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y, the sun
08
아직 힘이 다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조금 무리하게 힘을 써버린 태민이 결국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고통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눈을 떴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눈동자는 무엇을 비추는지 알 수 없을정도로 몽롱했고, 아무리 주변에서 흔들고 말을 걸어도 그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정신이 든 듯 화들짝 놀란다. 곧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괜찮냐며 손을 뻗는 백현의 태민이 갑자기 괴물이라도 본 듯 비명을 지르며 무리하게 도망치려다 침대에서 떨어졌고, 태민님! 세훈이 급하게 잡으려하자 태민이 큰 소리로 울며 악을 질러댔다. 김종현!! 어미를 잃은 어린 아이처럼. 꿈 속 괴물이라도 본 듯한 그저 어린 아이처럼 악을 지르며 울음을 토해내는 태민. 준면이 한순간에 사라졌고 루한이 태민이 혀를 씹지않게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흥분감과 공포로 젖어들은 태민은 종현의 이름만 울부짖었다.
곧 바람소리와 함께 종현의 모습이 나타났고 태민의 엉망인 모습에 꽤나 화가 났는지 종현이 지나가는 자리에 있던 거울들과 유리들이 큰 소음을 내며 폭팔했다. 곧 루한의 옆에 있던 창문이 산산조각이 났고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자 세훈이 루한의 앞에 서서 공격자세를 취했다.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의 빛이 찬란하다. 태민을 안아들은 종현이 자신의 가슴 속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우는 태민을 보며 가슴 아픈듯 입술을 깨물어 울음을 참더니 이내 차갑다못해 살벌한 얼굴을 하고 무리를 바라본다.
“다 나가.”
“… … .”
서로 눈치를 보며 어느 누구도 나가려 하지 않았다. 이제서야 만난 태민인데. 그동안 그렇게나 기다렸던 태민인데. 또 다시 종현이 독점하는 것을 보고만 있기는 싫었다. 하지만 종현의 기가 곧 더욱 짙어지고 커지면서 완벽한 공격 태세를 취하자 조명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말 두번하게 만들지마라 니들한테 너그럽게 대해 줄 기분 아니니까.”
그제서야 하나 둘 방을 떴고, 문을 닫기 전까지 종현의 품에 안긴 태민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곧 문이 느리게 쇳소리를 내며 닫혔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복도를 가득 울렸다.
“태민아. 괜찮아. 나 여기있어.”
“… 왜 자꾸 나 혼자둬요… 나 혼자두지 말라구요… 나 좀 제발 혼자 두지 말라구…”
젖은 까만 머리카락과 젖은 눈동자와 젖은 입술과 젖은 모든 것. 태민에게 그녀가 비춰졌고 둘은 곧 하나가 된다. 종현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니가 약속했잖아 제이 당신이 나한테 약속한거잖아…”
“…너”
위태롭게 안겨있던 태민이 금방이라도 쓰러질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는 종현의 목을 끌어안아 입을 맞췄다. 이것은 태민이지만 태민이 아니었다. 어쩌면. 어쩌면 그녀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태민의 엉덩이를 받치고 끌어안은채 둘의 키스는 끝날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녀다. 가장 사랑했던 그녀다. 종현은 못된 생각이었지만 제발 그가 깨어나지않기를 빌었다. 제발. 조금만 더 그녀와의 재회를 만끽하고 싶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하고 싶은 말도 너무도 많다. 하지만 금방 태민이 몸을 떨며 쓰러지듯이 침대에 누웠고 살며시 뜬 얼굴이 절망과 환희로 젖어들어감을 보고서야 종현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 맞다. 그녀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그녀의 기억이 남아있는것뿐. 금새 종현의 어깨가 떨려왔고 곧 더한 절망으로 가득 차 주저앉아 눈물을 토해냈다.
니가 어떻게 이래. 니가 어떻게 나를 잊어버려. 침대에 누워있는 태민이 두 눈을 감고 터져나오는 눈물을 삼킬때마다 끅끅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것들은 다 잊었어도 됬지만 나마저 잊는건 아니잖아. 어떻게. 어떻게 나를 잊어버릴수가 있는데 넌. 그동안의 서러움이 터진듯 종현이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었다. 난 너를 위해 몇백년을 기다렸는데. 넌 어떻게 나를 잊어버려.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종현의 울음섞인 원망에 태민의 온 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려왔다.
“내가 뭘 포기하고 뭘 배신하고 얼마나 버렸는데!!”
