팔은 이제 아프지도 않았다.
"놓아주거라."
묘목이 소년에게 지시했다. 소년은 순순히 힘을 주고 있던 팔을 내리고 향단을 품에서 벗어나게 했다. 향단은 비틀거리면서 어렵게 어렵게 걸음을 움직였다. 물론 지원에게로 향하고 있는 걸음이었다. 그녀는 예쁜 비단을 걸치고, 어디도 상하지 않은 모습으로 천천히 지원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단 몇 걸음만 움직이면 지원한테로 갈 수 있었다. 지원은 그런 그녀를 보며 안도했고 서서히 무릎을 폈다.
피가 묻은 팔을 뻗어서 그녀를 안으려고 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늦었다. 소년에게서 칼을 빼앗아 그대로 향단의 뒤를 찌른 묘목이 다리 밖으로 피로 흥건한 칼을 내던졌다. 얼떨결에 칼을 빼앗긴 소년이 커다랗게 눈을 떴다. 묘목의 행동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는지 모두가 두건 위로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지원은 눈 앞에서 쓰러지는 향단을 바라보다가 이게 현실인 줄을 구분하지 못하고 잠시 눈을 깜빡이며 서 있었다.
현실로, 믿을 수가 없었다. 꿈의 한 조각이더라도 믿지 못할 것 같았다. 지원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으로 떨어진 향단을 흔들었다. 팔뚝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는 피가 향단이 입고 있는 비단 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확실하지 않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였다. 아직 미약하게 숨이 붙어있는 뺨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곧 끊어질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감길 것처럼 느린 눈동자의 움직임이 지원을 바라보았다. 지원은 그녀에게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슬프게 웃고 있는 눈은 숨이 멎을 것처럼 아름다웠다.
"향단아, 향단아."
"……."
"…눈을, 좀……."
처참한 얼굴로 애타게 부탁하고 있는 그에게 향단은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귀를 가까이 가져갔지만 곧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묘목 때문에 지원은 어떤 것도 들을 수 없었다. 바로 눈 앞에서, 향단의 숨이 끊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죽음을 느끼면서 지원은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벌이다. 우릴 배신한."
"…아, 아아……."
"가자, 지원아. 너에겐 아직 태양을 저물게 하는 일이 남아있지 않느냐."
"……."
"당장 말을 타고 떠나야 그 일이 가능해진다."
그녀의 등을 받치고 있는 곳에서 차차 체온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원은 처음으로 그녀가 눈을 뜨고 웃는 모습이 그리워졌다. 묘목이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는 지원을 지나쳐 대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를 따라서, 검은 두건의 사내들이 일제히 걸음을 움직였다. 가장 느리게 걸음을 떼고 있는 것은 소년이었다. 다리를 떠날 생각을 않는 지원을, 그는 잠시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소년은 달빛이 내려앉기 시작한 대교 위에서 죽은 몸에 입 맞추고 있는 지원을 보았다.
지금 이 순간의 손을 놓치지 않으면
다음 생을 건너가 같은 하늘을 서로 기억할 수 있을까
두 개의 달이 뜨는 저녁, 황경숙
마지막
동혁이 말하면서 방으로 들어섰다. 내내 뛰어왔는지, 그는 벅찬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손엔 화살 몇 발이 들어있는 시복을 쥐고 있었다.
돌아가게 해주겠다는 그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 앞에 무릎을 꿇어 앉는 그의 표정이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그대가 거짓된 존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발언에 숨이 느리게 터졌다. 더할 것 없이 진지함으로 가득한 그의 두 눈이 나를 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 위로 그려지는 느낌에 심장이 다 떨어지고 남루했다.
"…호위무사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이제는 말씀을 드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
"조선의 시간이 뒤틀리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일식을 경험하셨을 겁니다. 어긋난 시간의 틈으로 달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대 말고도 조선으로 오게 된 사람이 몇 있을 겁니다. 너무나도 낯선 것을 담고 있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의 떨림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머리가 멍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대를 이 곳으로 데려온 것이 누구도 아닌 접니다."
그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처음 이 곳에서 눈 떴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예."
"그 전 날에, 세자저하께서 세자빈을 보러 이 곳으로 오신 걸 알고 계십니까."
"예."
"거기엔 저도 있었습니다."
"……."
"…그리고 그 때 저는 세자저하께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세자빈의 목 위에 피어난 반점들을 보게 되었고, 그로 인해 곧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
"세자빈이 곧 영영 눈 감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
"그토록 사랑하던 그 사람이……."
머릿속이 혼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말을 마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 죽음의 예고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했습니다. 알려도 살려낼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깨우치고 있었습니다."
"……."
"…아마…. 세자빈은 별궁에서 지내실 적에 준회, 그 자로부터 독초가 담긴 무언가를 받고 삼키셨을 겁니다."
"……."
"그리고 친가로 돌아오신 뒤에 본격적으로 앓기 시작한 겁니다. 의원은 그 증상을 모두 감기로 착각했습니다."
"……."
"결국 세자빈은 죽고 말았고, 그 죽음을 발견한 건 오로지 제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저는 너무나도 큰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날 밤에 모두의 눈을 피해 그 죽은 몸을 숨기고, 조선의 불완전한 시간을 이용해 후생의 그대를 이 곳으로 불러왔습니다."
"…그게 무슨……."
"내내 숨기고 있던 것은 죄송합니다. 이것에 대한 죄는 모두 제가 받을 것입니다."
"……."
"…사랑하던 사람에게 건네지 못했던 고백을, 그대를 통해서라도 전하고 싶었습니다."
믿기 힘든 사실을 털어놓고 있는 그를 쳐다봤다. 그는 차분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알리는 그의 눈빛이 보였다.
