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개인 제트기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비행기에 오르고 나니 옷을 갈아입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중동 석유재벌의 동태를 살피는 것이 이번 임무였다. 예쁘고 섹시한 여자라면 환장하는 그의 취향에 맞춰주기 위해 나에게는 어울리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한, 과한 노출의 드레스를 입고 알짱거려야 했다.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정보요원은 무슨, 몸 팔아 정보 캐는 것도 아니고.
옷을 갈아입으려 캐리어를 찾는데, 전원 귀국이라는 말에 발걸음이 앞서 호텔에 맡겨두었던 짐조차 찾지 않은 채 택시를 탄 것이 기억이 났다. 안에서는 열불이 끓어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붙박이장을 열어보았다. 걸려있는 옷은 샤워가운이 전부였다.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입을 옷은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 혹은 저 샤워가운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샤워가운이 더 편하기야 하겠지?
내친김에 샤워까지 하고, 샤워가운을 입고 나와 소파에 누웠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눈을 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옷은- 나가기 직전에 드레스로 갈아입어야지.
퍼뜩 눈이 뜨였다.
아, 얼마나 잔 거지, 도착은 했나, 되새기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깼냐.”
근 일 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작년, 나의 육 개월짜리 장기 프로젝트가 끝남과 동시에 그는 일본 야쿠자 소굴로 잠입했다. 반 년간 팀원들의 얼굴을 전혀 보지 못한 채 임무 수행에 전념하며 그들을 만날 날만 그리고 있었는데,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와의 만남은 계속 엇갈렸고, 일 년이 넘도록 그의 얼굴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오랜만이야, 반갑게 인사를 건네려는데 코가 시큰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구준회, 나 안 보고 싶었어?”
인사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나를 보고 싶지 않았냐 묻는 내가 당황스러웠던 건지, 구준회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일 년 만에 본 그의 얼굴은 그새 선이 더 굵어져 있었다. 예전에 어렴풋이 비치던 소년의 기운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의 키는 군대에 가서도 큰다더니, 키도 더 커진 것 같았다. 수트를 입은 그의 모습 역시 낯설었다. 야쿠자로 들어가 임무 수행 중이라더니, 그에 맞춰 입은 듯싶었다. 직선으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라인이 그의 얼굴선과 잘 어울렸다.
“옷 없어?”
그제야 내가 샤워가운을 입고 잠들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짐 가방을 호텔에 두고 왔어.”
“원래 입고 있던 옷은? 가운 입고 비행기 탄 건 아닐 거 아니야.”
“드레스, 연회장에 있느라.”
계속해서 뜨거워지는 얼굴에 대충 놔두었던 드레스를 주워들고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구준회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무시했다. 아, 어쩌자고 샤워가운을 입고 잔 거지. 쪽팔림이 몰려왔다. 진홍색 드레스에 몸을 끼워 넣고 애써 태연한 척 걸어 나왔다. 소파에 다시 앉아 구준회와 눈을 맞췄다. 정체 모를 어색함이 흘렀다. 이내, 그가 정적을 깼다.
“곧 내릴 거야. 준비해.”
“일본에서 탄 거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한국으로 갈 제트기, 가까운 일본에 들러 구준회까지 태워온 모양이었다. 나는 대화를 이어나갈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가족과도 같은 팀원과의 어색함은 견딜 수 없었다.
“야쿠자 소굴에 들어갔다며? 어땠어?”
“그냥, 조폭이 거기서 거기지. 우리나라 조폭이나 러시아 마피아나 일본 야쿠자나 다 똑같아.”
“손가락은 안 잘라가디?”
“안 잘라가던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일 년간의 공백은 생각보다 컸다. 멀뚱히 앉아 더 건넬 말이 없나 생각하는데, 준회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 드레스 자주 입냐?”
“그런 드레스라니, 이거 엄청 비싼 거야!”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였지만, 예쁜 것은 사실이었다. 색깔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별 볼 일 없는 내 몸매를 그나마 부각해주는 옷이기도 했다.
“한빈이 형한테 말해야겠다. 여자애한테 할 짓이 있고 못할 짓이 있지. 옛날에는 그래도 조용한 잠복 임무만 시키더니, 이제는 아예 타겟에게 접근해서 직접 정보를 캐 오라고 하는 거야?”
구준회가 이런 말을 할 줄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우리가 하는 일 중 가장 힘든 일은 구준회가 맡은 일이었다. 말이 좋아 저격수지,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다. 큰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임무가 끝난 밤이면 항상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던 구준회를 모를 리가 없었다. 부담감도, 죄책감도, 위험성도 가장 큰 일을 하는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몸 팔아 정보를 캐는 것이냐 투덜거리던 내 입을 한 대 치고 싶어졌다. 나는 그럴 자격조차 없었다.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어쩔 줄을 몰라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주위를 감쌌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제트기는 긴 호선을 그리며 회전했고, 창문 밖으로는 긴 활주로가 보였다.
한국이다. 임무 수행 사이 틈틈이 왔다 갔다 하던 한국이었지만, 통 바빠 오지 못할 적도 많았다. 멤버들을 모두 만난다는 것 또한 설레었다. 한빈 오빠, 지원 오빠, 준회, 동혁이. 다섯이 모두 만난 것은 임무를 시작한 후로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누군가는 빠져 있었다. 오 년 만의 전 멤버의 재회라, 기대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제트기가 착륙했고, 덜컹거리는 진동과 함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멍하니 내릴 준비를 하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까만 재킷이 내 무릎 위에 던져졌다.
“그거라도 입고 가.”
“어, 괜찮은데…….”
