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앞 단골 카페는 오늘도 한적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우물쭈물한 남자의 목소리에 머리 꼭지로 열기가 확 밀려들었다. 휴대폰을 쥐지 않은 손으로 카페 출입문을 밀고 들어섰다. 어서 오, 까지만 들리고 나머지는 뭉개지는 알바생의 목소리에 손을 들어 흔들어 준 다음 매일 앉는 구석 창가자리로 걸어 들어갔다. (내 맘대로)내 전용 테이블 위에 노트북이며 연습장, 책 몇 권과 커다란 가방이 커피 잔들과 함께 엉켜있었다. 되는 일이 없군. 입맛을 쩝 다시며 앞자리에 몸을 묻었다. 남자는 이제 자신의 난처한 상황을 시간 단위로 쪼개가며 설명하고 있었다. 귀가 아프다.
“저기요”
-네?
“결론은 오늘 못 나온다는 거잖아요.”
-...네...미안합니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다음엔 제가 꼭 늦지 않게
“아뇨 다음에 볼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제가 참을성이 좀 없어서.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종료 버튼을 눌렀다. 망했어. 늘어지는 발걸음을 옮겨 주문을 하려고 카운터에 갔더니 이미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와 있었다.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서 자연스럽게 생긴 결과다. 내 맘 알아주는 건 지민씨 뿐이야. 잔을 받친 쟁반을 내미는 바가지 머리 청년에게 푸념하듯 중얼거렸더니 누나 좀 웃어여! 왜 만날 찡그리고 이써여어, 하면서 진짜 예쁘게 웃는 게 뭔 줄 알아? 하고 뽐내듯이 눈 꼬리를 확 접어 내린다. 아아, 세상이 밝아지는 기분이야. 왜 그렇게 빤히 보냐고 쑥스러운 듯 코밑을 슥슥 문지르는 통통한 손가락을 보며 밀려드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지민씨는 손이 왤케 쪼끄매요 좀만 더 크고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당장 들이댔을텐데!! 되도 않는 고집을 부리자 지민씨가 통통한 입술을 쭈욱 내민다.
“ 이 손에 붙들려서 허우적대는 여자가 한 둘이 아니거등여? 보아하니 또 바람 맞았나본데 지금 저한테 화풀이 하는 거에여? 못났네 이 누나~ ”
“ 미안해요 지민씨 으으 스트레스 때문에...”
“ 주변에 누구 없어요? 잘 둘러봐바여. 일단 커피부터 마시고 진정한 다음에!”
결국 등을 떠밀리다시피 자리에 와 앉았다. 차가운 커피를 크게 한 모금 마시고 나니 눈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몇 번 깜빡이고 눈동자를 굴리는데 짐만 쌓여있던 앞자리에 웬 커다란 남자가 앉아있었다. 테이블에 올린 한 쪽 손으로 턱을 괴고서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눈이 슥 마주쳤다. 민망해서 잠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데 시선 끝에 턱을 받친 기다란 손가락들이 걸려왔다. 다시 슬쩍 곁눈질을 했다. 이번에는 지친 얼굴로 머리칼을 연신 쓸어넘긴다. 기다랗고 마디마디가 적당히 불거져 나온 손가락 사이로 노랗기도 까맣기도 한 머리카락들이 엉켜들었다. 정신없이 남자의 손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경보음이 윙윙 울렸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침을 삼킨 다음 다시 그를 보았다. 양 손을 모아 입가에 댄 채로 남자가 정확히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구진 눈빛, 보다도 바짝 깎은 손톱의 모양새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기요”
“...네?”
“한번 할래요?”
“네에???”
당황스런 표정을 한 남자의 목울대로 침 넘어가는 모양새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방금 뱉은 문장에서 제일 중요한 목적어를 빠뜨렸다는 것을 깨닫곤 얼른 주머니를 뒤졌다. 비상용으로 챙겨 다니는 명함지갑에서 한 장을 꺼내 들이밀었다. 남자가 엄지와 검지를 살짝 구부린 별 것 아니지만 우아한 모양새로 내 명함을 받아들었다. 가슴속에 쌓여있던 응어리가 사르르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대합격이야. 종이조각에 새겨진 영어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던 남자가 눈을 치켜떴다. 매끈한 이마에 주름이 살짝 일었다.
