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빈 오빠가 ‘작전명 타이타닉, 대원들의 활약을 기대한다’와 같은 거지 같은 발언을 내뱉었을 때 멤버들의 반응은 극한에 다다랐다.
“와, 미친 새끼, 나 지금 소름 돋았어.”
“……아, 내 손발.”
“옛날에는 우리 다 중2병 걸려서 멋있다고 했을지 몰라도, 다 스무 살도 넘었는데……. 형,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다행히도 오그라든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한빈 오빠의 말은 26살의 남자가 하기에는 너무나도 오그라드는 말이었다. 사실상 서로의 코드명을 말하며 무전 용어를 쓰는 것부터가 엄청나게 오그라들었지만, 이는 업무상 불가피했기에 그렇다 치고, 불필요한 상황에서도 낯간지러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었다.
“애초에 우리 코드네임 자체부터 오그라듦의 극치 아니었나. 밀실의 저격수, 미다스의 손, 위저드 네메시스, 초선의 환생.”
“비겁하게 네 코드네임만 빼고 말하는 게 어디 있냐, 바벨탑의 주인?”
한빈 오빠와 지원 오빠의 대화에 구준회와 김동혁은 오글거려 죽겠다는 모션을 취했다.
“둘 다 작작하고, 미션이 뭔지나 좀 자세히 설명해봐요.”
구준회가 중재를 하고 나서야 한빈 오빠는 진정하고 말문을 다시 열었다.
“그래. 일단, 테러 단체 AFT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은 다들 알고 있겠지.”
스파이의 생명은 정보력이었다. 정보가 없는 스파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각종 테러 단체며 각국의 정세를 파악하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었다. 그러한 우리가 AFT에 관해 모를 리가 없었다. AFT는 이슬람 테러 단체였다. 미국에 대한 반발심으로 생겨난 이 단체는 항공기 납치, 폭탄 테러 등을 포함한 여러 테러를 일삼았다. 미국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에도 위협을 끼치는, 최근 가장 주목받는 무장 단체가 바로 AFT였다.
“AFT가 대규모 테러를 계획하고 있어.”
무거운 긴장이 공기를 감쌌다.
“지금 영국에서는 타이타닉호를 계승한 배가 출항할 예정이야. 백 년 전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화려함을 압도하는, 엄청난 호화 유람선이지. 세계 각기 각층의 유명인사들도 탑승할 예정이야. 할리우드 톱스타의 결혼식도 그 배에서 열린다면, 말 다 했지.”
한빈 오빠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내뱉듯이 말했다.
“AFT는 그 배를 침몰시키려 계획하고 있어.”
이건 그냥 테러가 아니었다. 타이타닉 2호라면 그 누구나 알고 있는 배였다. 타이타닉을 계승했다는 그 배는 1년 전부터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핫이슈였다. 배의 주요 고객층은 전 세계의 상류층이었다. 할리우드 톱스타는 물론이고 람보르기니의 CEO, 미국의 대통령, 영국의 여왕까지 탑승하게 될, 현대판 상류층의 집합소였다. 그런 배를 침몰시킨다는 것은 역사상 존재했던 그 어느 테러보다도 심각한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배의 침몰을 막는 것이 우리의 목표야.”
“미쳤어?”
한빈 오빠가 말을 마치자마자 지원 오빠가 끼어들었다.
“미국 문제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해. 그쪽도 정보 요원 싹 깔렸잖아. 왜 우리가 해야 하는데?”
“북한 쪽의 정세가 좋지 않아. 자칫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을 때 타국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아예 못 하지.”
“씨발…….”
“잘 들어. 평소와 같으면 AFT에서 하위 정보요원을 보내 배를 침몰시키겠지만, 스케일도 스케일인 만큼 이번 테러에는 AFT의 수장까지 직접 참여할 거야.”
AFT의 수장까지 참여한다니, 크기는 더럽게 큰 테러였다. 다섯 명의 ‘바벨탑의 설계사’ 요원 전체를 불러들인 이유가 있었다.
“역할을 설명해줄게. 우선, 미다스의 손.”
한빈 오빠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지원 오빠의 코드네임을 불렀다. 임무를 내릴 때 코드네임을 부르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카지노 딜러로 위장할 거야. 타이타닉호 특성상 대형 카지노가 자리 잡을 거고, 탑승객들의 대부분은 카지노에 오게 되겠지. 다른 사람으로 위장하고 있을 AFT의 수장을 찾으면 돼.”
“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AFT의 수장 정도면 아예 성형수술까지 해서 얼굴을 바꾸고 다닐 텐데, 그걸 어떻게 찾아? 안 해. 아니, 못 해!”
“못 하는 건 없어, 해. 김동혁도 도울 거야.”