“사람도 많을 텐데 그렇게 다 파인 옷 입고 다닐 거야? 그냥 입고 가, 너도 여자야.”
그의 단호한 눈빛에 못 이겨 옅은 향수 냄새가 올라오는 수트 재킷을 받아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우리는 택시를 타고 ‘바벨탑의 설계자’ 전원이 공동 사용하는 숙소로 향했다. 동혁이의 오피스룸도 그곳에 있었다, 한빈 오빠의 공식적인 거주지 역시 그 숙소로 등록되어 있었다. 나, 구준회, 지원 오빠만큼은 아니지만 많이 돌아다니는 탓에 숙소에 항상 붙어있는 것은 동혁이뿐만이었지만.
택시에서 내리니 드레스를 입은 나를 향해 이질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구준회는 나의 허리를 살짝 감싸고 걸음을 재촉했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천천히 올라가자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한빈 오빠와 동혁이는 계속 한국에 있었을 테고, 지원 오빠는 내가 탄 비행기가 일본에 들르는 사이에 도착했을 터였다. 나와 구준회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바벨탑의 설계자’ 전원의 재회가 이루어질 것이었다.
생각할 틈도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재빨리 걸어갔다. 뒤에서 구준회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좋아?”
“응, 당연하지. 아, 동혁이 보고 싶다.”
항상 가장 보고 싶은 것은 동혁이였다. 스파이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세계를 돌아다니는 스릴에 재미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나는 자부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동혁이는 방 안에 틀어박혀 컴퓨터 화면만 보고 있었을 것이었다. 항상 그에 대해 애잔한 마음이 듦은 부정할 수 없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안쪽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이 뛰쳐나와 나를 힘차게 껴안았다.
“막내야! 아이고, 우리 아가 왔어.”
지원 오빠였다. 나이 차이는 다섯 살밖에 나지 않았지만 오빠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언제나 막내, 혹은 아가였다. 구준회, 김동혁은 나와 나이가 같았지만, 생일이 가장 느린 내가 막내는 맞았다. 그러나 항상 막내 취급을 받고 보살핌을 받는 것은 나 뿐이라, 구준회와 동혁이는 나이상 막내고 뭐고 전혀 막내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오빠는 내 볼에 입을 맞추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고 눈이 없어지도록 웃었다.
“김한빈! 김동혁! 애들 왔어.”
인사조차 받지 못한 구준회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알기는 했었나 보다. 지원 오빠가 나를 껴안고 뽀뽀하고 온갖 호들갑은 다 떨어놓는 사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뻘쭘하게 서 있던 구준회는 그제야 실없이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한빈 오빠와 동혁이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모인 ‘바벨탑의 설계자’ 멤버 전원에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근간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유대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어릴 적부터 가족이며 친구며 모두 없었던 우리에게 서로는 가족 그 이상의 존재였다.
나는 한빈 오빠에게 옷을 먼저 좀 갈아입고 오겠다고 말한 후 조용히 내 방에 들어갔다. 밖에는 네 명의 남자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활기가 벽을 넘어 내 옆까지 생생하게 전해졌다. 재빨리 편한 트레이닝복을 꺼내 입고, 밖으로 나왔다.
구준회에게 재킷을 건네주자, 오오, 하는 감탄사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구준회가 옷 벗어준거야? 새끼, 남자 다 됐네.”
한빈 오빠를 시작으로,
“쟤가 그러니까 징그럽다. 언제부터 저렇게 매너 좋았는데?”
“그러니까요. 멋진 척은 혼자 다 한다니까.”
지원 오빠와 동혁이까지 나서자 구준회는 머쓱하게 웃었다.
“맞다. 야, 김한빈.”
지원 오빠가 주위를 환기했다. 리더인 한빈 오빠를 막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지원 오빠밖에 없었다. 나이도 나이였지만, 능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원래 리더 후보는 지원 오빠였지만, 좀 더 진중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의 리더를 원했던 국가의 요청으로 리더는 한빈 오빠로 결정된 것이었다.
“너 자꾸 애한테 그렇게 파인 옷 입힐래? 카지노에 여자라면 눈 돌아가는 사람 엄청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작작 입혀.”
“일이야. 그리고 여자에 눈 돌아가는 사람 그렇게 많이 없을걸? 다 자기 애인이랑 다닐 텐데. 형이나 여자에 눈 돌아가지.”
한빈 오빠가 정곡을 찌르자 지원 오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구준회와 둘이 비행기에서 마주했을 때의 어색함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몇 해간 각자 세계를 돌아다니며 임무에 충실했던 우리 5명은 다시 모이자 예전과 전혀 다를 바 없이 활기 넘치는 모습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벨탑의 설계자’ 대원들,”
한빈 오빠가 분위기를 잡았다. 리더 티 내느냐며 구박하는 지원 오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 임무는 다섯 멤버 다 같이, 합동 미션이야.”
옆에서 한빈 오빠를 비웃던 지원 오빠조차 조용해졌다. 합동 미션이라니, 임무를 수행한 그간 그런 것 따위는 없었다. 심지어, 2명이 함께 임무를 수행한 적도 없었다. 동혁이의 서포트와 한빈 오빠의 지휘를 제외하고, 여러 멤버가 한꺼번에 같은 장소를 가거나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이행했던 임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파국에, 다섯 멤버가 다 같이하는 합동 미션이라니, 얼떨떨했다. 합동 미션인 만큼, 그 중요도와 복잡성은 매우 높을 것이었다. 나는 숨죽여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작전명 타이타닉. 대원들의 활약을 기대한다.”
-
암호닉 (신청 받습니다)
바벨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