"그대를 다시 후생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동혁이 약속하고 있었다. 모든 걸 들킨 채 떨고 있는 나를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는 여전히 나를 사무치게 쳐다보고 있었다.
"대신에,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겠습니까."
"……."
"그대. 사랑합니다."
"……."
"…한 번만, 입을 맞춰도 되겠습니까."
어딘지 모르게 슬픈 감이 있는 그의 고백은 '세자빈'에게 닿지 못하고 나에게로 나타났다. 그는 불쌍하도록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눈빛에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음이 다 아스러졌다.
서로의 입술을 앞둔 상태에서 나는 살짝 그를 밀어냈다. 그는 거절 당했음에 대한 상처를 애써 숨기며 어렵게 웃고 있었다. 그에게 입을 맞춰줄 수 없었다. 한빈을 두고 누구에게도 입술을 내어줄 수 없었다. 그에게 상처낸 내가 나빴다. 그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빠짐 없이 나빴다.
"…그대에게 저는, 이번에도 안 되는 것입니까."
"……."
"……어차피 오래 가지 못할 목숨이었습니다. 마지막에 그대에게 진심을 말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지금을 위해서 그렇게 끈질기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죄송, 합니다."
"…다음 생에 무엇이라도 되어서 그대 앞에 나타나겠습니다. 약조해주세요. 그 때는 저를……. 사랑해주시겠습니까?"
나빴다. 틀림 없이 그러겠노라고 대답해야 하는 입이 가만히 있었다. 아무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복잡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 그는 대답을 주지 않는 나를 보며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괜찮다고 했다. 조금도 괜찮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대가 울지 않는 것이 제게는 사랑입니다."
그의 손가락이 내게로 닿았다. 언젠가, 내 눈물을 닦아주던 손이 이번에도 바라는 것 없이 내 눈 밑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이내 내게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키게 했다.
"이 곳에서 죽으셔야만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
"…저하께 데려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활을 쏴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대는…."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처음부터 오래 가지 못할 삶이었습니다."
그는 그 뒤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말 위에 올라타는 순간까지 그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준회가 홀로 말을 몰며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다. 그에게로 간다고 했다.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가늠할 수 없는 깊은 밤에, 우리는 떠났다. 그를 만나러.
죽은 '세자빈'을 대신하고 있었던 존재가 나였다. 내가 진짜 '세자빈'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동혁은 나를 사랑했다. 그의 사랑이 얼마나 쓸쓸하고 그만큼 헌신적이었는지 이제 조금 알게 됐다. 입을 맞춰주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에게 입 맞추면 그는 울 것 같았다. 그의 눈물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나 역시, 그가 울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동혁은 내 뒤에 바짝 붙어서 고삐를 잡고 있었다. 목덜미 위로 그가 내뱉는 숨 하나 하나가 뜨끈하게 느껴졌다. 그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작게 눈을 감아야 했다. 나 때문에 저 뜨겁고 멀쩡한 숨이 사라지게 된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계속 말을 타고 달렸다.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나타나는 것을 반복했다. 동혁은 가지고 있는 지도와 해의 방향을 보면서 그가 있을 곳을 추적했다. 쉴 틈 없이 달리는 말에게 한적한 호수에서 물을 먹일 땐 세상에 우리 셋만 남겨진 것 같아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공복으로 잠도 자지 못한 채 계속 달리고 또 달렸지만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무심코 뒤를 돌면, 준회는 말 없이 나와 동혁을 쫓아오고 있었다.
절벽이 보이기 시작한 건 밤이 걷히고 태양이 떠오르고 있을 때였다. 떠나고 세 번째로 보게 되는 해는 변함 없이 뜨겁게 빛나고 있었다. 곳곳에 절벽이 보이는 순간부터 동혁은 조금 거칠게 말을 몰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에 말을 몰고 있는 무리가 보였다. 한빈인 줄 알고 쳐다봤지만 아니었다. 온통 검은 빛깔로 옷을 맞춘 남자들이었다. 등 뒤가 서늘해졌다. 준회는 두건을 쓰지 않은 얼굴로 멀거니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 틈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두려워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동혁은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말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방향을 바꿔 나아가기 시작했다. 절벽이 점점 높아지면서 짙은 안개 덩어리들이 나타났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말은 세차게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동혁은 말을 완전히 멈추었다. 두 마리의 말이 동시에 안개 속에서 걸음을 멈췄다. 동혁은 가뿐히 그 위를 내린 뒤에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안개 사이에 걸음을 디뎠다. 안개로 뒤덮인 준회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차가워 보였다.
"…도적들이 저하를 쫓고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으시면 만나지 못하실 겁니다."
"……."
"앞으로만 나아가시면 저하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아까 가장 곧게 뻗은 절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궁의 호위무사들을 보았습니다. 분명, 그 주위에 저하가 계실 겁니다. 안개에 속아 발을 헛디디지 않게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가만히 미소 지었다.
"…나중에 만날 땐 웃고 계셔야 합니다."
그 말에 나는 내가 울고 있는 줄 알았다.
"웃고 있는 그대를, 꼭 첫 눈에 알아보겠습니다."
나는 까맣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걸음을 옮기려는 사이에, 안개에 뒤덮여 있는 준회를 보았다. 그는 무신경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을 맞추고 있으면서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저, 내가 떠나려고 다리를 움직일 쯤에 조용히 손을 들어 뺨을 몇 번 쓰다듬을 뿐이었다. 낯선 감촉에 그를 돌아보자 그는 웃는 것도 눈물 흘리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심장에 박혔다. 익사할 것 같다. 말을 할 수 없게 아픈 감각이 숨 쉬지 못하고 몸 속으로 잠식되고 있었다.
"안녕히 가세요."
"…안녕."
"그대는 제가 태어나 검을 배운 이유입니다."
"……."