길길이 날뛰는 그에게 한빈 오빠는 단호하게 대꾸했고, 말을 이었다.
“위저드 네메시스. 평소 같으면 그냥 해킹만 맡길 텐데, 이번에는 너도 AFT 수장 탐색 업무야. 선박 내부 바에 바텐더로 넣어둘 테니, 거기서 노트북 가지고 간간이 해킹 업무도 하면서 바에 오는 사람들 적당한 선에서 상대해 주면 돼.”
바텐더 김동혁이라니, 잘 상상은 가지 않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업무에서마저도 동혁이가 어느 한 객실에 틀어박혀 컴퓨터만 만지고 있었더라면, 나는 정말이지 애잔함을 숨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그랬다면, 내가 직접 한빈 오빠에게 가서 동혁이에게 조금 더 스펙터클한, 정말 스파이다운 임무를 달라고 부탁했을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밀실의 저격수. 여기서 AFT의 수장을 찾아서 죽일 수는 없어. 바로 국제 이슈로 논란이 될 게 뻔하니까. 대신, AFT의 말단 정보 요원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거야. 그들을 잡아내어 처리하면 돼. 눈에 띄지 않는다면 굳이 처리할 필요는 없고, 눈에 띄거나, 처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AFT 요원들만. 어차피 그들도 다 위장하여 다닐 테니까.”
“그럼 별일 없으면 총 쓸 일 없다는 소리예요?”
구준회가 묻자 한빈 오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구준회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리도 좋을까, 마음 한구석이 아려옴과 동시에, 나를 부르는 한빈 오빠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마지막으로, 초선의 환생. 김지원과 김동혁이 AFT의 수장이 누군지 알아내면 그에게 접근하고, AFT의 모든 타이타닉 침몰 계획이 적힌 문서를 빼 오면 된다.”
“또 파티 드레스 입고 알짱거려야겠네요.”
가시가 박힌 내 말투에 오빠의 표정이 살짝 굳는 것이 보였다. 홍일점인 내가 이런 일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한빈 오빠가 내리는 명령이 아니라 국가에서 내려오는 명령임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남자에게 거짓 웃음을 흘리며 정보를 빼내오는 일은 분명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수장의 정체를 알게 될 때까지는, 배의 초호화 시설을 마음껏 즐겨도 좋아.”
그 나름의 차선책이었다. 임무를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의 임무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자유로이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은 오빠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한빈 오빠가 말을 이었다. ‘바벨탑의 설계자’의 리더로서 일할 때, 한빈 오빠는 한없이 냉정한 사람이었다. 열여덟 어린 나이에 내가 얻은 첫 임무는 50대 대기업 CEO에게 접근하여 정보를 빼내오는 것이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에게 그런 일을 맡길 때도 오빠는 감정 없이 말했다. 해, 일이야, 네가 키워진 이유고. 그랬던 오빠인데, 지금 나를 바라보는 눈은 미안함이 차 있었다. 아, 시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번 단 한 번만. 이 일이 끝나면 국가에 내가 정식으로 건의를 올릴 거야. 나도 네가 이런 일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국가에 대한 불복종은 그만큼의 대가가 따랐다. 오빠는 국정원장에게 엄청나게 깨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고마워요…… 오빠.”
오빠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흔치 않은 그의 미소에 멤버들은 모두 살짝 놀란 눈치였다.
“그러면, 오늘 일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자.”
“그럼 다들 칵테일 한잔 할래요?”
기다렸다는 듯, 동혁이가 금세 말을 받았다. 칵테일이라면 환장하는 우리였다. 지원 오빠는 조오치, 말하며 히죽댔고, 한빈 오빠는 고개를 끄덕였으며, 구준회마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나 역시 최대한 해맑게 웃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자.”
동혁이가 내 팔을 툭툭 쳤다. 그의 입가에는 평소와 같이 말갛고 고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동혁이의 웃음은 내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막내들이 해오는 거냐? 얼른 갔다 와라.”
“구준회는 뭐함? 안 가?”
아 맞다, 쟤도 막내 라인이었지, 순간 잊고 있었다. 구준회는 무슨 소리를 지껄이냐는 듯, 무심한 표정을 짓고 소파에 상체를 기대 나른히 앉아 있었다. 존나 여왕이세요? 눈을 살짝 흘기자 구준회가 일어나려 몸을 일으켰다. 저 새끼, 그냥 둘이 가는 게 낫겠다.
“됐어. 동혁이랑 둘이 갔다 올게.”