“반지...?”
“네. 나는 반지 만드는 사람인데, 같이 작업해볼 생각 있냐고요.”
“나는 뭘 하는 건데요?”
“손! 손 모델이요!”
내가 끼고 싶은 반지를 직접 만들어 끼다가 온라인에 판매하기 시작한지 몇 년. 여자들만큼이나 남자들 반응도 꽤 좋아 심플하면서도 중성적인 아이템들을 메인에 걸고 모든 일처리를 나 혼자서, 무튼 꽤 고군분투하던 중이었다. 아무래도 남자 착용 샷이 필요해 초반에는 남사친 찬스를 썼는데 성에 차질 않아 내 마음에 드는 손 모델들을 직접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는데 첨엔 호기심에 몇 번 작업실을 기웃대더니 그 후론 별 핑계를 대어가며 어깃장을 놓거나 작업은 대충하고 술이나 한 잔 하자는 얼토당토않은 개수작을 부리는 것이었다. 요즘 것들이란 프로 의식이 없어 프로 의식이. 혀를 차는 내 곁에서 지인들은 지랄 맞은 네 성격을 탓하라며 도리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참이나 명함을 앞뒤로 살피던 남자가 흐음, 한 쪽 눈가를 살짝 찡그리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검붉은 입술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손을 가진 남자가 나와 일 궁합도 잘 맞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모델 할게요. 대신,”
“...?”
“나랑 한 번 하게 해주면.”
아, 이번에도 역시 실패인가?
“...뭐요?”
남자가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굴러다니는 책을 가방 속에 쓸어넣고 일회용 커피 컵을 차곡차곡 포갠 다음 노트북 뚜껑을 소리 나게 덮은 뒤 나를 올려다보았다. 불쾌함으로 흐려진 나의 것과 다르게 그의 눈동자는 나른하면서도 선명했다.
“데이트요. 데이트 한 번에 모델 한 번.”
“?”
“딜?”
“????”
이번에는 내가 침을 삼켰다. 꾸울꺽 하는 소릴 듣기라도 한 건지 남자가 재채기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pick me, choose me, love me 上
“아니, 잠깐만요,”
“왜요.”
“너무, 아,”
“이상해요?”
“아아, 네, 일단 좀 빼볼래요?”
“...”
“남준씨, 제 얘기 못 들었어요? 후...좀 빼봐요.”
“싫은데요. 난 지금 이 자세가 맘에 드는데.”
“아니 왜 남준씨가 자세를 맘대로 정,”
“왜긴요 내꺼니까 그렇죠.”
“...내꺼기도 하거든요. 아무래도 느낌이 별로 안 나니까 일단은,”
“우와아악!”
“깜짝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대화 너무 야한 것 같지 않아요?”
카메라 액정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괴로운 듯 얼굴을 쓸어내리는 남준의 오른손 중지에 끼워진 청록색 원석이 박힌 은반지가 조명에 반사되어 마구 번쩍였다.
“무슨 헛소리에요.”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 목적어 없이 나누는 말들이 하나같이 자극적이잖아요 으아아...”
“음란함은 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거랬어요.”
“...누가 그래요.”
“친한 선배가요. 아 그 반지 남준씨한테 안 어울리니까 빼보라고요. 같은 말 몇 번씩 하게 해요.”
“내가 만지면 반지 망가뜨릴 것 같아요. 와서 직접 빼줘요.”
“...”
“얼른요. 촬영 안 할 거예요?”
“아, 진짜,”
저 능글맞은 얼굴에 카메라를 확 던져버릴까.
“나무 책상이 배경인 게 문제인 것 같아요.”
“흠.”
“좀 심플한 걸 먼저 끼고 찍어보는 게 어때요?”
