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
"방금……."
누구나 살면서 한 번 쯤은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쪽팔린 기억이 있을 것이다. 흔히 칭하는 말로는 흑역사. 저절로 눈이 꾹 감겼다. 아, 가능만 하면 이 상황에서, 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 쥐구멍에 숨고싶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거였구나. 방금 내 배에선, 몇 일 동안 시전한 무리한 다이어트를 비웃기라도 하는 건지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엄청난 위의 수축 소리가 들려왔다. 하다못해 개도 눈치를 보는 이 시대에 네가 나를 배신하다니. 너는 내 신체인데 왜 내 말을 안 들어. 게다가 명색이 짝남인 민윤기 옆이라니. 세상 모든 비참함은 다 나에게로 온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 옆에서 꼬르륵, 밥 못 먹고 다니는 애 마냥! 세상에, 세상에. 이건 정말 아니야. 나는 여기까지야……. 먼저 가 썸타는 이들이여. 물론 난 썸남이 아닌 짝남이지만.
아니, 생각해 보니까 민윤기도 잘못이 있네. 이런 건 모르는 척 해줘야 센스가 있는 거지. 진짜 너무하다. 왜 또 자꾸 쳐다보고 있어. 쟤 내가 좋아하는 거 모르나. 아, 당연히 모르겠구나. 시선을 뗄 줄 모르는 윤기의 모습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 터질 것만 같았다. 심장이 얼굴에서 쿵쿵 뛰는 것 같았다. 아까와 별반 달라진 것 없는 표정의 민윤기지만 괜히 속으로 웃고 있을 것만 같아 쪽팔림은 한 층 더 커졌다. 소리가 꽤 컸는데 날 어떤 아이로 생각할까. 그래 별 티도 안 나는 다이어트 미쳤다고 했지, 내가. 이럴 걸 알았으면 차라리 하질 말 걸.
"너 밥 안 먹었어?"
그래 이 인간아. 너한테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밥 안 먹었어요. 내가 어제 가족들 삼겹살 구워 먹을 때 얼마나 서러웠다구. 아주 미세하지만 조금씩 줄어드는 몸무게 보고 얼마나 뿌듯했는데. 하루종일 물로 배를 채우는 그 기분을 너가 알겠니. 마음만 같아서는 서러운 이 마음을 다다다, 쏘아 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최대한 예쁘게 웃어 보이는 것 뿐. 아니야, 난 배고프지 않아. 이건 신체적인 공복감이 아닌 심리적 공복감 때문일 거야. 덤덤한 척 해보려고 했지만 실상은 머쓱한 웃음이고. 그냥 때려칠까 진지하게 고민이 됐다. 이러다 입가에 마비 올 것 같아.
어색하게 웃어보이다가, 계속 변하지 않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 보는 윤기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진실을 요구하는 듯한 저 암묵적인 모습. 기분 탓인가.
02
"이렇게 잘 먹을 거면서 왜 굶어, 굶기는."
먹고 있는데 갈구지 말아라. 너가 짝남이라도 그건 용서 못 해. 이게 다 네 탓이라고. 많은 뜻을 담아서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니, 먹고 있던 음식을 잠시 몰아 둔 오른쪽 뺨을 쿡 찌른다. 놀래서 삼켜 버리니, 꼭꼭 씹어서 먹으라고 툭 던지듯 말하고는 제 음식으로 시선을 돌리는 민윤기. 아, 뭐야 놀래라. 갑자기 볼은 왜 찔러……. 심장아 나대지마, 소리가 너무 크잖아. 꼬르륵 소리에 이어서 쿵쿵 소리까지 들려 줄 심산이야? 다시 확 올라오는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며 음식을 다시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일단 민윤기가 이끄는 대로 끌려왔더니 식당이었고. 밥을 시키래서 보이는 대로 시켰고. 먹으래서 먹었는데, 이게 밥인지 떡인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먹는다. 식욕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야. 그나저나 여기 새우 볶음밥 겁나 맛있네. 쉴 새 없이 숟가락을 움직이다 보니, 금세 접시가 바닥을 보였다. 그에 반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윤기의 밥. 내가 돼지가 된 기분이다. 어느 정도 맞는 부분은 있지만. 하지만 난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잘 먹으면 됐어. 하면서도 속으로는 내적 울음이 터졌다. 윤기가 날 돼지로 볼 거야. 이제 확신하겠지. 얻어 먹으려고 굶은 거라 생각 할 지도 몰라. 나새끼 그냥 죽어라!
"야, 너."
"응?"
"잘 먹으니까 보기 좋네."