나는 동혁이의 팔을 잡아끌고 숙소 안쪽의 홈 바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 숙소에는 와인 셀러는 물론이고, 홈 바까지 있었다. 일을 시작한 직후에는 우리 다섯이 다 같이 숙소에 있을 때가 많았지만, 미성년자의 음주는 절대 안 된다는 한빈 오빠의 지침에 바에는, 뭐, 발도 자주 들이지 않았다. 시발, 생각하니까 억울했다. 구준회는 지원 오빠랑 잘도 같이 마시더만, 나는……. 여하튼, 성인이 된 후로는 숙소에 사람이 있는 것이 드물었고, 직접 칵테일을 제조해 먹을 만큼의 취미는 없었다. 혼자 적적하게 술을 들이켜는 것 역시 껄끄럽기 마련이었다. 간만에 편한 분위기에서 칵테일을 마실 생각을 하니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칵테일 만들 줄 알아?”
넌지시 물었다. 나는 마실 줄만 알았지, 만들 줄은 몰랐고, 얼음 채운 잔에 위스키만 따라 가져간다면 지원 오빠와 구준회의 갈굼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스트레이트나, 온더록스를 가져간다면 가벼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질 것이 뻔했다.
“당연하지. 한빈이 형이 나를 괜히 이번 임무에서 바텐더로 넣었겠어?”
동혁이는 찬장에서 각종 도구를 꺼냈다. 이건 쉐이커, 얘는 머들러, 스트레이너,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런 건 언제 배웠냐?”
“틈틈이. 너 오면 꼭 해주고 싶은 칵테일이 있었어.”
그는 나에게 바 의자를 빼주었다. 높은 바 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칵테일을 준비하는 동혁이를 구경했다. 지원이 형은 진토닉, 한빈이 형은 드라이 마티니, 구준회는 블랙 러시안, 나는, 슬로우 진 피즈, 칵테일 이름을 중얼거리며 술병과 라임 등을 꺼내는 동혁이의 모습은 매우 흥미로웠다. 이윽고, 네 개의 잔이 바 테이블에 나란히 자리 잡았다.
“내 거는?”
“가장 중요한 거로 대미를 장식해야지.”
“뭔 대미야. 괜히 가오 잡지 말고 그냥 맥주나 한 캔 따 봐.”
동혁이는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치고, 빙긋 웃었다.
“기다리기나 하세요, 괜찮은 거로 만들어 줄 테니.”
그는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쉐이커에 얼음과 진을 일정량 넣고 붉은빛 시럽을 뿌려 흔들었다. 투명한 액체가 점점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내가 직접 개발한 칵테일이야.”
의자를 왼쪽, 오른쪽으로 돌려가며 동혁이를 보고 있자니 그의 고운 얼굴선이 눈에 띄었다. 무슨 남자애가 여자보다도 선이 저렇게 곱지, 시발. 그런 내 마음이 표정에 드러난 것인지, 그는 푸흐- 하고 웃으며 표정 좀 풀어, 예쁜 얼굴에 주름진다, 말하고서 액체의 비율에 고심하는 듯 살짝 찌푸려진 미간으로 쉐이커를 응시했다.
“너 만들어 주려고 옛날에 개발한 거였는데, 이제야 주게 되네.”
그는 레몬즙을 짜내 칵테일글라스 림에 살짝 묻혔다. 이어, 가느다란 손가락이 잔의 가장자리를 쓸어내렸고, 동혁이는 소금인지 설탕인지 모를 하얀 가루를 림에 뿌렸다. 옛날에, 칵테일은 림에 소금이나 설탕을 뿌려 프로스팅 한 것이 참 매력적으로 느껴진다고, 넌지시 동혁이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걸 기억한 것인지, 그는 그대로 프로스팅 기법을 사용하여 내 칵테일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쉐이커 안의 투명한 붉은 액체를 칵테일글라스에 따랐다.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은 동혁이는 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문득, 훌쩍 큰 그의 키가 눈에 띄었다. 이 새끼,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내가 더 컸었던 것 같은데, 어느 새 내 키를 훌쩍 넘어서 있었다. 열 여섯 살 정도였나, 그때까지도 여자인 나와 키가 비슷했던 동혁이에게 너는 아직도 키가 나랑 똑같아서 어떡하니, 남자애가,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귀엽게 발끈하며 5년 후에는 그래도 내가 더 클걸, 그렇게 되면 깝치지나 마, 말했었다. 그랬던 게 엊그제 같은데, 김동혁은 어느새 나보다 훌쩍 큰 키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맞다, 오빠들이랑 구준회 칵테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다섯 개의 잔이 나란히 올려진 쟁반이 내 기억을 상기시켰다. 동혁아, 우리 이제 가자, 말하며 쟁반을 향해 손을 뻗는데, 동혁이가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몇 년 만에 한 그와의 포옹은 눈물 나게 따뜻했다. 넌,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보고 싶었어.”
그가 나를 꼭 안은 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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