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잠시만요!"
슬슬 여름이 다가오는 시기. 봄이 끝나감을 알리듯, 곳곳에 피어나는 초록색들. 후끈하게 치고 들어오는 뜨끈한 바람까지. 아, 정말 여름이 오는구나. 한 해의 시작을 덜덜 떨며 보냈던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5월이라니. 무언가 신기하면서도 끔찍한 기분에 절로 얼굴이 살짝 찌푸려진다. 페이스북엔 파란 하트들이 가득이고, 주위는 커플들이 가득이다. 나 빼고 따뜻한 봄, 여름. 나는 연애를 못 하는게 아니고, 안 하는 거야. 스스로를 위로하며 현실을 받아 들이던 그 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더란다.
오랜만에 집에서 나왔던 탓이라, 조금 멀리 나왔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은 고사하고, 아는 사람 또한 있을 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아니겠거니, 하고 가던 길을 마저 가는데, 그 사람이 내 손목을 잡아왔다. 그제서야 입에서 저요? 하고 바보같은 말이 튀어 나갔다. 상대방은 뛰어 왔는지 허리를 숙인 채 숨을 고르고 있었고, 혹여 내가 그냥 갈까 꽉 움켜 잡은 손목의 손에도 열이 후끈 올라 있었다. 이태껏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짙은 갈색 머리에 살짝 베이비 펌이 되있는 것이, 남자의 외모와도 굉장히 잘 어울린단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지만, 키는 생각보다 작았다. 그래서 그런 지, 무릎 살짝 위에까지 내려오는 청 반바지를 입은 모습이 정말 딱 개구쟁이 같아 보였다. 생긴 것도 어려 보였고. 양 쪽 귀에는 두어 개의 피어싱도 있었다.
숨을 다 고른 것인지, 편안함을 되찾은 남자가 숙이고 있던 허리를 피고 고개를 들었다. 제 아이폰을 대뜸 나에게 내민 남자는,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번호 좀 주세요!"
늘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상상만으로만 만족하던 일. 누군가에게, 그것도 남정네에게 번호를 주고, 간질거리는 썸의 과정을 거쳐, 달달한 연애를 한다. 이 공식은 내 머릿속에서 지박령처럼 떠나지 못 하고 늘 있던 로망이었다. 게다가 상대방은 외모도 꽤 준수한 편이었다. 그러면 뭐다. 번호를 줘야한다!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입은 따로 놀았다. 이게 바로 언행불일치라고 하던가.한 번도 남자와 제대로 어울려 본 적이 없는 탓과, 여중 여고를 나와 자연히 생긴 무의식 중의 철벽이 한 몫을 했던 것이다.
"싫어요."
"헐."
이런 병신. 나도 모르게 뱉어 놓고 후회를 하는 모습이란. 나도 퍽 당황스러웠지만,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내 주둥이를 세게 내리치고 실수였다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굴러 들어 온 복을 내 발로 직접 걷어차다니. 긴장감과 당황스러움에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을 잠시 벙찐 표정으로 쳐다보던 남자가 휴대폰을 왼손으로 옮겨 잡더니, 아무 것도 잡지 않은 오른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또 뭐지. 일단 다시 기회가 들어온 것 같기는 한데. 내가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잠시 그 손을 쳐다보다가 남자를 다시 쳐다보니 발을 동동 구른다.
"그럼 그 쪽 휴대폰 주세요."
"왜요."
"그 쪽이 번호 주기 싫다면서요. 그럼 내 번호라도 알려줄래."
일단 휴대폰을 건내야겠다.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내 휴대폰을 어정쩡하게 건내주자, 씩 웃는다. 웃을 때 눈두덩이 살에 눈이 파묻히는 모습이 봐줄만 했다. 귀여웠다. 키가 작아서 그런가 손도 작다. 그 작은 손으로 얼굴을 화면 가까이에 대고 번호 하나 틀릴까 봐 꾹꾹 공들여 누르는 모습도, 다 귀여웠다. 다 치고나서도 제 번호를 몇 번씩이나 계속 확인하며, 내 휴대폰을 돌려주기를 망설이는 행동에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러자 어, 웃었다! 하고 신기한 듯 쳐다보는 남자.
괜히 민망해서 빠르게 휴대폰을 받아 들고 번호를 확인했다. 저장을 해야하나.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리고 이름이 뭐에요, 하고 약간은 무뚝뚝한 말투로 물어보자, 환하게 웃는다.
"박지민이에요."
"아."
"얼굴만큼 이름도 짱 멋있죠?"
이름이 멋있는 건 도대체 뭐지. 대충 고개를 두어 번 끄덕여주며 번호를 저장했다. 자신을 지민이라고 알려준 상대도 혼자 나온 것인지, 제 번호를 저장하는 것을 끝까지 봤으면서도, 가질 않고 내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다. 원래 다 이런건가. 번호만 물어보고 휙 가는 것도 어색할 거라 생각은 했지마는, 이렇게 또 계속 서 있으니 이것도 이거 나름대로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이제 볼 일 다 끝났는데 안 가냐고 밀어내기도 뭐하고. 아까와 같이 멀뚱 쳐다만 보고 있는데, 뭐가 그리도 좋은지 자꾸 헤헤, 웃는다.
"제가 연락 안 하면 어떻게 할 거에요?"
"그럼 제가 하죠, 뭐."
"제 번호 없으시잖아요."
아 맞다. 큰 깨달음을 알았다는 듯 크게 반응을 하던 남자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시무룩해져서는 연락 안 할거냐고 묻는데, 놀리기 좋은 사람이란 생각도 들었다. 처음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참 파악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비밀은 없이 지낼 것 같아서 좋은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어색하다보니, 할 말도 없고 해서 이만 가겠다고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 가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서는데, 뒤에서 남자가 살짝 큰 목소리로 외쳤다.
"연락,"
"……?"
"꼭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