“...그래요 일단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까닭은 나를 분노케하는 수많은 개드립의 향연 중 잠시 찾아오는 이 순간들 때문이다. 착장시킬 땐 예뻤는데 사진으로 보니 어딘지 모르게 이상해서 심각한 얼굴로 나무 책상 위에 쭉 뻗은 김남준의 손을 잡아들어 가까이 들여다보고 있으니 알아서 손 방향을 이리저리 틀어주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전에도 몇 번 비슷한 상황들이 있었고, 그의 아이디어는 대부분 맘에 드는 편이었다. 손모델이 김남준으로 바뀐 뒤 고객 반응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소매는 계속 걷고 있을까요? 아님 끝단만 살짝 보이게?”
“일단 걷은 채로 가요.”
“그 반지는 어쩐지 청순해서 셔츠입고 찍어도 이쁠 것 같은데...”
“그럼 오늘은 이대로 찍고 다음에 셔츠입고 찍어보고 그러죠 뭐.”
“와 작업 얘기할 땐 내 말 엄청 잘 들어주네요.”
작업 얘기할 때 김남준씨가 제일 멀쩡해보이거든요. 라고 답하고 싶은 걸 애써 삼키며 반지를 교체했다. 가늘고 길지만 기본적으로 단단한 김남준의 검지에 밴드 형태의 심플한 반지를 끼웠다. 처음부터 이 손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모양새와 분위기에 감동받아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괜히 크흥 코를 들이마시는데 이 남자가 앞에서 또 초를 친다.
“이러다 제 손한테 사귀자고 고백이라도 할 기센데요.”
“...됐고 손 예쁘게 잘 펼쳐 봐요.”
“내 손 말고 나한테도 좀 잘해줘봐요.”
“그쪽이 하자는 대로 다 하는데 이보다 뭘 어떻게 잘해줘요?”
데이트 한 번에 모델 한 번. 처음 만난 날 김남준이 내걸었던 조건을 기억한다. 얼토당토않은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수락했던 건 진짜 탐나는 손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김남준은 작업이 끝나면 함께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술도 마셨다. 심드렁하거나 핀트가 엇나간 채로 티격태격 대다 보면 그 시간들이 어느새 지나가 있었다. 아니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여자가 없을 것 같지도 않은데 굳이 나랑 왜? 까지 생각하다보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른 일들로도 충분히 과부하 상태다. 김남준의 손을 움직여 자세를 잘 잡아두고 카메라를 들며 나는 말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데...이트 이제 안 하면 안돼요? 일한 만큼 내가 보수를 드릴 테니까”
“데이트 없인 모델도 없어요.”
“아 왜요!”
“왜일 것 같아요?”
고운 두 손 위에 철푸덕 엎어진 남준의 캬라멜 푸딩 같은 머리꼭지가 뷰파인더에 가득 들어찼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정색을 하고 한 마디 하려는데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거봐.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
“근데요.”
“...”
“결국 알고 싶어지게 될 걸?”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카메라를 든 내 손이 나도 모르게 움찔 했다. 뷰파인더 속에 머리꼭지 대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김남준의 말간 두 눈이 쓸데없이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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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잘 지내고 계셨지요? 글잡에 글 올릴때마다 매번 너무 오랜만이라는 말을 당연히 하게 되어버려서 조금 민망한 촉새입니당..헤헤..그래도 오랜만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남준이 사진들을 구경하다가 많은 분들이 그러하시겠지만 저역시 남준이 손 성애자(!!)인지라ㅠㅠ곱고 예쁘고 커다란 남준이 손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런 말도 안되는 글이 나와부렀네요 하하...개구지고 발칙하면서도 섹시한 힙합보이! 가 이 글 속 남준이의 컨셉인데...어떠신가요? 상 중 하 3편으로 이어질 예정이에요. 중 편을 언제 써올진 모르겠..지만 하고 궁시렁 거리고 있는데 뇌섹남ㅠㅠㅠ문제적남자ㅠㅠㅠㅠㅠㅠㅠㅠㅠ김남준씨 덕에ㅠㅠㅠㅠ열심히 쓸 수 있을거 같아요 여러분들ㅠㅠㅠ...그러니까 절 버리지 말아주ㅅ(헛소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기조심하세요!
암호닉 신청해주신 충전기님, 꾸기님, 벨님, 나무님, 코코몽님, 목도리님 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싸랑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