이런 미친. 쟤 진짜 왜 저래. 사람 하나 죽이려고 작정했나. 마지막 남은 한 숟갈을 입 안에 밀어 넣으며 꼭꼭 씹었다. 계속 씹으면서 복잡한 생각도 정리하고. 는 무슨 정리가 안 돼! 민윤기가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 분명히 말도 별로 없고, 과묵했다. 그리고 누굴 칭찬하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는데. 오늘 아침만 해도 순순히 내 약속에 응해주는 민윤기를 보며 로또 당첨 됐다고 침대 위에서 방방 뛰던 내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걸.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드는데, 다 먹은 건지 턱을 괴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에 사례가 들려 켁켁 거리니까 혀를 쯧쯧, 차면서 물을 건네준다.
천천히 먹어도 돼, 한다. 야 인마, 네가 먹어 봐. 좋아하는 남자애가 쳐다보고 있는데 이게 목구멍으로 잘 넘어 가겠냐. 그래, 음식한테 사과 해야겠다. 감히 먹을 것을 앞에 두고 내가 무슨 말을. 내 뱃살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하는데. 기침을 하느라 눈물이 고인 눈가를 대충 닦아내며 윤기를 쳐다보자 다 먹었냐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는데, 아깝게. 음식이 거의 처음 상태 그대로 남아 있는 윤기 쪽에 놓인 그릇을 보니, 그걸 또 봤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을 한다.
"난 배 안 고팠어."
"근데 왜 왔어?"
"네가 배고팠잖아."
결혼할 거야. 민윤기랑 결혼하고 천국 가겠습니다!
03
"너 넥타이 안 했냐?"
"헐."
내 목을 제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하기에, 넥타이? 하면서 무의식 중에 손을 따라 올렸더니 진짜 없다. 세상에. 나 어떡해. 어디에 버리고 온 걸까. 내가 울상을 짓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윤기. 오늘 미친 학주란 말이야. 아직 한참 남은 교문 앞에 언뜻 보이는 학주의 실루엣 마저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발이 절로 동동 굴러졌다. 야, 민윤기이…… 나 진짜 반성문 쓰기 싫어. 학주 반성문 수준을 문학 작품 급으로 요구하는 악질이잖아. 안 내면 하루에 두 배씩 불어나는 양은 기본이고.
없는 넥타이를 찾는 것 마냥 계속 손은 목에 가져다 대고 안절부절 하고 있는데 한숨을 한 번 쉰 윤기가 갑자기 제 넥타이를 푼다. 어어, 하고 멍하니 있는데 푼 넥타이를 내 목에 건다. 제 손으로 내 손을 잡아 내리더니, 손수 넥타이를 채워주기까지. 윤기의 손이 잠깐 감싸 쥐었던 내 손이 화끈 거리는 것만 같았다. 넥타이를 매준답시고 잠시 가까이 왔던 윤기에게서 훅 끼쳤던 특유의 좋은 향이 아직도 코 끝에 남아 있는 것도 같고. 그냥 모든 시공간이 멈춘 느낌.
넥타이를 채워주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걸음을 옮기는 윤기의 뒷모습을 보고도 그 자리에 가만 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 같은데. 넥타이를 두어 번 만지작 거리다가, 이미 저 앞에서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는 놈을 계속 쳐다만 보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뛰어가 옆으로 나란히 걸음을 맞췄다. 내가 계속 제 옆모습을 쳐다보는데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인지 이따금씩 휴대폰을 보면서 걷기만 하는 윤기.
"야, 야. 그럼 윤기 너는? 반성문 쓰잖아."
"난 너보다 글 잘 쓰거든."
그러니까 학교나 가자. 내 이마를 아프지 않게 한 번 손가락을 튕겨 툭, 치더니 씩 웃으며 다시 앞서 나간다. 아 민윤기 향 좋네. 향수 쓰나.
04
아,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운이 더럽게 없었던 탓일까. 하필이면 오늘 혼자 딱 걸려가지고 상담실 안에 갇혀 있는 윤기를 보면서 속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 작은 창문 안으로 보이는 윤기의 모습에서 깊은 고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직 다섯 줄도 안 쓴 것처럼 공백이 훨씬 큰 윤기의 반성문을 보면서 죄책감은 가중. 나새끼. 그러니까 왜 하필 오늘 넥타이를 안 매고 나와가지고 이런 일을 만들고 그래.