니가 나를 잊을수는 없는 거잖아. 잊을수는 없는거잖아. 잊지말았어야지. 미안해서라도 넌 그럼 안되잖아. 결국은 으아악 소리를 지르곤 주저앉아버렸다. 처음보는 종현이 화난 모습에 덜덜 떨고만 있던 태민이 천천히 종현에게로 다가 가서 작은 손으로 종현의 넓은 등을 토닥였다. 작은 손이 느껴지자 고개를 든 종현은 울음과 두려움으로 흠뻑 젖은 태민을 볼 수있었다. 아 맞다. 또 나약한 소리를 해버렸다. 니가 내 곁에 살아만 있어준다면 그걸로 족했는데. 욕망이라는 것은 이렇게 끈임이 없다. 갖으면 갖을수록 더 갖고싶고 바라는 것 또한 많아진다.
먼저 종현을 끌어안은 태민이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종현을 감싸갔다. 어설프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것이다.
“잘못했어요…투정부려서….”
그녀는 이제 없어도 이태민은 여전히 곁에있다.
*
“김종인.”
숨길 수 없는 외로움과 그리움에 잠시 밖을 돌아다니던 종인은 몇백년 째 보이지않는 달을 원망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말끔한 차림을 한 기범이 빙긋히 웃어보인다.
“오랜만이다.”
“…아, 예.”
“못본사이에 더 멋있어졌네, 너.”
윤기나는 머리카락을 훔치는 가느다란 손가락에 생기가 돌았다.
“장난 싫어합니다.”
“나도 싫어해 장난.”
기범의 입술이 종인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금새 기분이 나빠보이는 표정을 짓는 얼굴이 꽤 근사하다.
“이태민이 얼마나 잘해줬길래 나를 거부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척은….”
가까워지는 입술에서 피 향이 감돌았다. 숨길 수 없는 냄새였다.
“기범님.”
점점 입술이 가까워진다 싶었더니 뒤에서 언제 도착했는지 딱딱하게 부르는 레이의 기범이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지어보였다.
“민호님께서 당장 오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형은 타이밍이 정말 이상하네.”
“김종인 너도.”
먼저 사라진 기범과 뒤따라 사라진 레이와 종인이 곧 차례로 도착한 곳은 맨 아래. 지하에 있는 곳이었다. 먼저 있던 진기와 민호,찬열,타오가 나란히 앉아있었고 투덜거리는 기범과 종인 레이도 곧 자리에 앉았다.
“이태민의 성인식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민호의 눈빛이 진지한 빛을 냈다.
-
온통 하얀 곳인 저택을 구경하며 진저리를 느낀 태민이 속으로 몇번이고 욕을 내뱉었다. 정신병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만큼 너무 하얀곳이었다. 본래 하얀색을 싫어하기도 하지만서도 이렇게나 싫게 느껴지는건 처음이었다.
“태민님…안색이 아직 안좋으신데 괜찮으신거 맞으세요?”
종현의 셔츠 자락을 잡고있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불안해하고있었다. 이 모든 것들. 이 모든 상황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온 몸으로 정신력으로 태민은 이미 모든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태민이 안타까운지 경수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준면이형이 불러요….”
“김준면이?”
끼어드는 종현의 아직 익숙치않은듯 경수가 한발자국 뒷걸음질을 치더니 아까와는 다른 적대감을 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본래 싸워야 맞는데 지금은 같은 팀으로 묶여있었다. 태민을 얻기위해서는 종현이 필요했다.
“말씀해주시려나보지. 넌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그 새끼가 쓸데없는 것들을 잘도 내뱉어서. 태민아 괜찮겠어?”
“이러고 존나 병신같이있는것보단 낫겠네요. 알것같은데 정확히 알아야 더 대처할수도있고.”
날카로워진 태민의 욕설섞인 말을 들은 경수의 표정이 경악에서 놀라움 곧 기쁨으로 변해갔다. 그것을 못 본 태민이 아니었다.
“ 태민님…그럼 저 쪽으로….”
경수가 안내하는 곳으로 가자 꽤나 비장한 표정을 한 준면이 서 있었다.
“어서와.”
순간 진기의 얼굴이 가득히 아롱거렸다.
신이시여, 우리를 기억 하시나요.
당신의 향기를 뒤쫓던 우리는 전쟁의 비극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탓이라고 책망하신다면
저는.
세계는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어느곳에서도 빛이 나질 않습니다.
그 어느곳에서도.
신이시여, 당신이 우리에게 하셨던 그 말씀의 진심은 어디있습니까
진심을 다하면 진실이 될 것이다.
그것또한 거짓이자 진실이었습니까
이 세계에는 순백이 존재합니다.
우리와 전쟁을 하는 세계에는 흑이 존재합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보며, 참 된 것이라 하셨나이다
하지만 흑이 더 달콤한것은 당신의 어리석음이겠지요.
신이시여,
키에와 저를 구해주십시오.
하와 |
분량 지못미ㅜㅜ 오늘따라 집중이 안되네요...ㅠ다음번에 분발해서 열심히 쓰겠습니다!!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