"그 이유를 이젠 잊으셔도 됩니다."
잘 지내라고 속삭이지 못했다. 그 흔한 한 마디가 어려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잘 지내지 못할 것이다. 고르게 호흡하지 못할 것이다. 그 마지막 얼굴을 눈에 담지 못하고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났다. 곧 화살에 찔릴 것이라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죽는다는 건 무섭지 않았다. 그를 마지막으로 봐야 한다는 게 두렵고 무서웠다. 겁이 났다. 그와 나 사이에 마지막이 있다는 게 슬펐다.
안개 위를 달리고 있었다. 동혁의 말을 따라서 정면을 보고 걸었지만 좀처럼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말을 믿고 계속해서 달렸다. 숨이 찼다. 숨이 부족해서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락거렸다. 한참을 달렸을 때 안개는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말의 울음 소리 비슷한 것들이 미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두 뺨을 적시고 있는 눈물이 차가웠다.
"…빈궁입니까?"
마침내 안개를 벗어났을 땐 끝 없이 펼쳐진 절벽을 바라보며 서 있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멀리서 날 향해 돌아보며 묻고 있었다.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근처에서 호위무사들의 걱정스런 시선들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말을 옆에 두고, 내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눈에 의아한 감정을 버리지 못한 채 나를 쳐다봤다. 약간 수척한 내 모습을 보고 그는 놀란 눈치였다.
"뭡니까? 어떻게 왔습니까? 설마, 걸어서 왔습니까?"
그가 느낀 놀라움은 점점 걱정스러움으로 변해 갔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내 뺨에 있는 눈물 자국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그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비로소 마주치게 된 태양은, 눈이 부셔서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그를 바로 앞에 두고 나는 녹을 것 같은 눈을 잠시 감아야만 했다.
목 끝을 건드리고 있는 울음을 삼켜냈다. 마지막인 걸 인정해선 안 된다. 마지막이 아니다. 이건 마지막이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는 것처럼, 언젠가, 나중에도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어야 했다.
"저하, 제가 사라져도 끝끝내 빛나셔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가 물었다. 나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사랑합니다."
"……."
"믿어주시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했다. 아무렇지 않게 숨을 고르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는 문득 환하게 웃었다.
"사랑하는 사이에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예."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할 필요 없습니다."
"……."
"다 알고 있습니다."
그와 오랜 시간을 눈을 맞추고 있었다. 감당하기 힘든 그의 고백에 결국 눈물이 터졌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당황하다가 어설프게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런 행동에 더욱 눈물이 났다. 마지막이다.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다.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가장 바깥에 있던 호위무사의 등에 화살이 박혔다. 난의 시초였다.
모두의 눈이 순식간에 가늘어졌다.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무리를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눈이 놀랍도록 차가워졌다. 한빈이 강하게 나를 끌어 자신의 뒤로 숨게 했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그의 뒤가 좋았다.
세자저하를 지켜라! 모두 칼을 뽑아라!
갑작스런 사태에 호위무사들은 빠르게 운검을 뽑았다. 한빈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무리들이, 안개 속을 헤치고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로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셀 수 없이 많은 말들이 그들을 태우고 이 곳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한빈이 나를 잡지 않은 손으로 침착하게 검 하나를 쥐었다. 이 모든 게 사무치게 그리울 것이다. 그들보다 조금 앞에서, 시위를 당기고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동혁이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 모든 걸 쥐고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한빈의 손을 놓았다.
의문을 담은 그의 눈빛이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점점 뒷걸음질 쳤다. 점점, 점점. 절벽의 끝으로.
"빈궁! 더 이상 움직이면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어서 내 손을 다시…."
"저하."
"……."
"또 만날 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빈궁."
"감사했습니다."
등에 박히는 화살의 수가 차츰 늘어나고 있었다. 기어이 검은 깃털을 꽂은 화살 하나가 한빈의 가슴 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한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내게로 다가서려고 하는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 오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게 우리의 거리였다.
"가지 마세요……. 나를 버리지 마세요, 빈궁. 손을 잡으세요."
"다음에 만날 땐 꼭 웃고 있겠습니다. 웃고 있는 저를 저하께서, 반드시 찾아주셔야 합니다."
"…가지 마, 가지 마세요."
"그 때처럼……. 비 안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찰나에 등 뒤가 뜨거워졌다. 뒷걸음질을 치던 나는 그대로 어디론가 떨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이는 한빈의 얼굴이 눈물에 가려져서 흐릿했다. 끝이었다. 누구의 반지도 가지지 못한 채 숨이 끊기는 게 느껴졌다.
내가 사랑했던, 찬란하고 눈이 부시며 아름다운 2014년의 한양.
안녕.
안개가 짙게 깔린 꿈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어느 누군가를 쫓아가고 있었는데, 걸음이 원체 느린 나는 어떻게 해도 그 사람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잡아야 하는데, 붙잡아야 하는데……. 안개는 더욱 깊어졌고 그 사람은 이제 보이지도 않을 저 멀리에 있었다. 우리 둘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거리는 너무 넓고 컸다. 결국 나는 그 사람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을 놓아버렸다. 눈물이 흘렀다.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눈이 뜨였다.
핸드폰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지진을 낼 기세로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는 소리가 아파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유를 모르게 축축한 뺨을 문질러 닦아냈다. 빛이 없는 기숙사 안이 조용했다. 손을 더듬거려 핸드폰을 찾았을 땐, 반짝이는 액정 위로 열 하나의 번호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흐르는 자장가 같은 음악 소리는 조금 낯설었다. 매일 아침 나를 깨우는 알람 소리 대신에, 전화 착신을 알리고 있는 벨 소리가 지친 기색 없이 귓가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으니 한동안 들을 일 없던 음악이었다. 아직 일곱 시도 오지 않았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응. 아니, 방금 일어났어. 왜요?"