미안한 마음에 도저히 못 지켜볼 것 같아서 문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아, 민윤기 악필이라서 그걸로도 꼬투리 잡힐텐데. 일단은 미안해서 기다려주고는 있는데, 내가 기다린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이미 집에 갈 시간은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여름이라 아직 해는 쨍하지만. 대신 써줄 수 있는 제도가 있으면 내가 썼을텐데. 아니지, 애초에 민윤기가 넥타이를 나한테 매주기 전에 내가 그냥 걸렸어야 했어. 이 멍청이. 좋아한다며 저렇게 곤란하게 만들고. 이제 민윤기가 나 싫어할 수도 있어. 아침에 같이 안 간다고 하면 어쩌지.
근데 쟤는 왜 나한테 지 넥타이를 준 거야? 혼날 거 뻔히 알면서.
계속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한숨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잠시 그대로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린다. 놀라서 고개를 드니 상담실에서 나오다가 시선이 느껴진 것인지 윤기가 나를 내려다 보았다. 저 쪽에서 학주 선생님께서 걸어오고 있었다. 민윤기, 반성문은 다 썼냐. 낮고 묵직한 위협이 크게 외쳐졌다. 윤기는 학주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나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한 페이지 다 채우긴 했어? 내 물음에 잠시 대답이 없다. 그러더니 씩 웃으면서 대답한다.
"말했잖아. 난 너보다 글 잘 써."
저 끝에 계셨던 학주 선생님이 어느새 우리 옆을 지나 상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 쪽에서 천하의 민윤기, 첫 반성문 한 번 검사해 볼까. 하는 아까보단 조금 가벼워진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그리고 정적. 아무 말도 없길래 오, 민윤기. 진짜 잘 쓴 모양인데. 하고 쳐다보는데 윤기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만다. 그럼 이제 집에 가자. 고개를 끄덕이는 윤기와 함께 등을 돌려 걸음을 옮기려는데 상담실 안에서 엄청난 고함이 들려왔다.
"민윤기 인마, 다시 안 와?!!"
내 손을 꽉 잡는 윤기. 너 도대체 반성문에 무슨 짓을 해놨길래 학주가 저렇게 화난 거야.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더니 제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자, 지금은 잠깐 조용히 하고."
"어?"
"같이 도망치기."
나를 왜 공범으로 만들어. 난 죄 없어!
05
"야, 넌 연애 안 하냐?"
아 가만히 있다가 저격 당함. 남이사, 너도 안 하시잖아요. 내가 툴툴거리니 너랑 내가 같냐, 하면서 같이 툴툴 거린다. 그럼 무슨 차이냐고 묻자, 못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란다. 미친놈. 나도 못 하는게 아니라 안 하는 거거든. 누구 때문에 몇 년을 이러고 있는데 진짜. 팔꿈치로 민윤기 왼팔을 툭 치고 괜히 심술을 담아 쿵쿵 걷는데 민윤기가 웃으면서 금세 옆으로 같이 걷는다. 따라오지마. 나 빈정 상했어. 말해도 생글생글. 뭐가 그리도 신나는 것인지.
그러고보니 억울하네. 난 왜 혼자 맨날 삽질만 하면서 연애 한 번 못 하고 있냐. 친구들은 다 남친 있어서 맨날 그 자랑들을 듣고 있는데. 나만 짜게 식고. 입을 불퉁 내밀고 옆에서 계속 말을 걸어오는 윤기를 애써 무시하며 괜히 애꿎은 땅바닥에 발을 질질 끌며 심술을 부렸다. 아, 그럼 신발에게도 포함이 되는 건가. 아무튼. 민윤기 너 알면서 물어본 거면 진짜 나쁜놈이야. 세계 제일 나쁜놈. 민윤기를 고소합니다. 저를 아프게 하니까요. 윽, 마음 아프다.
"삐쳤어?"
"아니거든."
"안 삐쳤다구."
"에이, 입이 댓발 나왔구만."
됐어, 저리가. 내가 손을 휘젓자 또 웃는다. 그럼 나랑 해. 하고 덧붙인다. 뭐를 하긴 해. 너랑 아무것도 하기 싫거든.
어, 잠깐만. 뭐를 해? 하긴 뭐를 해. 뭐를 하자는 거지. 두? DO? 아니 주어와 목적어는 어디다 버리고 온 거야, 마치 내 넥타이처럼. 자리에 멈춰서서 뒤를 돌아 윤기를 쳐다보자 또 어깨를 으쓱한다. 잠깐만 나 잘못 들은 건가. 도대체 뭘 하자는 거야. 내가 생각하는 그것? 에이, 설마.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데 민윤기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 앞에 온다. 아, 또 심장아. 나대지 마. 내가 저번에도 소리 크게 내지 말라고 했잖아. 왜 이래. 진정해!
"그럼 나랑 하자."
"……뭐를?"
"나랑 연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