이른 시간에 내게 전화한 건 엄마였다. 엄마는 어제 잘 들어갔냐고 물은 뒤에 아무렇지 않게 어려운 부탁 하나를 내밀고 있었다.
"왜 나한테 그런 걸 시켜……. 저번에 엄마 밑으로 들어간 신입 사원 있다며. 그 사람한테 부탁하면 되잖아. 선생님이 외출증 더 이상 안 끊어줄 거라고."
엄마는 완강했다. 내 거절을 순순히 들어줄 마음은 없는 것 같다.
짜증스런 목소리로 항변해도 엄마는 꿋꿋했다. 나는 엄마한테 대충 알았다는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 다 깼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생각 없이 불을 켜는데, 내 침대 옆으로, 옆으로, 그 옆으로 어제는 보지 못한 짐이 가득 쌓여있는 게 보였다. 커다란 트렁크 하나와 배드민턴 가방이 두 개 정도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설마. 설마.
급하게 문을 열어 확인하자 내 이름 옆에 새롭게 추가된 낯선 명단 하나가 보인다. 여자 치고는 좀 강렬한 이름이네. 아, 넓은 방 혼자 써서 좋았는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데 기상 시간을 알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기숙사 복도 위로 퍼졌다. 정신을 찰싹찰싹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였다. 귀를 틀어막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씻고 교복을 입을 준비를 했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 뒤에 무심코 옷을 벗는데 어디선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시적으로 행동이 정지됐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태어나 처음 보는 인상의 남자 한 명이 무표정으로 서 있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그 앤 내 반 쯤 벗은 몸을 보고도 얌전했다. 급히 문을 닫지 않았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도 않았다.
"…야, 야! 뭐야! 변태냐? 빨리 나가! 남자 새끼가 왜 여길 돌아다녀!"
"여기가 내 방인데?"
"뭐?"
급하게 옷을 다시 내리며 다그치자 그 앤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남자 기숙사는 꽉 차서 남는 방이 여기뿐이래."
"……야."
"어떤 대머리 선생님이."
그 애는 태연하게 방 안으로 들어와서 내 옆, 옆, 옆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풀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황당에 가득 찬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그 애는 가볍게 웃는 것 같더니 이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 유치한 동요도 작게 불렀다. 아무래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또라이를 피해 교복을 챙기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꽤 큰 소리를 내며 닫힌 문 밖으로는 어떤 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남자를 여학생들이 쓰는 기숙사에 배정한 건지, 그리고 하필이면 그게 왜 내가 쓰는 방인 건지, 아무튼 수학 선생의 머리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침을 먹으러 가기 전에 항의하러 교무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학생이야?"
"아니."
그 애는 내 궁금증을 단숨에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렸다. 나는 살짝 미간을 좁히다가 기숙사를 나왔다. 저렇게 무섭게 생긴 애랑은 절대 같은 방을 쓸 수 없다. 절대로.
"어, 야! 어디 가? 밥 먹으러 안 가? 오늘 비엔나 나왔는데 냄새가 아주 그냥 예술이야."
"밥 먹을 기분 아냐."
"왜, 뭔데."
"…몰라. 짜증나. 웬 미친 놈 하나랑 같은 방 쓰게 생겼어."
멋대로 급식실을 건너뛰고 교무실로 향하는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익숙해서 이젠 질릴 지경인 내 친구다.
"미친 놈? 년이 아니고?"
"대머리가 기숙사 대금 걷기에 눈이 멀어서 내 방으로 보냈대."
"잘생겼어?"
"…지금 잘생긴 게 문제야? 어떻게 남자랑 방을 같이 써!"
"왜 부정을 안 해?"
"……."
"반했구나."
"입 다물어라, 향단아."
"…야! 너 내가 그 별명 부르지 말랬지. 이름을 부르라고, 이름을!"
"조용히 하시오, 향단 낭자. 눈 앞에 교무실이 보입니다."
시끄럽게 떠들다가 벌점 먹는 일은 없어야 할 것 아닙니까. 쉿. 장난스럽게 검지를 입술 위로 가져가자 내 친구는 짧게 웃으면서 먼저 교실로 가겠다고 한다. 나는 손을 흔들어주고 혼자 교무실로 들어갔다.
이른 시각의 교무실은 조용했다. 일찍 출근한 선생님 몇 명이 보이고, 부장이라 가운데에 앉아있는 수학 선생이 보였다. 수학 선생은 어디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다. 나이에 비해 탈모가 심해서 남들보다 조금 일찍 대머리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목소릴 가다듬었다.
"선생님."
"어, 그래.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저 남자랑 같은 방 못 써요."
대뜸 말하자 수학 선생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그냥 써. 며칠만 참아, 다음 주에 삼 반에 한 명 전학 간단다. 그 때 기숙사 자리 남으니까 거기로 보낼게."
"…말씀이라도 해주셨어야죠!"
"미안. 미안."
수학 선생은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그만 욱할 뻔한 것을 꾹 참아내고 본래의 목적을 꺼내들었다.
"선생님."
"왜, 또. 미안하다니까."
"외출증 좀……."
"안 돼."
칼 같은 대꾸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물러설 순 없지.
"너 어제도 외출증 끊어갔잖아."
"엄마랑 약속 있었어요. 말씀드렸잖아요."
"오늘은 뭔데."
"…엄마 심부름……."
"허이구. 밖에 나가서 놀고 싶은 건 아니시고?"
"제가 그럴 애로 보이세요?"
정색하고 쏘아붙이자 수학 선생은 졌다는 식으로 잠깐 웃음을 머금었다. 익숙한 손길로 서랍에서 외출증을 꺼내고 서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학 선생은 완성된 외출증을 내게로 건네면서 다음엔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씩씩하게 대답하고 허리를 숙인 뒤에 교무실을 나왔다. 슬슬 교실로 올라가야 하는 시간이다.
복도를 돌아 계단을 밟는데,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그 애였다. 아는 척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용기를 내서 그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야!"
"……."
"…이름이, 뭐야?"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까 처음 봤는데."
"정말 몰라?"
괜히 말 걸었다. 마치 혼을 내는 것만 같은 시선에 저절로 등이 움츠러들었다. 역시 정상은 아니다, 이 새끼. 잘못 건드렸다.
"여기, 명찰 있잖아."
가슴팍을 가리키는 손이 거칠었다.
"구준회야."
알고 있으면서. 그 애는 중얼거리다가 이내 아주 입을 다물었다. 그 때에서야 아까 문 밖에서 봤던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어색하게 웃다가 반으로 가기 위해 먼저 걸음을 올렸다.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일순간 세상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보고 싶었어."
"……."
"…너는?"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냐는 소리는 뱉지도 못했다. 나는 멍하게 내 명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자습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종 소리에 서둘러 등을 돌렸다. 이상하게 목이 탔다.
교실에 들어서자 보이는 건 핸드폰 액정을 쳐다보며 바보처럼 웃고 있는 내 친구였다. 한심해 보여서 그 귀에서 이어폰을 뽑아냈다. 그러자 내 손등을 아프지 않게 때리며 도로 이어폰을 가져가는 모습이 보였다. 헛웃음이 났다.
"야. 향단아. 걔가 그렇게도 좋냐?"
"어. 결혼할 거야."
"공부나 해, 꿈도 야무지네."
"네가 바비의 매력을 몰라서 그래! 얼마나 멋있는데. 착하고 귀엽고 잘생기고."
"잘생기긴…. 그 사람은 그렇게 작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는 있는 거야? 뭐가 보이기는 해?"
그 액정으로 보이는 건 한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신인 가수들이 차례대로 앉아 전생 체험을 하고 있었다. 단 한 장면도 놓치지 않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두 눈은 인터넷 강의를 볼 때보다 더한 집중력을 자랑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 친구를 한 번 쳐다봤다. 그렇게나 좋을까. 내 친구는 단지 팬이라는 이유로 바비가 나오는 방송은 죄다 챙겨본다. 물론 등급은 그만큼 떨어지고. 자습이 시작되기까지 약 오 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나는 그 때까지 내 친구가 짝사랑 중인 이성이자 공인인 그의 예능감을 한 번 맛 보기로 했다. 살며시 고개를 빼 액정을 쳐다보자, 바비에게 최면을 걸고 있는 사람은 보는 사람 민망하게 너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야, 미친! 바비 오빠 전생 중에 좋아하던 사람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삶이 있대."
"안 물어봤는데? 안 궁금해."
단호한 내 말에 내 친구는 잠시 나를 째려봤다.
"너, 내가 저번에 말한 팬 미팅 꼭 같이 가야 된다?"
"내가 팬이 아닌데 거길 왜 가?"
"같이 가기로 했잖아."
"싫어."
"표가 한 장에 두 사람 몫이야. 가야 돼."
이런 막무가내인 덕후를 봤나.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에 자습 시간이 시작되는 종 소리가 울렸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오늘을 피하지 못하고 여과 없이 흐르는 중이었다. 내 친구는 서둘러 이어폰을 정리하고 책상 서랍에서 아무 교과서나 꺼냈다. 바로 옆 자리인 나는 그걸 끝까지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천천히 턱을 괴고 무료하게 칠판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분명 그 위에 쓰인 건 아닌데 눈이 아팠다.
담임 선생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낯선 인영 하나가 따라붙었다. 서른 남짓의 시선이 모두 그 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자, 주목. 전학생이다."
담임 선생의 말에 반 아이들 모두가 술렁이고 있었다. 전학생이라는 그 아이는 조금 차가운 인상이었다. 누구보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가만히 서 있는 전학생은 꼭 누구를 찾는 것처럼 고개를 빼고 시선을 사방으로 던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마주쳤다고 생각했을 때 그 애는 자기 소개를 위해 입을 열고 있었다.
"안녕, 김동혁이고."
차갑다고 느꼈던 인상은 입을 여는 순간에 전혀 다른 분위기로 변했다. 활짝 웃고 있는 것도 아닌데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잘 부탁해."
이름만 말하고 끝난 자기 소개에도 반 아이들은 힘껏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난 그 기류에 홀려 얼떨결에 박수를 치고 있다가, 옆에서 중얼거리고 있는 내 친구를 향해 시선을 바꾸었다.
"쟤가 애들이 말하던 앤가?"
"…무슨 소리야?"
"소문 못 들었어? 쟤, 며칠 전에 전학 온 옆 반 애랑 형제 사이래."
"형제? 그럼 쌍둥이야?"
"아니, 엄마가 다르다는데."
"……."
"옆 반 애가 이 년을 꿇었다잖아."
내 친구가 태연하게 말했다.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던 가족 관계가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이상하게 떨떠름했다. 담임 선생은 전학생한테 앉을 자리를 알려주고 있었고, 그 애는 공손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애가 배정 받은 자리는 교실의 가장 뒷쪽이었다.
"오랜만이네?"
전학생이 내 옆을 스쳐가며 속삭였다. 장난인지 환청인지 모를 그 소리는 오로지 나만 들을 수 있는 것이었는지 내 주변 모두가 가만히 있었다. 이해 못할 소리에 급하게 등을 돌리자 책상 위에 익숙한 동작으로 교과서를 올리고 있는 그 애의 모습이 보였다.
눈이 마주친다.
눈이 접힌다.
웃는다.
숨이 멎는다.
뭐가 오랜만이라는 건지 설명해주지도 않고 그 애는 웃고 있었다. 앞에서 담임 선생의 주의가 들려올 때가 되어서야 그 애로부터 시선을 뗄 수 있었다. 몸 속 어딘가가 간지러웠다. 심하게. 자습이 시작되면서 나는 교과서에 의미 없는 낙서들을 그리고 있었다.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중요한 문장 아래에 밑줄을 그으면서도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오랜만이다, 그 말이, 처음으로 복잡하다고 느꼈다.
일 교시는 한국사였다. 교과서를 챙기고 조금 멍하게 수업을 기다렸다. 짧은 쉬는 시간이 지나가고 조금 소란해질 때 쯤에 역사 선생이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섰다. 주름이 많은 역사 선생의 등장에 반 아이들의 들뜬 기운이 단숨에 가라앉았다. 역사 선생은 가만히 교실 안을 둘러보다가, 처음 만나는 얼굴에 잠시 다른 표정을 했다.
"가만, 거기. 전학생이냐?"
"네."
내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래, 우리 학교 적응은 차차 하도록 하고. 오늘 본문은 전학생이 한 번 읽어볼까? 몇 쪽까지 읽었더라."
반장이 쪽 수를 알리고, 뒤에서는 의자를 밀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마찰이었다. 은근한 음성이 시작되고 있었다. 조선의 한 부분을 읽어가는 그 애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귓바퀴를 건드리고 있었다.
"…그는 세자빈을 살해한 죄를 순순히 인정하여 처형 당했고, 이후 난을 받은 조선의 왕권은 크게 흔들리게 됐으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 애에게 들릴 것 같아 겁이 날 정도였다. 역사 선생한테서 목소리가 좋다는 칭찬을 받으며, 전학생은 짧게 웃었다.
그 뒤의 시간은 어제처럼 별 것 없이 흘렀다. 점심 급식을 먹고, 똑같은 수업을 듣고 똑같은 펜으로 똑같은 필기를 하고, 똑같은 선생님의 같은 수업을 들었다. 장마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의 일기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구름들의 상태가 우울했다. 마음이 덩달아 무거워졌다. 오후 수업의 마지막 교시인 화학은 지나치게 지루했고, 그건 조용히 내 속을 긁어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복잡한 영어 단어가 칠판 위로 나열되고 있었다. 하품이 나온다. 졸린 눈물이 고였다.
드디어 반가운 종 소리가 울리고, 화학 선생은 교과서를 챙겨 교실을 나갔다. 그와 거의 동시에 가방을 챙기기 시작하는 나를 보며 내 친구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가게? 보충은?"
"짠."
자랑스럽게 외출증을 보여주자 친구는 약간 허탈한 것처럼 웃고 있었다.
"어디 가는데?"
"엄마 심부름하러 근처 꽃 가게."
"꽃 가게?"
"응. 이번에 승진한 상사 드려야 된다고 꽃 다발 주문하셨다는데, 받아서 회사로 가지고 오래."
"그래, 잘 가. 담임한테 말해줄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고 교실을 나왔다. 교실을 나서기 전에, 문득 뒤를 돌아 그 곳을 쳐다보자 전학생은 그 사이에 친구를 여럿 만들었는지 반 아이들과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말을 붙이려다가 그냥 생각을 접었다. 말을 걸 첫 마디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학생들로 붐비는 복도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왔다. 만나고 싶지 않은 빗소리를 마주치게 됐다. 가벼운 소리로 떨어지고 있는 비는 장마라는 떠들썩함을 생생히 실감케 하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줄을 이루고 있는 비를 쳐다보며 가방을 뒤져 우산을 찾기 시작하는데, 이상하게 잡히지가 않았다. 분명 어제 넣어둔 것 같은데. 가방엔 공책 몇 권과 필통이 전부였다. 다시 올라가서 우산을 빌려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땐 눈 앞으로 어떤 빨간 빛깔이 나타났다.
"학생, 이거 쓸래요?"
"……."
"받아요."
남자는 나한테 빨간색 우산을 내밀고 있었다. 받을 생각이 없었는데, 남자는 친절한 얼굴로 그걸 굳이 내 손에 쥐어줬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보건실로 가져다줘요."
"……아, 새로 오신 선생님이세요?"
"네."
"…그렇구나."
"학생, 내가 처음이라서 잘 모르는데 교무실이 어디예요?"
어깨가 반 쯤 젖어있는 남자는 상냥하게 묻고 있었다. 나는 익숙한 방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 쪽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네. 안녕히 가세요."
"…근데 어디 아픈가? 학생, 눈이 좀 멍하네."
그는 서류 가방을 다른 손으로 바꿔 잡으면서 내 이마를 짚었다. 날 쳐다보는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번져 있었다. 낯선 표정에, 갑작스런 접촉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니네, 열이 없네. 내 착각이었네. 그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문득 웃었다. 오직 부드러운 것으로만 가득 채워진 웃음이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았다. 한참 그 얼굴을 쳐다보는데도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남자의 손이 닿았던 이마가 조금 붉어지기 시작했다.
오고 가는 말이 없었다. 남자는 얌전하게 웃더니 이내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나중에 봐요."
"…네."
"이름은 그 때 알려줄게요."
"……."
"아, 아니다. 그냥 지금 알려줄래."
"……."
"송윤형이에요."
그는 나지막이 속삭이다가 내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홀린 것처럼 바라봤다. 정신이 들지 않았다.
남자가 쥐어준 우산을 소중하게 들고 빗속을 향해 걸었다. 차가운 비를 나를 대신해 맞고 있는 우산이 빨갛게, 빨갛게 흐려졌다.
엄마가 문자로 알려준 꽃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카운터에 사람이 없었다. 우산을 접으며 가게 안을 구경했다. 예쁜 꽃들이 많았다. 여기 저기서 향기로운 냄새가 기분 좋게 코를 찌르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찾으시는 꽃이라도 있으세요?"
어디선가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곳의 점원으로 보이는 그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엄마 이름을 말하자, 그는 고갤 끄덕이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조금만 기다리니 그는 커다란 꽃 다발 하나를 가지고 왔다.
"계산은 이미 하셨어요. 그냥 가져가시면 돼요."
"아, 네. 안녕히 계세요."
남자는 나한테 그걸 내밀면서 무언갈 묻고 싶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눈을 조금 길게 쳐다봤다. 그랬는데 남자는 나한테 아무 말하지 않았다. 뭐지. 이상한 사람이다. 우산을 챙겨 가게를 나갈 준비를 하는데 많은 향기 속에 덮인 목소리가 뒤늦게 튀어나왔다.
"…저기!"
단말마 같은 소리가 나를 등 돌리게 했다. 근방에서 본 적 없는 교복을 입고 있는 꽃 가게 직원은 아주 잠깐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기자기한 앞치마를 입고, 그는 이내 머쓱하게 웃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찾는 사람인 줄 알고."
"…아, 네."
"착각을 좀 했네요."
"……."
"…드리고 싶은 꽃이 있는데, 나중에 꼭 다시 찾아주실래요?"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웃고 있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
"…그 때 다시 만나요."
"……."
"그럼 안녕히 가세요, 손님."
내 또래로 보이는 그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가게 안으로 또 다른 손님이 들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익숙하게 손님을 맞았고, 더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문을 잡았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찬우야, 여기 와서 모종 옮기는 것 좀 도와줘."
"…네, 아빠. 잠시만요. 곧 갈게요."
가게를 나오면서 듣게 된 그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비는 아까보다 조금 멎어 있었다. 나는 들고 있는 꽃 다발이 최대한 젖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역 앞에 신입 사원을 보냈으니 그 사람한테 꽃을 전해주라고 했다. 통화는 금방 끝났다. 익숙한 역 주변을 걸으면서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낮게 쏟아지는 비를 보며 걷고 있었다. 다리에 흙탕물이 튀겼다. 꽃 다발이 더럽혀지지 않게 향기를 좀 더 꽉 끌어안았다.
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역 앞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커다란 꽃 다발을 든 채 가만히 서 있는 나를, 사람들이 약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지나쳤다. 인내심을 가졌다. 나한테서 꽃을 가지고 갈 그를 꿋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비는 지나치게 길었고, 끈질겼다.
한참 기다렸을 때, 누군가가 우산을 툭툭 건드렸다.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 아니요."
"저는 많이 기다렸는데."
"……네?"
되묻는 말에 그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모든 걸 불문하는 미소였다.
"버스가, 비 때문에 조금 막히더라구요."
의아할 틈 없이 바로 이어지는 말은 의외로 담담했다. 투명으로 된 그의 비닐 우산 아래로, 미안함에 잔뜩 찌그러지는 얼굴이 보였다. 그는 다 젖은 정장을 입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눈을 맞추며 웃다가 이내 부드러운 동작으로 내게서 꽃을 빼앗아갔다.
"가지고 오느라 번거로우셨죠?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희 차장 님보다 예쁘시네요."
"…네."
"어, 그 교복. 내 동생들이 이번에 맞춘 거랑 똑같네."
붉은 넥타이를 매고 있는 그가 잔잔하게 웃었다. 형식적인 칭찬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더군다나 엄마보다 예쁘다는 소리는 칭찬으로 들리지도 않았다. 우산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문득 그에게로 닿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심 그가 아주 젖어버릴 것 같아서 겁 내고 있었다.
빗속에 파묻힌 벨 소리가 들렸다. 단조로운 벨 소리는 그의 정장 주머니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는 내게 잠시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더니, 내게 주던 목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으로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예, 보안 팀 사원 김진환입니다. 네, 과장 님. 네. 아, 지금 받았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네,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네."
그는 전화를 끊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고운 선을 가진 눈이 촘촘하게 반짝거렸다.
"안녕, 조심히 가요."
"…네. 안녕히 가세요."
"많이 기다렸어요."
"……."
"아주, 많이……."
그는 당연한 걸 말하는 사람처럼 미소 지었다. 비는 꼭 우는 것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우는 소리 같았다. 슬픔에 못 이겨 자신을 놓아버린 소리인 것처럼 들렸다. 그는 그 속에서 휩쓸리는 것처럼 서 있다가, 이내 가득 꽃을 안고 내게로부터 등을 돌렸다. 나를 채우고 있던 향기가 이제는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왜인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차차 비의 모든 것에 묻혀서 사라졌다. 내 것이 아닌 우산을 쥔 손에 좀 더 힘을 넣었다. 그러지 않으면 떨어뜨릴 것이다. 모든 것을.
비는 처량하게 떨어졌고, 그 기세에 나도 떨어질 것 같았다. 수학 선생의 꾸중을 피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방향을 틀고 있었다. 우산을 맞고 튕겨지는 빗물이 여럿이었다. 자동차가 도로를 질주하며 나한테 차가운 걸 흩뿌렸다. 몸이 젖었다. 상관 없었다.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우산을 더 꽉 쥐었다. 가야 했다.
그 곳이 가까워지면서 자꾸만 마음에 구멍이 뚫리는 것만 같은 이 느낌은 대체 뭘까.
알 수 없었다.
바보 같이 태평한 것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이번 장마는 그렇게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모든 걸 휩쓸고 누군가에게 상처 준 뒤에야 만족하고 떠날 방울들이었다. 걸음은 어떤 공원에게로 가고 있었다. 나를 지나치는 사람이 없었다.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무채로 변하고 있었다.
공원은 잘 보이지 않았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렸다. 비가 바닥에 떨어지며 만들어내는 흐릿한 형상은 시야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공원 구석에 만들어진 꽃밭도 마찬가지였다. 흐릿했다. 빗속에서 정상으로 살아남은 건 얼마 없었다.
우산을 버렸다. 빨간색 우산이 장마가 이끄는 바람에 휩쓸려서 뒤집어지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기기 시작하는 빗물이 붉었다. 머리 위를 적시는 빗물은 아득하고, 아프고, 차갑고, 한 없었다.
빗방울이 내렸다. 비는 빠른 속도로 거세졌다. 나는 그걸 하염 없이 맞고 있었다. 옷이 젖었고, 뺨이 젖었고, 내 마음도 젖었다. 모든 게 다 축축했다. 멀쩡했던 교복이 모두 다 젖어버렸다. 비는 차갑고 단단했다. 흐트러짐 없이 이 세상을 평등하게 적시고 있었다. 꽃들은 즐겁게 수분을 보충하고 있었다. 꽃이 웃음을 머금고 서로에게 물장구를 하는 이명마저 들려왔다. 정신은 조금씩 궤도를 이탈하고 있었다. 시선의 모든 것이 아득해졌다. 대체 얼마를 이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꽃들이 다 내 것으로 보였다.
"기다리지 말랬잖아."
등 뒤에서 말하고 있는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섣부르게 등을 돌릴 수 없었다. 손 끝으로, 비가 모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간지럽고 따가운 감각이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넘치게 할 모양이었다.
"…기다리지 말랬잖아."
"……."
"그 때, 못 들었어?"
"…아니……."
"……꿈에서는 네가 맨날 못 들은 척했어."
정확히 어떤 감정을 동반하고 있는지, 오로지 비로만 채워지고 있는 청각은 둔해서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했다.
등을 돌린다.
그가 보인다.
아프다.
숨이 멎는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우산을 버린 채 비를 맞고 있었다. 질식 당할 것 같았다. 비에 온전히 젖어버린 그의 머리칼이 캄캄했다. 그는 나와 같은 색의 교복을 입고, 같은 눈을 하고, 같은 표정으로, 같은 마음을 가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인지 뭔지 모를 것이 뺨에 자꾸만 닿았다. 그가 느리게 손을 들어서 내 얼굴을 감쌌다. 비를 맞았음에도 그의 손은 익숙했고, 따뜻했다. 그의 손가락이 문득 내 입술 끝을 쓰다듬었다.
"웃고 있기로 했잖아."
약속 지켜. 어서 웃으라는 그 말에는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게 전부였다. 대답할 수 없었다. 비를 맞은 눈 앞이 나른했다. 그는 가만히 있는 나를 말 없이 안았다. 넘어오는 체온이 좋았다. 나와 같은 속도로 뛰고 있는 심장이 느껴져서 좋았다. 여기서 만난 그가 좋았다. 그의 손이 변한 것 없이 서툴게 나에게 닿아 흐르고 있었다. 비는 여전히 주변의 호흡을 적시고 있었다.
"그리웠어. 울고 싶었어. 아팠어. 사랑했어. 사랑해."
그가 고백했다.
비가 닿지 않은 곳으로, 나비가 날고 있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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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6233입니다. 우선 늦어서 죄송해요... 드리고 싶은 말씀이 많지만 오늘은 많은 말하지 않을게요! 수다는... 외전까지 모두 끝나고 후기에서 쏟겠습니다. ㅋㅋㅋ 저번 편에 모두 답글 달아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ㅠㅠ QnA도 진행될 예정이니 궁금하신 건 그 때 다시 물어봐주세요! 관심 가져주신 모든 분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갑자기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늘어나셔서 놀랐어요... ㅎㅎ 전혀 그럴 만한 글이 아닌데... 제 결말을 싫어하시는 분이 계실 것 같아서 죄송해지네요... ㅠㅠ
바나나킥 님 빈블리 님 김빱 님 일이세개 님 뜨뚜 님 뿌요뿌요 님 한빈아춤추자 님 또또 님 슬기 님 동동동 님 총총총 님 꾸준해 님 꾸주네 님 김한빈김지원 님 꾸욥 님 헤헷 님 페브리즈 님 햇님 님 떡볶이 님 파랑짹짹이 님 혜민서송씨 님 케빈 님 팬더 님 갠짠 님 천상여자 님 동동만두 님 눈물점 님 두둠칫 님 찌푸 님 지난지난 님 삐야기 님 친주 님 콘초 님 ㅈㅇㅈㅇ 님 엘사 님 맘비니 님 콩기름 님 뽀로로 님 준회 님 기승전 님 주네야 님 콘스프 님 옷쟝 님 밤비 님 쵸무룩 님 ㄱㅈㅎ 님 메추리밥 님 에린지움 님 흐림 님 구주네 님 됴종이 님 쿠쥬 님 판다 님 음흉 님 1104 님 한빈두빈 님 동동아 님 메추리알 님 햇님달님 님 초코 님 우엉차 님 핫초코 님 세자빈 님 빈 님 콘콘 님 초록프글 님 모카 20 님 감귤 님 동그라미 님 크로나 님 2015 한양 님 비니송송 님 돈도니 님 쟉하 님 태양아래 나비 님 밥햫럽 님 맘빈 님 주네역 님 우산 님 김치볶음밥 님 뿌링클 님 반스 님 망고 님 텔비 님 잇쇼니 님 바비아이 님 한빈아사랑해 님 젤리 님 설렘 님 yeevely
혹시나 빠지신 분이 계시면 말씀해주세요...! 저는 바보라 실수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ㅠㅠㅠ 다음에는 눈물점 님이 추천해주신 브금과 함께 진환이 외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좋은 꿈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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